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년전 오늘 - 축산 소식129] 하루 쌀, 콩 3말씩을 먹으며 사람을 해치다 섬에서 죽은 일본 코끼리
[607년전 오늘 - 축산 소식129] 하루 쌀, 콩 3말씩을 먹으며 사람을 해치다 섬에서 죽은 일본 코끼리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1.1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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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145호, 양력 : 1월 15일, 음력 : 12월 10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일본 및 오키나와 섬을 중심으로 한 유구(琉球), 여진(女眞)에 대한 외교정책을 교린(交隣)이라 하였는데, 교린의 외교 의례적 개념은 ‘적국항례(敵國抗禮)’로서 필적하는 나라끼리 대등한 의례를 나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초기 임금은 일본 국왕인 실정막부(室町幕府) 장군과 유구국왕(琉球國王)과 적례교린(敵禮交隣)을 맺었으며, 교린의 예(禮)에 따라 상대국의 길흉사에 사절(慶弔使)이 왕래하고, 재화나 무역을 허용하되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배척하는 형태로 교류가 이루어 졌습니다.

이러한 외교관계에 따라 일본과는 다양한 예물(禮物)을 주고받았는데 일본에서는 호초(胡椒), 명반(明礬), 단목(丹木), 대화(大和)진주, 문지(紋紙)등 주로 토산물(土産物)과 말, 원숭이, 물소, 공작새 등 다양한 동물을 보내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태종(太宗)대에는 일본국왕이 당시 조선에는 없던 코끼리를 바치자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하였는데, 날마다 콩 4·5두(斗)씩을 먹어 치우며 사람까지 죽고 다치게 하자 나라에 이익이 없다며 전라도 바닷가 섬(海島)에서 기르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코끼리는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장도(獐島)에 방목(放牧)된 후에는 수초(水草)를 먹지 않고 날로 수척(瘦瘠)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보고되자 임금이 불쌍히 여겨 다시 육지로 보내 기르도록 하였는데, 세종(世宗)대에는 이 코끼리를 관리하던 전라도 관찰사가 도내(道內) 네 곳의 지방관에게 명하여 돌려가면서 먹여 기르고 있으나 폐해가 적지 않고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는다고 계(啓)하자, 충청(忠淸)도는 물론 경상도까지 돌아가면서 기르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애를 먹인 코끼리는 조선에 온지 10년 되는 해에 공주(公州)에서 코끼리를 기르던 종이 발에 차여 죽게 되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이 나 되는 하루에 쌀 2말, 콩 1말씩을 소비하면서 사람을 해치기나 하자, 당시 관리를 맡은 충청도 관찰사가 다시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으로 보내자고 보고하니, 임금은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내어놓아 병들어 죽지는 말게 하라는 선지(宣旨)가 있은 후 실록에는 더 이상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607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길들인 코끼리(馴象)를 받쳤는데 정 3품 관직인 공조전서(工曹典書)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보다가, 그 꼴이 추함을 비웃으며 침을 뱉었는데, 노한 코끼리한테 밟혀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12월 10일 신유 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전 공조 전서 이우가 코끼리에 밟혀 죽다

전 공조 전서(工曹典書) 이우(李瑀)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순상(馴象)을 바치므로 3군부(三軍府)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보고, 그 꼴이 추함을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

【태백산사고본】 10책 24권 30장

【주】순상(馴象) : 길들인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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