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8년전 오늘 - 축산 소식127] 중국에서 요구한 농우(農牛) 1만두 교역을 6천두로 경감한 세종(世宗)
[588년전 오늘 - 축산 소식127] 중국에서 요구한 농우(農牛) 1만두 교역을 6천두로 경감한 세종(世宗)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1.1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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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143호, 양력 : 1월 11일, 음력 : 12월 6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중국과의 외교관계에서 각종 교역(交易)과 사행무역(使行貿易)은 물론 외교문서를 주고 받는 최일선 접경지(接境地)는 명(明)나라가 중국 요동(遼東) 지역에 설치한 요동도사(遼東都司)였습니다.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설치된 요동도사는 군정(軍政) 합일기관으로 명나라 1대 황제인 주원장(朱元璋) 때인 홍무(洪武) 연간의 요동 경략에서부터, 제3대 황제인 주체(朱棣) 때인 영락(永樂) 연간의 몽골(蒙古)과 여진족에 대한 회유, 조선과의 국경 문제 및 불법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범월(犯越), 밀교역 등 다양한 문제를 협의하는 창구로 활용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중국으로 사신이 갈 때 정기, 비정기 사행(使行)을 막론하고 진헌물(進獻物)을 준비하였는데, 중요 진헌물로는 초기에 금(金), 은(銀)을 포함하여 돗자리, 인삼, 가죽, 모시, 삼베, 명주와 같은 직물외에 마필(馬匹)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으며, 세종(世宗)대에는 중국에서 교역을 핑계삼아 요동 주둔군(遼東駐屯軍)에 밭을 가는 경우(耕牛) 1만두를 요청하여 조정을 곤혹스럽게 하였습니다.

세종(世宗)은 이 같은 요구가 있자 대신(大臣)들과 소가 숫놈은 적고 암놈이 많은데 장차 자웅(雌雄)을 반반으로 갖추어서 할 것인가 아니면 암소를 많이 갖추어서 교환할 것인가를 논의 하기도 하였고, 조선에는 소가 본래 많지도 않은데 백성들이 실농하여 쓸 만한 농우(農牛)가 더욱 적어, 이 같은 요구대로 하면 민간에는 농우는 남김이 없게 되어 염려가 된다며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직접 중국 사신을 만나, 근년에 수재(水災), 한재(旱災)로 인하여 백성들이 소를 기를 만한 자력(資力)이 없어, 농우(農牛)가 있는 사람이 열 집에 한 집이 될 정도이며, 그 있는 집도 한 마리에 지나지 않다고 중국 황제에게 주청(奏請)해 줄 것을 설득하여, 교역 두수를 1만두에서 6천두로 감면(減免)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588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중국 사신이 조선은 작은 나라이므로 사냥용 매인 해청(海靑)과 야생 시라소니인 토표(土豹)를 잡는 일로도 번거로운데, 소까지 교환하기는 적당하지 못하다는 의견에 동의를 구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세종실록 54권, 세종 13년 12월 6일 정유 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윤봉이 소 교환의 어려움을 창성에게 말하다

안숭선이 아뢰기를,

"윤봉이 노한에게 말하기를, ‘황제께서 소와 말을 각각 1만 필을 교환하고자 하니, 한림원(翰林院)에서 아뢰기를, 「조선은 작은 나라이므로 지금 해청과 토표를 잡는 일로도 번거로운데, 소까지 교환하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고 하여서, 황제가 이 말을 따라서 칙서를 내리지 않았는데, 내가 돌아가서 소가 생산되지 않는 이유를 자세히 아뢰겠지마는, 창 대인(昌大人)에게도 힘써 말하는 것이 매우 옳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7책 54권 32장

【주】 윤봉(尹鳳) : 중국 명나라 선덕제(宣德帝)의 사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