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년전 오늘 - 축산 소식107] 조선 최초의 수입 외래 종 물소(水牛)는 어떻게 적응에 실패하였나?
[509년전 오늘 - 축산 소식107] 조선 최초의 수입 외래 종 물소(水牛)는 어떻게 적응에 실패하였나?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8.12.16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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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123호, 양력 : 12월 12일, 음력 : 11월 6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 왕조 실록에 물소(水牛)에 관한 기록은 60여건으로 주로 활의 원료로 쓰이는 물소뿔(水牛角)에 관한 내용이며 물소 뿔은 궁각(弓角), 흑각(黑角)이라고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물소를 가축으로 처음 활용 방안을 논의한 것은 세종(世宗)대로 당시 임금이 ‘물소(水牛)는 힘이 세고 밭가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중국에 주청(奏請)하여 바꿔 오고자 한다.’라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조선의 자연 조건이 중국 남쪽 지방과 같지 않아서 물소가 번성(蕃盛)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적고 있으며, 문종(文宗)대에는 중국 사신에게 활 제조를 위하여 물소(水牛) 암수(雌雄) 20두를 해도(海島)에 놓아기르고자 한다고 주청(奏請)하였으나 확보에 실패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물소는 세조(世祖) 대에 이르러 일본 유구국(琉球國 ; 오키나와 등지에 있던 왕국)에서 처음으로 2마리를 바치면서 사육되게 되었는데, 이듬해 이들 물소를 창덕궁 후원으로 옮겨 기르게 하면서 사복시(司僕寺) 관원은 물론 의생(醫生)으로 하여금 양우법(養牛法)을 초록(抄錄)하여 사양법을 익히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도입된 물소는 17년이 지난 성종(成宗)대에 70두까지 늘어나 잘 번식시키는 지방 수령(守令)은 직급을 올려주는 가자(加資)를 논의하기도 하였으나, 14년 후에 수원(水原)과 남양(南陽)에서 기르는 물소가 사람을 받아서 상해(傷害)를 입히자 아침저녁으로 특별히 훈련시켜 길들이게 하라는 하서(下書)를 내려 보내기에 이릅니다.

이후 연산군 대에는 물소가 밭갈이에 익숙하지 못하니 각 고을에서 농구(農具)를 갖추어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여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결국 중종(中宗)대에 이르러 나라에 이익이 없고 백성에게 해만 있으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는 건의가 잇따르자 외딴 해도(海島)로 추방을 하였다가 백성이 원하는 대로 주어 기르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 라는 논의를 끝으로 실록에서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509년전 오늘의 실록에 바로 이러한 물소를 민원(民願)에 따라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죽거나 잃어버리더라도 죄를 다스리지 말게 하라고 유시하고 있습니다.

 

■중종실록 10권, 중종 4년 11월 6일 갑자 기사 1509년 명 정덕(正德) 4년

물소를 백성의 청원에 따라 나누어 주게 하다

병조가 아뢰기를,

"김수동(金壽童) 등의 의논이, 물소(水牛)를 민원(民願)에 따라 제급(題給)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각 고을에서 나누어 기르는 물소를 백성의 청원에 따라 나누어 주어서 발을 갈게 하되, 혹 죽거나 잃어버리더라도 죄를 다스리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10권 3장

【주】 제급(題給) : 소장(訴狀)·원서(願書) 등에 대하여 처리하는 내용의 제사(題辭)를 써서 내어 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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