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년전 오늘 - 축산 소식116]엄격한 소 도살(屠殺) 금지 정책에도 사대부 집의 수색을 꺼린 성종(成宗)
[534년전 오늘 - 축산 소식116]엄격한 소 도살(屠殺) 금지 정책에도 사대부 집의 수색을 꺼린 성종(成宗)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8.12.26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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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132호, 양력 : 12월 26일, 음력 : 11월 20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소의 도살은 국가 경제의 가장 주요한 기반인 농업 생산과 직결되는 사안으로 유일한 축력(畜力)인 소가 부족해지면, 논, 밭의 그루갈이를 깊게 하지 못하여 농업생산성이 떨어지고, 소출이 줄면서 농민들의 이탈이 증가하며, 세수(稅收)를 어렵게 하고 사회 불안정이 야기되어, 조정에서는 소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한 소 도살(屠殺) 금지 정책을 최우선 시책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조선 초기 임금대별 소 도살에 대한 주요 금지 대책으로는 이미 태조(太祖)대에 즉위 교서로 사사로이 소와 말을 도살하는 것은 마땅히 금령(禁令)이 되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뒤이은 정종(定宗)대에도 사사로이 도살하는 것은 관사(官司)에서 엄하게 다스리라는 하교(下敎)가 있었습니다.

태종(太宗) 대에는 북방 유민 후손들인 달단(韃靼) 화척(禾尺)에게 소와 말을 잡는 것을 금하도록 하였고, 소(牛)의 도살(屠殺)이 심하니, 이를 붙잡아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그 범인의 가산(家産)을 상(賞)으로 충당하고, 쇠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기면 논죄(論罪)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종(世宗)대에는 그 처벌이 더욱 강화되어 소나 말을 매매하여 도살한 자는 장(杖) 1백에 처하고, 가산은 관에서 몰수하며, 몸은 수군(水軍)에 보충시키고, 소와 말을 도적질하여 도살한 자는 같은 형벌에 몸에 자자(刺字)까지 하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우마(牛馬)가 저절로 죽은 것도 한성부에서 검사하여 낙인(烙印)하고, 외방에서는 그 고을에서 검사한 공문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그 매매를 허락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제주도에서 평안도로 옮길 우마(牛馬)를 도살(盜殺)한 자를 대대적으로 단속하여 연루된 6백 50명에 대해 죄명을 명기하여 계달하게도 하였고,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경기도 백성들 중에 논밭을 가는 데에 소를 사용하는 자가 열에 한둘도 못되어 깊게 갈 수가 없게 되자,

처음으로 소나 말을 도둑질하여 죽인 자는 결장(決杖) 1백에 오른팔에 ‘도살우(盜殺牛)’나, ‘도살마(盜殺馬)’라는 세 글자를 자자(刺字)하고 동거하는 처자와 함께 섬으로 쫓아내고, 재범(再犯)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하게 하되 수범(首犯)이나 종범(從犯)을 구별하지 않고 시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조(世祖)대에는 소를 잡는 것을 고발한 자는 그 재산(財産)으로 상(賞)을 주되, 벼슬 받기를 자원(自願)하는 자는 3자급(資級)을 뛰어 주고, 잡은 자를 용납하여 머물게 한 집은 관(官)에서 몰수하되, 양반(兩班)이면 영구히 서용(敍用)하지 말고 상인(常人)이면 온 집안을 변방으로 옮기도록 하고, 이웃집이나 정상을 알고도 고기를 먹은 자는 각각 장(杖) 1백 대씩 때리도록 하였습니다.

534년전 오늘의 기사에는 성종(成宗) 임금이 형조(刑曹)에서 불법으로 소를 잡는 자들이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행랑(行廊)에서 많이 나와 의심스러운 곳이 있으면 사대부 집이라도 수색하여야 한다는 보고에, 사대부의 집을 수색하면 대우하는 체면이 없으니 수색하지 말고 소문이 확실하면 계문(啓聞)하여 추고(推考)하겠다고 전지(傳旨)하고 있습니다.

 

■성종실록 172권, 성종 15년 11월 20일 계묘 기사 1484년 명 성화(成化) 20년

형조에서 불법으로 소를 잡는 사대부 하인들의 체포를 위해 집 수색을 청하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어세겸(魚世謙) 등이 와서 아뢰기를,

"지난번 간악(奸惡)한 자를 적발하여 들일 때에 범금자(犯禁者)가 많았던 것은 진실로 신 등이 검찰(檢察)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소를 잡은 자를 체포하였는데, 사대부(士大夫) 집안의 행랑(行廊)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사대부 집은 내사(內使)가 아니면 수색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청컨대 이제부터는 비록 사대부의 집안일지라도 의심스러운 곳이 있으면 수색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행랑은 종이 거처하는 곳이므로 그들의 하는 바를 주인이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며, 종이 범한 것으로 그 주인을 아울러 처벌할 수 없으니, 사대부 집안을 수색하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경(卿) 등은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어세겸 등이 아뢰기를,

"만일 의심스러운 곳이 있을 때 아뢴 뒤에 수색하면 일이 모두 누설되어 적발하기 어렵습니다. 무릇 사대부 집 행랑은 내실(內室)과 막혔으니, 수색하더라도 무엇이 방해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을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의정부(議政府)·육조 판서(六曹判書)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은 의논하기를,

"만약 드러난 자취가 있으면 비록 조사(朝士)나 재상(宰相)의 집 행랑이라 하더라도 수색하는 것이 가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아마도 대체(大體)에 손상될 듯합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의논하기를,

"재인(才人)과 백정(白丁)은 소를 잡는 것으로 직업을 삼아, 서울 안에 와서 있는 자가 많은데, 조사(朝士)가 만약 허접(許接)하여 그 하는 바를 함부로 하게 하면 진실로 중하게 논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니 부녀(婦女)가 있는 곳 외에는 수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대저 집을 수색하는 것은 큰 일을 당하여 부득이해서 하는 것입니다. 드러난 자취가 없는데 수색하기를 허락하면 아마도 분요(紛擾)를 일으킬 것이니, 반드시 드러난 자취가 있기를 기다려서 수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의논하기를,

"종재(宗宰)와 조사(朝士)의 집을 일체 수색하면 대체에 방해가 될 듯하나 법을 범하는 집이 때로는 더러 있으니, 이 폐단을 구제(救濟)하려고 하면 이처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홍응(洪應)은 의논하기를,

"사대부의 집을 수색하는 것은, 신의 생각으로는 뒤에 장차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원한을 가진 자가 말하기를, ‘아무개의 집에 도둑의 장물(贓物)이 있다.’고 하여 어지럽게 와서 고하면 해당 관사(官司)에서는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논하지 아니하고 마구잡이로 들어와서 수색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하가 허둥지둥하여 자못 재물을 잃을 것이니, 수색할 수 없습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형조(刑曹)에서 계달한 바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

"다만 마땅히 소를 잡은 자를 추쇄(推刷)하여 조치할 뿐인데 재상과 조사(朝士)의 집을 어찌 수색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의심스러운 곳이 있으면 전례(前例)에 의해서 계달하고 수색하여 잡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형조에서 아뢴 것은 비록 한때 개운하겠으나 아마도 사체(事體)에 손상될 듯합니다."

하고, 서거정(徐居正)은 의논하기를,

"지금 조사(朝士)로서 행실을 삼가지 아니하는 자와 의관 자제(衣冠子弟)의 무뢰자(無賴者)가 과부로 집을 주관하는 이가 없는 자와 소를 잡는 사람과 서로 안팎이 되어 법을 범하는 자가 자주 있으니, 이는 마땅히 크게 징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수색하는 데 있어서 다만 양반이라고만 일컫고 절목(節目)을 세분(細分)하지 아니하였으니, 신은 그윽이 의심스럽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소소하고 계급이 낮은 조사(朝士)·유음 자제(有蔭子弟)·군사(軍士)·과부(寡婦)의 집은 비록 양반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국가에서 존경하는 자가 아니니, 형조에서 아뢴 바대로 수색하여 체포하는 것도 해로움이 없을 듯합니다. 종재(宗宰)나 대부(大夫)의 집은 갑자기 수색할 수는 없지마는, 범한 것이 있으면 엄하게 징계를 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비록 양반의 집이라 하더라도 범금(犯禁)하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형적이 없는데 갑자기 수색하게 하면 국가에서 사인(士人)을 대우하는 체면이 아닙니다. 만약 사련자(辭連者)가 있으면 형조(刑曹)에서 아뢴 바에 의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어세공(魚世恭)은 의논하기를,

"양반의 집은 모두 사족(士族)이므로 비록 행랑(行廊)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한 집안의 안인데, 만약 관차(官差)가 사연이 없이 뛰어들어와서 수색하면 사족(士族)을 대우하는 체통에 어긋남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실이 없는데도 수색을 당하면 남이 보고 듣는 데에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니, 옳지 못할 듯합니다. 만약 드러나게 의심스러울 만한 원인이 있거나 또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지적하여 고한 것이라면 수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이제 소를 잡는 것으로 직업을 삼는 자가 외방에서는 발을 붙이지 못하여 모두 도성(都城) 안에 들어와서 불의(不義)한 집에 기탁하고 있거나, 혹은 빈집에 머물면서 방자하게 행하고 꺼림이 없으니, 청컨대 도둑을 잡는 영(令)을 더욱 엄하게 하고, 또 포도장(捕盜將)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잡게 하면 거의 막을 수 있습니다."

하고, 권찬(權攢)은 의논하기를,

"소와 말을 잡는 것을 금하는 것은 법을 세운 것이 엄한데, 도살[宰殺]하는 것이 어찌 도리를 아는 양반의 소위이겠습니까? 만약 양반의 집에서 사실을 알고 금하는 법을 범하였으면 ‘사범 재살법(四犯宰殺法)’으로 논단(論斷)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도리를 아는 조사(朝士)는 결단코 이같은 일은 하지 아니할 것이므로 비록 행랑 안이라 하더라도 수색해서 체포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며, 이숭원(李崇元)은 의논하기를,

"사대부(士大夫)의 집에서 누가 도살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만약 사대부의 집을 수색한다면 대체(大體)에 손상될 듯합니다. 다만 도둑이나 도살로 직업을 삼는 자가 혹시 빈집에 와서 살고 있으면 아울러 수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임금이 사대부를 대우하기를 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내가 비록 〈사리에〉 어두우나 어찌 소를 중히 여기고 사대부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있겠는가? 다만 해조(該曹)의 품(稟)한 바를 가지고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채택하려는 것일 뿐이다. 과연 여러 사람의 말과 같이, 차라리 많은 소를 잃을지언정 사대부를 대우하는 예(禮)는 잃을 수 없으니, 수색해 잡는 일은 결단코 시행할 수 없다."

하고, 인하여

형조(刑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간사함을 막는 데에는 엄격한 법령만한 것이 없고 사대부를 대우하는 데에는 융성한 예(禮)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 소와 말을 도살하는 자가 형법(刑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利)만 추구하니, 이같은 백성은 종자(種子)를 바꿀 수 없으므로 앞의 수교(受敎)에 의하여 듣는 대로 잡아서 즉시 논단(論斷)하여 먼 지방으로 내칠 것이다. 수색할 때에 사대부의 집을 아울러 수색하면 자못 사대부를 대우하는 체면이 없으니, 아울러서 수색하지 말라. 만일 소문이 확실함이 있으면 마땅히 권세를 피하지 말고 계문(啓聞)하여 추고(推考)하여서, 내가 도둑을 없애고 신하를 대우하는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6책 172권 7장

【주】종재(宗宰) : 종친과 재상.

     사련자(辭連者) : 공사(供辭)에 관련된 사람.

     관차(官差) : 관에서 보낸 사람.

     해조(該曹) : 형조(刑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