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5년전 오늘 - 축산 소식122]재래마를 타고 하던 경기인 격구(擊毬)에는 임금도 돈을 걸었다.
[605년전 오늘 - 축산 소식122]재래마를 타고 하던 경기인 격구(擊毬)에는 임금도 돈을 걸었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1.04 11: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 19-138호, 양력 : 1월 4일, 음력 : 11월 29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초기 대표적인 왕실 스포츠인 격구(擊毬)를 가장 많이 즐긴 임금은 태종(太宗)으로 재위(在位) 18년 동안 공식 기록으로 30여 차례이상 경기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주로 종친(宗親)들과 함께 창덕궁(昌德宮)내 군신(君臣)들이 모여 연회하던 누각인 광연루(廣延樓) 아래나 서대문에 지어져 정종(定宗)이 죽을 때까지 살았던 인덕궁(仁德宮)에 나가 격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격구는 말을 타고 숟가락 모양의 채 막대기인 장시(杖匙)로 공을 구문(毬門)에 치거나 떠 넣는 경기로, 경기를 위해서는 격구관복(擊毬冠服)이라 하여 별도의 복식(服飾)을 갖추고 참여하였는데, 모자는 검은색 말갈기로 만든 갓으로 모정(帽頂)이 평평하고 첨(尖)이 있는 종립(鬃笠)에 물총새의 깃털인 취우(翠羽)와 호랑이 수염인 호수(虎鬚)를 모자의 양쪽에 꽂아 세웠으며, 옷은 옷깃이 곧은 직령(直領) 형태의 홍색 철릭(帖裏)을 입고 허리에 두루는 과두(裹肚)를 갖추고 광조대(廣組帶)를 매고 팔에는 소매 끝을 쪼여 매는 사구(射韝)를 착용하였습니다.

격구할 때 쓰는 공(毬)은 나무로 깎아 붉은색을 칠하였는데, 이를 주칠목환(朱漆木丸)이라고도 하였으며, 공의 둘레는 1척 3촌이었습니다. 격구의 채인 장시(杖匙)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공을 치는 부분은 숟가락처럼 생겨 시부(匙部)라 하여 코뚜레처럼 나무를 둥글게 구부려 묶어 공을 뜰 수 있게 만들고 길이와 넓이가 각각 9촌이었으며, 자루 부분은 길이가 3척 5촌으로 다섯 가지 색깔을 칠하였습니다.

격구를 하는 격구장은 구장(毬場)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시대에는 개경에 수십 채의 민가를 헐어 별도의 구장(毬場) 마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에서는 궁궐 내 격구장외에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이나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의 훈련 등을 하던 훈련원(訓鍊院)이 많이 이용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격구에 가장 중요한 말은 키가 3척(90.9cm)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지구력이 강한 재래마인 과하마(果下馬)를 주로 활용하였고, 말의 안장(鞍裝)은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워 중인(中人)의 집 열 채 가격에 맞먹을 정도였으며, 특히 태종(太宗)대에는 격구를 하는 말에 돈을 걸어 내기를 하는 도마희(賭馬戲)에는 임금도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605년전 오늘의 기사에는 임금이 광연루(廣延樓) 아래에 나아가서 종친(宗親)을 모아서 격구(擊毬)를 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태종실록 28권, 태종 14년 11월 29일 무진 기사 1414년 명 영락(永樂) 12년

광연루에서 종친들과 격구하다

광연루(廣延樓) 아래에 나아가서 종친(宗親)을 모아서 격구(擊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28권 42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