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년 전 오늘 - 축산 소식145] 치명적인 가축 전염병인 우역(牛疫)이 처음 발생하자 어떻게 대처했나?
[477년 전 오늘 - 축산 소식145] 치명적인 가축 전염병인 우역(牛疫)이 처음 발생하자 어떻게 대처했나?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2.1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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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61호, 양력 : 2월 11일, 음력 : 1월 7일

[팜인사이트=남인식편집위원] 조선시대 가축에 치명적인 우역(牛疫)에 관한 실록 기록은 280여건으로 최초로 발생한 임금 대는 중종(中宗) 36(1541) 120일이나, 가장 많이 발생한 것은 현종(顯宗)대 이후로 나타나 있으며, 우역이 최초로 발생한 15411월부터 1년간 실록의 기록에는 당시 조정(朝廷)의 상황 대처와 임금인 중종의 노심초사(勞心焦思)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우선 120일 평안도에서 올린 서장(書狀)에서 관청에서 기르는 관우(官牛)가 염병에 걸려 병사한 합계가 3515마리인데 병은 아직도 수그러지지 않는다고 하자, 임금은 농사지을 일이 걱정이라며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에 소를 보내 주라고 일렀으며, 21일에는 그 외에 추가로 죽은 소가 591마리로 도합 4천여 마리라고 하자 호조(戶曹)로 하여금 소를 구입하여 보내주되 소 값을 넉넉히 주고 기한도 충분히 주는 방안을 검토하게 하여, 조정에서는 평안도의 농사일은 다른 지역과 달라 소를 보내주어도 23년 안에 그곳의 밭갈이에 익숙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우선 병으로 죽지 않은 집의 소를 서로 변통하여 농사를 짓게 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312일에는 봄인데도 겨울같이 추워서 비가 내리지 않아 초목이 꽃이 피지를 않고, 여역(癘疫)이 평안도는 물론 경기도 일원인 기전(畿甸)에서도 소, , , , , 돼지를 포함하는 육축(六畜)이 많이 병들어 죽었다는 보고가 있자, 임금은 대궐을 떠나지 않으며 사찰을 철거하라는 유생(儒生)들의 상소를 윤허하지 않았으며, 315일에는 국가의 제사에 대뢰(大牢)로 쓰이는 희생(犧牲)인 소, , 돼지가 까닭 없이 많이 죽으니, 임금이 제사를 조심스럽게 받들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스스로 자책하며 부덕(不德)한 자질로 결함 있는 정치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며 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320일에는 제향(祭享)에 희생으로 쓰는 흑우(黑牛)까지도 병에 전염되어 죽자 매우 염려하며 죽은 숫자를 민간에게 배정(配定)하여 수를 채우게 한다면 폐단이 헤아릴 수 없어 큰 근심거리라고 적고 있으며, 42일에는 임금의 걱정이 커지자 홍문관 부제학 등이 상소문을 올려, 습기로 돌림병이 생겨 사람과 가축이 거의 다 병들어, 백성들은 잇달아 죽어가고 소와 양들도 죽어 쓰러지는데, 나라의 의원도 기술을 쓸 수 없고 임금의 제사에도 희생을 바칠 수 없으니, 이것은 하늘이 전하를 크게 경계하여 보호하고 안전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위로하기도 하였습니다.

44일에는 나라의 제사에 쓸 소, , 돼지 삼생(三牲)이 거의 다 병들어 죽었는데 신명의 노여움을 받아서 이런 재변이 있는 것이므로, 재실(齋室)이 누추하지 않고 제복(祭服)도 깨끗이 하여 신명을 대하도록 신하들이 건의하였으며, 421일자 양주 목사(楊州牧使) 첩정(牒呈)에는 돼지, 염소, 양은 다 병들어 죽어서 고을 안의 모든 제향(祭享)에 쓸 희생을 장만하여 바치기 어렵고, 기우제(祈雨祭)에도 쓸 것이 없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1018일자 기록에는 제사에 쓸 희생(犧牲) 중에 병들어 죽은 것이 자못 많으니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지 말고 서울에서 가까운 각 고을에서 나누어 길러 필요할 때 가져다가 쓰는 방안을 검토하게 하였으나, 서울에서 가까운 각 고을은 소의 병이 더욱이 심하여 나누어 기르지 못한다고 하자, 전곡(錢穀)이 있는 각사(各司)가 나누어 기르도록 전교하기도 하였습니다.

112일에는 돼지가 병들어 죽는 일에 대해, 소의 전염병(牛疫)은 치료할 방법이라도 있지만 돼지는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예조 당상(禮曹堂上)의 보고가 있자, 114일에 경기(京畿) 광주(廣州)에서 소, 양새끼, 돼지가 많이 죽었는데 의원(醫員)을 시켜 약을 주어 치료하게 하였더니, 소는 혹 죽기도 하지만 돼지나 양 새끼는 전혀 죽지 않아 약으로 치료하면 살릴 수도 있고, 한 곳에서 많이 기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니 각사(各司)에서 한 두 마리씩 나누어 기르도록 전교(傳敎)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치의 결과로 115일에는 태평관(太平館)에 옮겨 기르고 있는 돼지 75마리는 모두 살아났고, 개인의 우리로 옮겨 기른 돼지는 90마리 가운데 50마리가 죽고 40마리는 살아 있는데 한창 치료 중이라는 보고가 있었으며, 1117일에는 제사에 쓰는 희생(犧牲)을 옮겨서 기르고 있지만 병이 전염되어 많이 죽으니, 이는 반드시 제사에 정성을 다하지 못한 소치로 모든 제향관(祭享官)과 제구(祭具)에 정결하지 못한 일이 있는지 다시 더욱 살피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제사에 쓰는 희생만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말이나 기타 가축과 들짐승들도 많이 죽었으며, 민간에서 소가 죽었다고 관청에 보고하면 관청에서 소의 힘줄을 요구하기 때문에 보고하는 자가 적고 보고해도 계본에 쓰는 것은 겨우 5분의 1정도로, 실제로는 잡축(雜畜)이 더 많이 죽는 것을 보면 제사의 일을 삼가지 않은 소치는 아니라고 임금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1123일에는 대사간(大司諫)이 상차(上箚)하기를 몇 해 전부터 음양(陰陽)이 고르지 못해 추위와 더위가 계절에 맞지 않고 여름에는 비가 내리지 않으며, 겨울에는 눈이 오지 않아 벼농사가 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굶주려 온 나라에 수심과 탄식이 가득하고 굶어 죽는 자가 여기저기 생겨나는데 가축까지도 모두 죽으니 지금의 재앙은 인사(人事)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으며, 1124일에는 평안도 감사가 도내의 병들어 죽는 소가 지난 817일 치계(馳啓)한 뒤로 희천(熙川)외에 7개 지역에서 199마리의 소가 추가로 죽었다는 장계(狀啓)를 올렸습니다.

1128일에는 전염병이 겹쳐 백성과 가축이 함께 죽어가는 이유가 하늘이 재변을 보여 사람을 경계하기 때문으로 인사(人事)를 챙기고 임금도 자신을 반성하여 하늘의 뜻을 되돌리도록 하라는 사헌부의 상고가 있었으나, 이러한 노력에도 1217일 강원도 3개 고을에서 돼지가 전염병으로 죽었으며, 함경도에서는 4개 지역에서 소가 죽었고, 29일 기사에는 함경도에서 여역(癘疫)이 퍼져 죽은 남녀 노소가 2백여 명이고, 우역(牛疫)도 크게 번져 소가 매우 많이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같은 해 11월에는 여러 가축의 치료법을 일반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이두문과 한글로 적고 약명은 민간에서 불리는 이름(鄕名)으로 쓴 치료서적인 우마양저염역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을 편찬하여, 각 도에서 여러 부를 각판(刻版)하게 하여 치료에 활용하도록 하였습니다.

477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황해도(黃海道) 황주(黃州)에서도 소 25마리와 돼지 31마리가 저절로 죽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중종실록 97권, 중종 37년 1월 7일 무자 기사 1542년 명 가정(嘉靖) 21년

황해도 황주에서 소와 돼지가 죽다

황해도(黃海道) 황주(黃州)에서 소 25마리와 돼지 31마리가 저절로 죽었다.

【태백산사고본】 49책 97권 2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