대한민국 1호 육가공 장인 임성천 마이스터를 기억하며
대한민국 1호 육가공 장인 임성천 마이스터를 기억하며
  • 김재민
  • 승인 2023.03.16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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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앞서간 '기술인'... 실패도 많았지만 육가공기술인 양성에 헌신
갑작스러운 고인의 죽음에 많은 제자들 애도 표해
본사가 진행한 식육관련 세미나에서 강의중인 임성천 마이스터
본사가 진행한 식육관련 세미나에서 강의중인 임성천 마이스터

[팜인사이트= 김재민] 1970년대 축산 관련 학과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이공계열에서 의대나 약대를 제외하면 거의 탑 수준의 인기를 끈 학문이 축산학이었다.

축산학의 인기가 높았던 것은 미래산업이라는 인식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 정부는 축산진흥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재벌 대기업에 축산 투자를 유도하기까지 하였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농경국가였다. 농업이 제일 산업이었던 시절, 농촌 경제를 일으켜보겠다며 정부는 축산업 진흥정책을 펼쳤고,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넓은 초지가 있는 목장의 카우보이를 꿈꾸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임성천 마이스터는 서울 성동고등학교 재학 시절 양떼를 돌보는 목동이 되기를 꿈꾸며 1970년대 축산 관련 최고 학부로 명성이 높았던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에 입학해 축산가공을 전공하게 된다.

국제육가공품 품질경영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활약한 임성천(뒤에서 두번째 줄 왼쪽) 마이스터
국제육가공품 품질경영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활약한 임성천(뒤에서 두번째 줄 맨 왼쪽) 마이스터

1981년 축산대학을 졸업한 임성천은 독일에 있는 육가공회사에서 연수를 받을 기회를 얻게 된다.

보통 기술연수를 받기 위해 독일로 왔던 과거 축산가공학과 졸업생들은 일을 하다가 언어를 배우고 독일 현지 사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 독일의 대학원에 진학해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교편을 잡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임성천 마이스터는 달랐다. 독일의 햄과 소시지 제조기술을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생각에 독일 BONN 직업학교에 입학해 1984년 식육제조과정을 졸업하게 된다. 한국 최고의 축산대학 졸업자가 독일에서 소시지를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의 실업계 고교, 지금으로 보면 마이스터고등학교에 입학해 기초부터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CJ제일제당 백설햄 개발팀장으로 일했던 임성천은 CJ에 사표를 내고 독일 프랑크프르트(FRANKFURT) 식육 전문학교에 입학해 마이스터 과정을 졸업하고 1987년 식육 수공업 마이스터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독일은 몇몇 소상공인 직종에 대해 높은 진입장벽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교과정에서 견습기능인 자격을 취득하면, 실무에서 2년간 도제로 일한 이후 전문학교에 진학해 마이스터 과정을 밟을 수 있는 자격을 주고 이 과정을 마친 사람들에게 마이스터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자격을 준다.

임성천은 축산대학 졸업 후 이 수공업마이스터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독일에서 직업전문고교를 진학하고, 다시 전문학교에 진학하는 수고를 한 것이다.

이렇게 임성천은 대한민국 1호 식육 수공업 마이스터가 되어 대한민국에 돌아온다. 그리고 훔메유통을 창업해 대한민국에 수제육가공품을 처음 선보이게 되지만 쓰디쓴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 그가 대한민국에 돌아와 창업을 했던 그 시기 우리 육가공업계는 육가공품 원료로 칠면조고기와 같은 잡육을 쓰다 소비자단체에 들통이 나면서 홍역을 치른다. 육가공품에 대한 부정적 기류가 너무나 강해 임성청 마이스터의 훔메유통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 식문화가 한식이라는 테두리에 갖혀 있어 독일식 육가공품에 대한 선호 또한 높지 못했다.

이후 지금은 도드람LPC로 바뀐 안성축산진흥공사 사장을 역임했는데, 안성축산진흥공사는 정부가 수출용 도축장으로 의욕적으로 지원한 안성LPC 운영사였다. 이후 학교법인 건국대학교 건국햄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건국햄에 수제햄과 수제소시지 등 자신이 가진 기술을 접목한 제품개발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훔메유통을 일으켜 독일식 정통 햄과 소시지 제조와 판매에 다시 도전한다.

안타깝게도 1980년대 후반부터 그가 도전했던 수제햄과 소시지는 큰 빛을 보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당시까지 우리 식문화에서 정통 소시지나 햄에 대한 수요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식문화가 서구화됐다 이야기는 하지만, 2000년대까지 우리 식문화는 한식이 중심이었고 서구음식은 우리 한식의 반찬 정도로 활용되던 때였다.

육가공품의 이용 방법은 육가공품을 그대로 이용하는 메뉴는 발전하지 못했고, 부대찌개 재료나 김밥 재료가 대부분이었고, 스팸과 같은 캔햄, 비엔나소시지를 굽거나 볶아 밥반찬으로 이용하는게 전부였다.

육가공품에 대한 부정적 인식까지 더해져 햄과 소시지보다는 삼겹살이나 목살을 불에 직접 구워먹는 등 생고기를 직접 조리해 먹는 방식이 주된 돼지고기 이용법이었다.

선구자였던 임성천 마이스터의 기술이 빛을 보지 못한 결정적 이유다.

훔메마이스터슐레에서 강의 중인 임성천 마이스터
훔메마이스터슐레에서 강의 중인 임성천 마이스터

그러던 중 미국, EU와 FTA가 체결되던 때, 국내 축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킬 묘안이 필요했다. 그때 정부가 들고나온 것이 즉석육가공이었다. 식품위생 관련 법령, 축산위생 관련 법령이 규제 위주로 설계되다 보니 정육점 등에서 즉석에서 햄이나 소시지를 만들어 판매하는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부는 2013년 이를 규제개혁을 통해 정육점 등에서 즉석육가공품을 제조판매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임성천 마이스터가 그렇게 꿈꿔왔던 세상이 열릴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1990년대 공장에서 주로 만들어졌던 빵이 로드샵에서 만들어 판매하는 즉석빵 시장으로 급속하게 바뀌던 시절, 육가공품도 미국, 독일 등 선진국처럼 로드샵에서 제조해 판매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규제 위주의 축산물위생정책은 즉석육가공 시장이 싹도 틔우지 못할 정도로 가로막고 있었다. 제도 개선으로 정육점에서도 햄과 소시지 등 육가공품을 만들 수 있는 길은 열렸지만 안타깝게도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관련법이 통과되자 농협, 축산기업중앙회 등에서 즉석육가공 기술을 가르치는 강좌를 열기 시작했고, 임성천 마이스터가 관여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들 기관이 전문적으로 육가공을 가르칠 수 있는 인프라도 강력한 의지도 없었다는 것이다. 교육 수요는 많은데 배울 곳이 없는 현실은 즉석육가공이 육류시장을 혁신할 것이라는 전망을 빗나가게 했다.

임성천 마이스터가 어렵게 취득한 마이스터 자격증은 자신의 샵을 창업할 수 있고 후배를 양성할 수 있는 자격증이었다. 임성천 마이스터는 그때부터 후진 양성을 위해 그가 가진 기술을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2016년 국내 유일의 식육가공교육장인 훔메마이스터슐레를 출범시키기 이른다.

작은 교육기관에서 많은 기술인을 배출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지만 매년 식육가공 기술을 배우고자 훔메마이스터슐레 문을 두드리는 제자들이 하나둘 늘어났고, 기존의 업장에 육가공제품을 접목해 활성화시키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자들과 함께 독일 IFFA 육제품 품질경진대회에 참가해 많은 입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쓰임은 여기까지였다. 2023년 3월 심근경색으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관례대로 독일에서 대학원에 진학해 학위를 받고 국내로 돌아왔다면, 제일제당에서 그냥 꾸준히 근무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평범한 학자, 평범한 셀러리맨으로 그냥 잊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편한 길을 걷지 않았다. 독일의 햄과 소시지에 매료되었고, 육가공 장인이 자신의 천직이라 생각했는지 고기에 진심으로 평생을 보냈다. 너무 앞서 나가 실패도 있었지만, 아마도 후배를 양성하며 보낸 지난 10여년의 시간이 그의 육가공장인으로 살아온 세월 중 가장 행복하지 않았을까?

고단했던 그의 삶의 기억하며 글을 맺는다. 

본지가 주최한 식육세미나에서 돼지고기 발골을 시연하고 있다.
본지가 주최한 식육세미나에서 돼지고기 발골을 시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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