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년전 오늘 - 축산 소식111]재래 과하마(果下馬)를 개량시킨 최초의 외래마는 호마(胡馬)이었다
[534년전 오늘 - 축산 소식111]재래 과하마(果下馬)를 개량시킨 최초의 외래마는 호마(胡馬)이었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8.12.19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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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127호, 양력 : 12월 18일, 음력 : 11월 12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말(馬)은 삼국시대 이래 생태적으로 ‘키가 3척(90.9cm)정도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고서도 능히 과실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다’는 데서 유래된 과하마(果下馬)와 같은 작은 말이 주종으로, 이 말 들은 북마(北馬)로도 불리며 많은 짐을 지고 멀리 갈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북방민족과의 교역에서 주요한 품목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임금이 타는 어승마(御乘馬)나 군사용 전마(戰馬)로는 한계가 있어 일찍부터 중국과 여진족과 같은 야인(野人)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우수한 품종의 말들을 도입하여 활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중에 대표적인 품종(品種)이 키가 크고 날렵하게 생긴 것으로 알려진 호마(胡馬)를 활용한 것으로, 왕조실록에 호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태종(太宗) 대에 중국 황제가 내려 준 호마(胡馬) 1필에 대한 기사로 당시 임금은 이를 바친 사신에게 구마(廐馬) 1필과 저화(楮貨) 3백 장을 내려 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세종대에는 함길도는 본디 호마(胡馬)가 생산되는 땅으로 태조께서 타시던 팔준마(八駿馬)도 거기서 났고, 그 뒤에 밤색 말(栗色馬)과 옥비흑마(玉鼻黑馬)도 몸이 크고 건장하여 임금이 직접 탔었는데, 민간에서 매매하는 야인의 말이나 그곳에서 생산한 말 가운데 값을 넉넉하게 주고 피마(牝馬), 상마(牡馬) 열 필을 보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호마가 이미 조선에 유입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러한 호마는 세조(世祖)대에 이미 경기 강화(江革)의 장봉도 목장(長峯島牧場)에서 본격적으로 방목(放牧)되어 번식(蕃息)을 시켜, 건장한 아마(兒馬)와 수말(雄馬)이 총 46필(匹)에 달하였으며, 이중에 5세(歲) 이하의 양마(良馬) 10필을 가려내어 한양으로 보내고 털 빛깔과 치아를 뜻하는 모치(毛齒)를 사복시(司僕寺)에 보내 마적(馬籍)에 등록하여 관리하게도 하였습니다.

이같이 호마의 수요가 늘자 호인(胡人)들은 조선의 마소(牛馬) 7-8두(頭)를 주어야 호마 1필을 바꾸어 주는 횡포를 부려 조정에서는 단속을 엄하게 하기도 하였으나, 이후에 만주에서 말의 번식이 극성해지면서 북방의 말과 조선의 소가 교환되는 우마교역(牛馬交易)의 형태로 안정을 이루었습니다.

534년전 오늘의 기사에는 야인(野人)들이 기근(飢饉)으로 인하여 호마를 가지고 곡식과 바꾸기를 청하는데 이를 허락할 것인지를 논의를 하며 호마는 길들이기가 좋으니 많이 사면 쓰기에 유익할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성종실록 172권, 성종 15년 11월 12일 을미 기사 1484년 명 성화(成化) 20년

야인이 흉년을 당해 말을 팔아 곡식을 사려는 것의 득실을 대신들과 의논하다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정난종(鄭蘭宗)이 치계(馳啓)하기를,

"야인(野人)들이 기근(飢饉)으로 인하여 만포(滿浦)에 나와서 그 말[馬]을 가지고 곡식과 바꾸기를 청하는데, 절제사(節制使) 이섬(李暹)이, ‘흉년이므로 곡식을 팔아서 말을 사는 자가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병조(兵曹)에서 이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변장(邊將)의 응답(應答)이 마땅함을 잃지 아니하였으니, 뒤에 만약 이같은 일이 있거든, 또한 이로써 답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명하여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한명회(韓明澮)·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평안도 한 도(道)는 목장(牧場)이 많지 아니하여 민간에 말이 적으므로, 국가에서 이따금 하삼도(下三道) 목장의 말을 들여보내어 군호(軍戶)에 나누어 주었으나, 얻는 자가 10분(分)의 1일 뿐입니다. 야인으로 말을 파는 자가 있으면 백성들에게 무역(貿易)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다만 민간에 베[布]를 가진 자가 많지 아니하니, 관포(官布)로 매매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노사신(盧思愼)은 의논하기를, "아뢴 바에 의하는 것이 편합니다. 다만 군국(軍國)의 용품은 말이 가장 긴요한 것인데, 저들이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말을 팔아 흉년을 구제하려고 하니, 그 값이 몹시 비싸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군인이 사고자 하는 것을 들어주면 우리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광릉(廣陵)과 선성(宣城)의 의논이 옳다. 호마(胡馬)는 길들이기가 좋으니, 많이 사면 쓰기에 유익할 것이다. 그 적당한지의 여부를 의논해 아뢰라." 하니, 승지(承旨)들이 아뢰기를, "말[馬]이라는 것은 군국(軍國)의 수요에 지극히 긴요한 것이므로, 매매하기를 허락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하였다.

병조(兵曹)에 전교하기를, "호마(胡馬)를 수매(收買)하는 일은 광릉(廣陵)의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니, 판서(判書) 손순효(孫舜孝)가 와서 아뢰기를,

"말을 매수(買收)하는 일을 신은 적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절도사가 계달한 본의는 야인이 기근으로 인하여 마필(馬匹)로써 곡식을 바꾸고자 하는 것을 이르는 것인데, 의논하는 이는 관포(官布)로써 말을 사고자 하며, 본도(本道)에 관포가 있고 없음을 알 수도 없습니다. 만약 민간의 미곡(米穀)을 만포(滿浦)에 운반하여 말을 사게 하면 또한 운반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또 야인이 매매(賣買)로 인하여 오래 변경에 머물면 역시 지대(支待)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나는 이 일에 폐단이 없다고 생각한다. 말이 쓸 만한가의 여부와 만포에 곡식이 있고 없는 것을 보아서 살 만하면 사는 것인데, 무슨 폐단이 있겠는가? 민간에서 매매하는 것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하는 것인데, 또한 어찌 해로움이 있겠는가? 오래 머물러 지대(支待)하는 폐단은 변장(邊將)이 적당하게 처리하는 데 있으니, 또한 반드시 폐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6책 172권 4장

【주】광릉(廣陵) : 이극배(李克培).  

     선성(宣城) : 노사신(盧思愼).

     호마(胡馬) : 만주나 중국 북방에서 나던 말. 

    본도(本道) : 평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