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1] 사라지는 기록 上 - 양곡중도매인
[기획연재 1] 사라지는 기록 上 - 양곡중도매인
  • 박현욱 기자
  • 승인 2018.11.05 12: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라지는 그들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양곡 도매시장 전경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양곡 도매시장 전경

[팜인사이트=박현욱 기자]

양종철 씨는 서울에서 수 십 년째 쌀을 유통하면서 입에 풀칠을 해왔다. 그는 산지에서 도매시장으로 유입되는 쌀을 매입해 슈퍼마켓이나 골목식당에 납품하는 밥벌이로 생계를 꾸린다.

양씨가 20대 후반이었던 1980년대에는 지금처럼 거래처를 찾아 헤매는 일은 좀처럼 드물었다. 집에서 한발짝만 떼도 쌀가게가 보일 정도로 전국에는 약 3만 곳 이상의 싸전(쌀상회)이 간판을 내걸고 성업했기 때문이다.

2015년 기준, 우리나라 전역에 편의점 3만곳이 있다는 통계가 잡힐 정도니 당시 쌀가게는 마치 점조직처럼 도시 골목 이곳저곳에 스며들어 쌀을 팔았다.  "바빴어도 그 시절이 그립다"는 양씨는 싸전에 쌀을 납품할 때를 인생의 전성기로 꼽는다.

큰 규모만큼이나 싸전을 비롯한 당시 곡물업계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국회를 향해 로비를 할 정도로 자본과 힘을 축적해 막강한 이익단체로 군림할 정도였다. 그들은 전국 8도를 아우르는 거버넌스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영역에 성벽을 쌓았다.

당시 양곡정책을 담당했던 정부의 한 공무원은 "쌀의 원산지 표시나 품종 혼합을 단속하기 위해 현장에 나가면 쌀 상인들이 가마니 갈고리로 위협할 정도로 기세등등했다"라고 곱씹었다.

이런 싸전이 어느 순간 급속히 자취를 감췄다. 되로 쌀을 퍼주는 광경은 사라지고 슈퍼 매대에 포장된 쌀이 차곡차곡 쌓여 손님을 기다렸다. 양곡관리법에 명시돼 있는 쌀 판매가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고 슈퍼마켓에서도 쌀판매가 가능하게 되면서다.

싸전은 쌀 이외의 상품 구색을 갖추지 못해 경쟁력을 상실해나갔다. 임시방편으로 연탄을 팔기도 했는데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과 기름·가스보일러의 보급으로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각종 생활식품에 쌀까지 장착한 슈퍼마켓은 싸전을 몰아냈다. 싸전이 슈퍼마켓으로 간판을 고쳐 단 경우도 심심찮게 목격됐다. 흥정으로 쌀 한되를 더주는 인심을 그리워하던 주부들조차 쌀 포장판매에 대한 거부감을 지워나갔다.

양 씨의 입지도 좁아졌다. 먼저 연락을 해오던 싸전이 무너지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산지와 직접 접촉해 물량을 확보해 왔던 중도매인들의 거래관행을 정부가 불법으로 규정하고 도매법인만이 산지영업을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관행을 무시한 정부정책은 도매시장으로 반입되던 곡물 규모를 급속히 축소시켰다. 양 씨와 같은 중도매인들이 경영난에 허덕이자 하나둘 폐업 절차에 들어갔다. 1990년대까지 팽배했던 유통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들을 보호하기보다 약육강식의 시장논리로 방치했다.

더구나 농자재의 발달과 산지의 기계화로 억대 규모의 생산자들이 등장하면서 부농들은 도매시장을 경유하기보다 직거래를 원했다. 같은 시기 대형유통의 등장으로 소비지까지 규모화되면서 쌀 유통은 점차 단순해졌다. 쌀의 포장유통 의무화, 지역 브랜드화 등이 버무려지면서 쌀을 다뤘던 중간상인들은 소리소문없이 고사하기 시작했다.

양 씨와 같은 중도매인들은 살길을 모색했다. 쌀경매제가 폐지되고 중도매인의 직매입이 가능해지면서 그들은 영세 농민들을 공략했다. 지역 이장들과 접촉해 소량생산되는 곡물을 흡수해 나갔다. 전국에 네트워크화 된 이장들과 스킨십이 잦아지면서 모세혈관처럼 지역 곳곳의 영세농민이 수확한 곡물을 도매시장으로 흡수했다.

양곡도매시장 내 중도매인 매장
양곡도매시장 내 중도매인 매장

"수집과 분산기능이 유통의 본래 역할이죠. 그 중에서도 대형 물량만 소화하는 대형마트나 농협이 소화하지 않는 소규모 곡물은 저희가 팔아줍니다. 물량은 작지만 다양한 곡물에 대한 수집과 분산을 책임지고 있는 셈이죠."

대개 소비자들은 유통이 짧고 단순하면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추가비용을 떼어버려야할 군더더기쯤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뿐만 아니라 생산자들도 유통에 항상 최하점을 준다.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유통이 야금야금 축낸다고 여긴다. 유통이 그동안 천대받았던 이유다. 산지와 소비지가 대형화되고 규모화될수록 우리는 유통을 자신의 소비공간에서 밀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농민이 영세하거나 고령일 경우 오히려 유통인을 필요로 한다. 생산량이 볼품없어 대형수요처 납품은 꿈에도 꾸지 못하고 물량이 넘쳐나는 시기에는 농협에서도 쉽게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산지에서 밭떼기 상인이라 불렸던 산지유통인도 비슷한 부류다. 유통인들은 영세 농민들에게 현금 유동성도 제공하고 소량 재배되는 물량도 소화해주는 소위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고령인 양 씨는 폐업을 준비 중이다. 고맙게도 아들이 중도매인을 이어받는다는 의사표시를 했지만 더이상 양곡 중도매인에 이름을 올릴 수가 없다. 서울특별시에서 더이상 중도매인 허가를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곡물 유통업계의 손꼽히는 업체도 중도매인법인으로 허가받기 위해 대기중이지만 서울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양씨를 비롯한 양곡중도매인들은 도매시장을 살리기 위해 발벗고 나서지만 정부도 언론도 누구도 응답해주지 않는다.

※ 본 기사의 양종철씨는 가상의 인물로 양곡 중도매인 3명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