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162] 종묘에 지내는 대제(大祭)에 양과 염소 중 어떤 것을 쓸 것인지 논란이 되었다
[52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162] 종묘에 지내는 대제(大祭)에 양과 염소 중 어떤 것을 쓸 것인지 논란이 되었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3.0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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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78호, 양력 : 3월 7일, 음력 : 2월 1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는 물론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실의 사당을 종묘(宗廟)라 하였는데, 이들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지내는 제사 의례를 종묘대제(宗廟大祭)라 하였으며, 국가 오례(五禮) 중 길례(吉禮)에 속하였고,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되는 국가 제사 체계 중 등급이 가장 높은 대사에 해당하였습니다.

종묘대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납일(臘日) 등 1년에 5번을 지냈으며, 납제사는 동지(冬至) 후 세 번째 간지에 미(未) 자가 들어가는 미일(未日)인 납일에 지내는 제사였고, 그 외에도 초하루와 보름, 정월 초하루,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날에도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한 수시로 올리는 제사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홍수, 가뭄, 질병, 병충해, 전쟁, 자연재해 등이 발생했을 때에도 종묘에서 기도(祈禱)를 하였으며, 국왕의 거둥과 책봉(冊封), 관례나 혼례 등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종묘에서 고유제(告由祭)를 행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새로 농사지은 과일이나 곡식을 먼저 사당에 올려 조상에게 감사하는 뜻을 드리는 의식인 천신(薦新), 사냥해서 잡은 짐승을 사자(使者)를 보내서 올리는 의식인 천금(薦禽)등의 절차도 종묘에서 있었습니다.

종묘대제 의식은 향사(享祀) 전 국왕이 7일간의 재계(齋戒)를 시작으로 하여, 향사 3일 전에는 제례에 소용되는 각종 물품을 설치하는 진설(陳設), 향사 1일 전에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궁을 나오는 거가출궁(車駕出宮), 희생 제물의 상태를 살피는 성생기(省牲器), 향사 당일에 세 번 향을 피어올리고 신령의 강림을 바라며,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어 향기가 나는 술인 울창주(鬱鬯酒)를 땅에 뿌리고 폐백을 올리는 신관(晨祼),

삶은 고기를 올리는 궤식(饋食), 신위에 초헌관(初獻官)이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初獻), 신위에 아헌관(亞獻官)이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亞獻), 신위에 종헌관(終獻官)이 마지막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종헌(終獻), 복주로 올린 술을 마시는 음복(飮福), 국왕이 궁으로 돌아오는 거가환궁(車駕還宮)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종묘대제 외에 조선시대에는 토신(土神)인 사(社)와 곡신(穀神)인 직(稷)에게 제단인 사직단(社稷壇)을 만들어 놓고 제례를 지냈는데, 이를 사직대제(社稷大祭)라 하였으며, 음력 2월인 중춘(仲春), 음력 8월 중추(仲秋)의 첫 술일(戌日)과 납일(臘日)에 행한 세 차례의 정기 대제(大祭)가 있었고, 국가 오례중 대사(大祀)의 규례로 지냈습니다.

또한 각 지방 주현(州縣)에서는 한양에 사직단을 둔 것과 같이, 그 지역의 토신과 곡신을 제사하는 사직단을 두었는데, 통상 각 고을의 서쪽에 사와 직의 단을 같이 만들어, 중춘(仲春), 중추(中樞) 첫 술일에 연 2회 제사하였습니다.

한편, 국가에서 거행하는 제사인 대사, 중사, 소사에는 반드시 희생(犧牲)으로 가축을 사용하였는데. 이를 생뢰(牲牢)라 하였으며, 제사의 크기에 따라 소, 양, 돼지 등 희생의 수를 달리하여, 소, 양, 돼지를 모두 사용하는 경우는 태뢰(太牢), 소를 제외하고 양과 돼지만을 쓰는 경우는 소뢰(小牢)라고 하였고, 종묘와 사직 등에 지내는 대사에서는 태뢰를, 그보다 한 등급 낮은 제사인 중사에서는 소뢰를 올렸습니다.

522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예조(禮曺)에서 사직(社稷)과 납일(臘日), 봄 가을 큰 제사에는 양을 썼고, 임금이 제례에 참여하지 않고 지내는 섭행(攝行)에는 염소를 썼다고 서계(書啓)하자,

대신들이 선왕조(先王朝)에서 종묘에는 양을 썼고, 사직에는 염소를 썼던 것이 어디에 근거하여 그렇게 한 것인지 알 수 없고, 같은 큰 제사이니 종묘의 예절에 따라 양을 쓰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의를 하였습니다.

 

■연산군일기 21권, 연산 3년 2월 1일 계유 기사 1497년 명 홍치(弘治) 10년

예조·어세겸 등이 제사에 양을 쓰는 문제로 서계하다

예조가 서계(書啓)하기를,

"《문헌통고(文獻通考)》 중 종묘고(宗廟考)의 주에 이르기를, ‘변(籩) 앞의 조(俎)가 두 줄[重]이다. 첫째 줄은 소의 날고기 체(體)로 채우니 두 다리[髀]·두 갈비[脅]·두 어깨와 등허리인데, 두 다리가 양쪽 끝에 있고 두 어깨·두 갈비가 그 다음이요, 등허리는 가운데에 둔다. 둘째 줄은 양의 날고기 7체로 채우는데, 그 순서는 소와 같고, 두(豆) 앞의 조는 돼지 날고기 7체로 채우는데 그 순서는 양과 같다. 그리고 머리 오른쪽의 조는 세 줄이 되는데, 첫째 줄은 소와 양과 돼지의 머리 하나씩으로 한다.’고 하였으며, 아조(我朝) 《오례의(五禮儀)》 주에는 이르기를, ‘변 앞의 조는 하나를 소의 날고기로, 하나는 양의 7체로 채우는데, 두 다리 두 어깨 두 갈비와 등허리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리가 두 끝에 있고 어깨 갈비가 그 다음이요 등허리가 가운데 있고, 두 앞의 조에는 돼지의 날고기 7체로 채우는데, 그 순서는 양과 같다.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와 양과 돼지의 머리를 말한 것이 없으니, 옛 글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 본 뜻을 자세히 생각하여 보았지만 그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양과 돼지의 머리를 등허리 꼬리에 이어서 하나로 하여 쓰는 것이 어떻습니까? 또 염소와 양은 한 종류입니다. 그러나 양은 본국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에 예절을 마련할 때, 사직(社稷)과 납일(臘日)과 봄 가을 큰 제사에 친행(親行)할 때에는 양 네 마리로 정하였고, 섭행(攝行)할 때에는 양 한 마리로 정했습니다. 이에 의하면 섭행할 때에는 염소를 썼습니다. 지금 양이 많이 번식하였으니 섭행할 때에라도 양을 쓰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의논하게 하라."

하자, 윤필상(尹弼商)이 의논드리기를,

"지금 양이 번식하였으니 쓸 수는 있겠지만 염소를 쓴 지가 이미 오래였으니 예조와 홍문관에서 널리 제도를 상고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노사신(盧思愼)·신승선(愼承善)은 의논드리기를,

"예문에 보면 모든 제사의 희생(犧牲)은 소와 양과 돼지를 쓰고, 염소를 쓴다는 문구는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종묘에는 양을 쓰고 사직에는 염소를 쓰는데 그것이 그렇게 된 유래를 알 수는 없지만 종묘와 사직은 일체(一體)이므로 다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종묘에서 하는 대로 양을 쓰게 하는 것이 예법에 맞을까 합니다."

하고, 어세겸(魚世謙)·한치형(韓致亨)·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유지(柳輊)는 의논드리기를,

"큰 제사에 희생[牢]으로 쓰이는 것은 소와 양과 돼지입니다. 선왕조에서 종묘에는 양을 썼고, 사직에는 염소에 썼던 것이 어디에 근거하여 그렇게 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양과 염소가 같은 희생이니 어찌 구별됨이 있겠습니까. 선왕의 옛 법을 가볍게 고칠 수는 없으니, 예관(禮官)에게 조종조에서 예법 만든 뜻을 자세히 상고하게 하고 옛 제도를 참작하여 다시 아뢰게 한 후에 의논을 보아 시행하게 하소서."

하고, 성준(成俊)은 의논드리기를,

"염소로 양을 대신한 이유를 신은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같은 큰 제사이니 종묘의 예절에 따라 양을 쓰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왕이 성준의 논을 좇았다.

【태백산사고본】 6책 21권 27장

【주】

변(籩) : 대로 만든 제기.

조(俎) : 제기의 일종.

두(豆) : 고기를 담는 제기.

희생(犧牲) : 양·소·돼지고기의 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