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3년전 오늘 - 축산 소식118]망아지와 닥나무로 만든 저화(楮貨)를 바꾼 지방 수령(守領)이 면직되었다
[593년전 오늘 - 축산 소식118]망아지와 닥나무로 만든 저화(楮貨)를 바꾼 지방 수령(守領)이 면직되었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8.12.2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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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134호, 양력 : 12월 28일, 음력 : 11월 22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초기 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만든 종이(楮紙)로 만들어 발행한 명목 화페를 저화(楮貨)라 하였는데, 이 저화의 발행은 고려의 주요 정치 세력인 권문세가(權門勢家)의 금, , 포화(布貨)를 거둬들이고 저화로 바꿈으로서 새로운 왕조의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행 당시 저화 한 장의 가치는 품질이 중간 정도 등급의 베()인 상오승포(常五升布) 한 필 혹은 쌀 2두로 책정하여 유통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아, 저화를 절반씩 사용하도록 하는 저화통행법(楮貨通行法)을 시행하고 저화 수납을 거부하는 경우 법으로 처리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면포와 쌀과 같은 현물화폐만 사용하자 오승포(五升布)를 쓰지 못하게 금지하기도 하고, 금지 책을 어길 때에는 직첩이 없는 무직자(無職者)는 가산(家産)을 몰수하고 유직자는 직첩을 거두고 법률에 따라 장형에 처하는 처벌 규정도 마련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세금으로 내는 모든 포를 저화로 전환시켜 납부하도록 하기도 하고, 저화로 관리들의 녹봉을 나누어주기도 하였으며, 저화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3일 동안 거리에 세워 여러 사람에게 보이고, () 100대를 때리거나, 저화 30()을 징수하게 하여 유통을 독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화의 유통은 자리를 잡지 못하여 세종(世宗) 대에는 저화 한 장의 가치가 쌀 3되에서 쌀 1되로 점점 하락하였으며, 성종(成宗)대 이후에는 저화 통용의 법을 세웠으나 지켜지지 않아 심지어 지방에서는 저화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의논이 있은 후로 거의 교환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593년전 오늘의 기사에는 지방 수령(守領)이 말을 확보하기 위해 관고(官庫)의 소금과 각궁(角弓)을 내주고, 목장(牧場)의 병든 망아지와 바꾸기 위해 관()의 저화(楮貨) 5(5, 현시세 12만원 추정)을 쓴 것을 논죄하여 서용(敍用)하지 말고 장물(臟物)은 도로 징수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1월 22일 정사 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관고 물품을 유용한 전 지장연현사 이거현을 서용 않고 장물을 징수하게 하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전 지장연현사(知長淵縣事) 이거현(李巨賢)은 임지에 있을 때에 관고(官庫)의 소금 2 말[斗], 각궁(角弓) 한 개, 녹피(鹿皮) 한 벌로 내관(內官) 이득주(李得周)의 말[馬]과 바꿨으며, 또 관(官)의 저화(楮貨) 5장으로 목장(牧場)의 병든 망아지와 바꿨으나, 죄를 범한 것이 사령(赦令) 전에 있었습니다. 청하옵건대 하교(下敎)에 의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시고 장물(臟物)은 도로 징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0책 30권 1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