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140] 사복시(司僕寺)에 기르는 마필(馬匹)의 풀 사료로 하루에 5천단이 필요하였다
[56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140] 사복시(司僕寺)에 기르는 마필(馬匹)의 풀 사료로 하루에 5천단이 필요하였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1.30 10: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19-156호, 양력 : 1월 30일, 음력 : 12월 25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마필을 생산하고 관리하는 일을 총괄하고 전국에 목장(牧場)을 관리하며, 왕실에 사용하는 수레와 말을 관리하는 병조(兵曹) 예하의 정 3품 관청을 사복시(司僕寺)라 하였습니다.

이 사복시에서 관리하는 말들에게 급여하는 말먹이는 마료(馬料)라 하여 급여하는 사료의 종류와 양을 규정해 놓고 사육하였는데, 말의 주된 사료인 풀의 성장기에 따라 1년을 청초절(靑草節)인 5월~9월과 황초절(黃草節)인 10월~4월로 구분하여 각각 달리 지급하도록 하였으며, 특히 풀 사료인 경우 실록에는 말꼴(馬芻), 마른꼴(芻茭), 꼴(蒭), 생추(生芻), 꼴짚芻藁) 등 다양한 표현으로 기록되어 각 목장에 설치된 마초장(馬草場)이나 일반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여 활용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문종(文宗) 대의 기록에 따르면 사복시에서 기르는 마필(馬匹) 수는 항상 5백여 필에 달하여, 한 필이 하루에 먹는 꼴(芻)의 양이 10여 속(束, 단)으로 전체적으로는 하루에 5천단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이 같은 생꼴(生芻)을 벨 때가 바로 농사철에 당하여 농부는 하루도 편할 수 없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특히 경기(京畿)인 경우 여름에 생꼴을 나르는 수고가 심히 괴롭고, 사복시에서 숙직(宿直)하는 한 사람이 혼자서 수납하기 때문에, 아전이 이로 인하여 농간을 부리고 시일을 끌어서 농사를 방해하고 백성을 병들게 하여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이제부터 사복시의 겨울·여름에 기르는 말의 수를 일정 두수로 정하여 백성들의 폐해를 덜게 하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또한 평안도(平安道) 연변(沿邊)의 각진(各鎭)과 작은 관방(關防)의 거민들은 동절(冬節)에 거주지를 옮기는 입보(入保)를 하게 되는데, 미리 마른 꼴(芻)을 준비하지 않기 때문에 풀이 마르고 눈이 깊게 쌓이면 말을 먹이지 못하여 여위고 죽게 되니, 풀이 마르기 전에 미리 베어서 쌓아 그 수량을 도절제사(都節制使)에게 보고하고, 도절제사가 도진무(都鎭撫)를 보내서 심사하여 예기치 않은 사태인 불우(不虞)에 대비하게 하도록 적고 있습니다.

562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경성(京城) 및 여러 영·진(營鎭)의 성안에 본래 말꼴(馬芻)을 거두어 저장하지 않으니, 사복시(司僕寺)로 하여금 호곶이(壺串, 살곶이), 삼전도(三田渡, 송파) 등지에서 마른꼴(芻茭)을 많이 베어 운반하게 하여, 말을 먹이고 남는 것은 저장하여 불시의 수요에 대비하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세조실록 10권, 세조 3년 12월 25일 을묘 기사 1457년 명 천순(天順) 1년

병조의 건의로 경성 및 각진·영에 말먹이를 잘 보관하고 관찰사가 점검토록 하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경성(京城) 및 여러 영·진(營鎭)의 성안에 본래 말꼴[馬芻]을 거두어 저장하지 않으니, 너무도 원려(遠慮)가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서울에서는 사복시(司僕寺)로 하여금 호곶이[壺串]·삼전도(三田渡) 등지에서 마른꼴[芻茭]을 많이 베어 운반하게 하여, 말을 먹이고 남는 것은 무역(貿易)하지 말고 잘 쌓아 두껍게 덮어 부패해서 손상되지 않게 하고, 영·진도 역시 많이 수확 저장하여 불시의 수요에 대비하게 하고, 관찰사가 이를 점검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4책 10권 29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