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년전 오늘 - 축산 소식114] 읍(邑)과 역(驛)에 배치된 화물수레는 소(牛) 2필이 끄는 대차(大車)이었다
[587년전 오늘 - 축산 소식114] 읍(邑)과 역(驛)에 배치된 화물수레는 소(牛) 2필이 끄는 대차(大車)이었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8.12.2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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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130호, 양력 : 12월 21일, 음력 : 11월 15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국가적인 주요 토목(土木)과 영선(營繕)을 담당하던 관서는 공조(工曹) 산하의 선공감(繕工監)으로, 건축물의 조성과 영선은 물론 왕실에 필요한 관곽(棺槨)의 제작, 조정의 각 기관에 필요한 땔감 연료인 시탄(柴炭) 등을 조달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전국에 설치된 역(驛)의 잡물을 수송하는 일과 이에 필요한 수레를 제작하여 공급하는 일도 맡아서 처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선공감에 소속되어 전문적으로 수레 제작과 보수, 개조 등을 맡던 장인(匠人)을 거장(車匠)이라 하였으며, 이들은 경공장(京工匠)으로 선공감(繕工監)에만 10여명이 근무하면서, 사(紗), 나(羅), 능(綾), 단(段) 등 각종 비단과 포목, 그리고 왕실에서 소비하는 가죽, 포화(布貨)를 주관하는 관청인 제용감(濟用監)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면포(緜布)와 정포(正布) 등을 월급으로 지급 받았습니다.

조선의 각종 제도와 법률을 망라한 경국대전에 따르면, 지금의 군사 조직 편제 중 대대(大隊)와 비슷한 규모의 부대 단위인 모든 사(司)와 지방의 조직인 읍(邑), 역(驛)에는 각종 수레를 배치하여 물자 수송을 원활하게 하도록 정해져 있는데, 손으로 끄는 작은 수레인 편차(便車)에서, 앞에는 작은 바퀴를 달고 뒤에는 큰 바퀴를 달아서 쉽게 방향을 돌릴 수 있게 만든 수레인 곡차(曲車), 중앙의 대(臺) 위에 짐을 얹고 두 사람이 앞뒤에서 메게 하여 주로 귀중품을 운반하는데 쓰는 강주(杠輈)를 함께 배치해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수레 외에 보통 짐수레보다 커서 대형 화물을 운반하는데 쓰인 수레를 대차(大車)라 하였는데, 이 대차는 반드시 소 두 필(匹)이 끌도록 하여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거장들은 이러한 수레 외에도 두 개의 큰 바퀴를 달고 몸체는 나무로 짜되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워 삼면을 가리고 뒤쪽만 트이게 만든 전쟁에서 사용하는 수레로 병거(兵車)인 융로(戎輅), 건축 현장에서 도르래를 설치하여 석재와 같은 무거운 건축 재료를 들어 올리는 데 사용되었던 녹로거(轆轤車),

임금이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례(親耕禮)를 행하기 위해 동적전(東籍田)에 행차시 여러 농기구를 싣고 나르는 데 사용하던 수레인 경근거(耕根車)의 제작에도 관여하였으며, 특히 국장 때에 상여를 메는 군사인 담배군들이 궁궐 밖에서 영악전까지 임금의 옥체를 싣고 운구할 때 쓰이는 수레인 유거(柳車)를 비롯한 각종 수레들도 이들을 통해서 제작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587년전 오늘의 기사에는 수레는 구르는 물건이므로 지방 역참(驛站)에서는 쓰이지마는 혹시 산이 높아서 통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소와 말로 운반하는 것이 폐해가 없게 될 것이라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 11월 15일 병자 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평안도·황해도 각 참의 수레와 소에 대한 일을 의논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지금 평안도·황해도의 각 참의 수레와 소에 대한 일을 정부와 여러 관청에 의논하니, 황희(黃喜) 등은 ‘옳습니다. ’고 말하고, 맹사성 등은, ‘수레는 구르는 물건이므로 황해도 7참에서는 되지마는, 혹시 산이 높아서 통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소와 말로 운반하는 것이 폐해가 없게 될 것이니, 그 편리하고 편리하지 않은 것은 두 도에 물어 본 후에 다시 의논할 것입니다. ’고 말하고, 이맹균 등은, ‘수레로 싣는 일은 이미 그전에 시험했는데, 오래되면 계속될 수가 없으니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맹사성 등의 의논을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7책 54권 26장

【주】두 도 : 평안도(平安道) 황해도(黃海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