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86] 벌꿀을 가장 많이 공물(貢物)로 바친 지역은 경상도였다
[48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86] 벌꿀을 가장 많이 공물(貢物)로 바친 지역은 경상도였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8.11.1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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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102호, 양력 : 11월 13일, 음력 : 10월 6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각 군현(郡縣)에 분정(粉定)된 공물은 그 지방에서 나는 토산물을 부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이를 임토작공(任土作貢)이라 하였습니다.

세종(世宗)대에 펴낸 세종지리지에 따르면 전라, 경상, 황해도에는 과실류가 많이 분정되어 있으며, 충청, 강원, 황해도에는 목재, 전라, 경상도에는 해산물 등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배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각 지역의 대표적인 공물로는 충청, 전라, 경상도의 면포(綿布), 평안, 황해도의 명주, 함경, 강원도의 상포(常布), 양계 지방의 담비 가죽(貂鼠皮), 강원도의 목재, 황해도의 철물(鐵物), 전주, 남원의 두꺼운 종이(厚紙), 임천,한산 등지의 생모시(生苧), 안동의 돗자리(席子), 제주도의 말(馬)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물 중에 꿀은 자연 혹은 양봉을 통해 전국적으로 생산되어 진상되었는데, 태종(太宗)대에는 산이 있는 고을에 양봉통(養蜂筒)을 설치하여 청밀(淸蜜)과 황랍(黃蠟)의 납공을 분담시키기도 하였고, 봉진하던 청밀이 항아리에 담아 옮기다가 운반하는 도중에 깨지기도 하였습니다.

세종 대 기준으로 꿀을 공물로 바치던 전국 군현은 모두 148개소로 경기도 4개소, 충청도 17개소, 경상도가 가장 많아 47개소, 전라도 31개소, 황해도 9개소, 강원도 18개소, 평안도 22개소 등입니다. 이런 지역에서 수집된 꿀은 외국이나 외국의 사신에게 보내는 선물, 왕실의 각전(各殿)에 진상하거나 상례(喪禮)나 수연(壽宴) 때 하사하는 물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486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조정에 남는 면포(綿布)와 유밀(油密)같은 물건을 거두어들여서 백성들에게 쌀로 바꾸게 하는 일이 백성들의 곤궁을 더욱 가중시키니 하지 말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중종실록 73권, 중종 27년 10월 6일 경진 기사 1532년 명 가정(嘉靖) 11년

영의정 정광필 등이 사직하니 전교하다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장순손, 우의정 한효원, 좌참찬 홍언필, 우참찬 손주 등이 아뢰기를,

"요즘 천변 때문에 이미 사면했는데, 또 지난밤에 번개와 뇌성이 여름철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시령(時令)이 어긋나니 매우 경악스럽고 두렵습니다. 신들이 지금 와서 아뢰려니 실로 아랫사람 대하기가 부끄럽습니다. 때문에 직에 있기가 미안하여 감히 사직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혜성과 겨울 우레가 잇따라 변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일에 반드시 불러들인 이유가 있을 것이니, 상하가 마땅히 경계하고 반성해야 한다. 어찌 꼭 정부의 관원을 모두 체직하여야 재변에 응하는 것이 되겠는가. 사면하지 말라."

하였다.

광필 등이 또 아뢰기를,

"들으니, 호조가 지금 국가의 비용(費用)이 부족하기 때문에 제사(諸司)에게 좀 남는 면포(綿布)와 유밀(油密)같은 물건을 거두어들여서 백성들에게 쌀로 바꾸게 하여 예빈시(禮賓寺)와 광흥창(廣興倉)에 올리게 하였는데, 그 수는 2만 석으로 내년 백관의 봉록(俸祿)에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들은 민간이 기근에 허덕이는 이때에 이런 것으로 하여 더욱 곤궁이 가중될까 두렵습니다. 자원하는 자가 있더라도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신들의 뜻은, 성종조 때는 흉년이 들면 봉록을 재감(裁減)하되 어떤 때는 1석을 감하고 어떤 때는 2석을 감하였습니다. 지금 종친(宗親)이 6백여 인이니 1석씩 감한다 해도 곧 6백여 석인데, 게다가 조사(朝士)로서 녹을 먹는 자가 매우 많으니, 이 사람들에게서 각각 1석씩만 감해도 1등 직에서 감한 것이 1천여 석이나 되고, 연하여 2∼3등 직을 재감한다면 나라에 남아도는 쌀이 2∼3천 석이 됩니다. 이것을 계산하여 실농(失農)된 각 고을의 전세(田稅)를 낮추고 수령에게 전세를 벼로 받아들이게 하여 종자로 지급하게도 하고 구황(救荒)하게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봉록을 감하자는 것은 야박하고 인색한 듯하나 이것은 부득이한 조처입니다. 호조에서 금방 이것으로 공사(公事)를 마련했으나 아직 계품하지 못하고 있는데, 호조에 하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였다.

"반정(反正)한 뒤로는 흉년이 들면 조관(朝官)의 봉록을 삭감하기를 의논하여 감하려고 하였다가도 감하지 못한 사례가 여러번 있었다. 호조로 하여금 봉록을 감한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게 하라."

【태백산사고본】 37책 73권 3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