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175] 사냥용 매(鷹)로는 수리(鷲)의 일종인 새매(鷂子)도 사용되었다
[56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175] 사냥용 매(鷹)로는 수리(鷲)의 일종인 새매(鷂子)도 사용되었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3.26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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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91호, 양력 : 3월 26일, 음력 : 2월 20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새매에 대한 표기는 요자(鷂子), 요전(鷂鸇)로 적고 있으며, 한자로 요(鷂), 전(鸇), 준(隼)등으로 적어 일반적인 매(鷹)와 구분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사냥매는 골(鶻)속과 응(鷹)속의 두 분류로 구분하여, 골속은 분류상 매목 매과에 속하는 송골매, 백송골, 쇠황조롱이 등이며, 응속은 매목 수리과에 속하는 조류로 참매, 새매, 뿔매, 검독수리, 참수리, 독수리, 망똥가리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통상 매과 조류들은 날개 폭이 좁고 길이가 길어 공중에서 빠른 속도를 내는데, 사냥할 때도 공중에서 기류를 타고 급강하하면서 사냥감을 낚아채 일격에 목뼈를 부러트려 즉사시켜 넓은 공간에서 사냥능력이 뛰어난 반면, 수리과 조류들은 날개 폭이 넓고 길이가 짧아 산속이나 들판에서와 같이 좁은 장소에서 순발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매과와 수리과 조류를 모두 다 사냥에 이용하였지만 일반 서민들이 매사냥에 참여한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수리과 조류가 매사냥의 주축이 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매과와 수리과의 특성에 따른 자연적인 선택으로 새매에 대한 왕조실록의 기록은 100여건으로 임금대 별로 고르게 나타나 있으며, 초기 매에 관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태종(太宗)대에 사복시 부정(司僕副正)을 지낸 자를 가두었다가 석방하였는데, 이 사람 휘하에 좋은 새매(鷂)를 기르는 자들이 4명이 있었는데, 이들이 조심하지 못하여 새매를 실성(失性)하게 하여, 관원에게 제공하는 봉급인 녹(祿)을 도로 징수하고 군졸(軍卒)로 충군(充軍)하게 하였으며, 평안도 도안무사(平安道都安撫使)가 새매(鸇) 3련(連)을 왕실에 바친 기록도 있습니다.

세종(世宗)대에는 태종과 신빈 신씨(信嬪 辛氏) 사이에 태어난 정신 옹주(貞愼翁主)의 부군(夫君) 영평군(鈴平君)의 무리가 나라의 새매(鷂)를 응방 제조(鷹房提調)의 집에서 훔치자, 직첩을 거두고 부하들은 형장(刑杖) 1백에 수군(水軍)에 충당(充當)하였는데, 이들에게 중형을 내려야 한다는 대신들의 건의에, 비록 매를 훔쳤다고는 하나, 궁중 담을 넘어서 내부의 것을 도둑질한 것과는 죄가 차이가 있으며, 새매(鷂子)는 임금이 특별히 아끼는 것도 아니므로 목숨을 해치는 중형은 불가하다고 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세종 임금의 형님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임시직 관리인 차비(差備)가 몰래 진상할 새매를 양녕의 처소에 보냈는데 이를 사사로이 받은 것으로 들어나자, 작(爵)과 녹을 깎아버리고 금령을 엄중하게 세우라는 대신들의 건의를 윤허하지 않았으며, 임금이 사냥인 강무(講武)를 위해 황해도 풍천(豊川) 지역에 머물 때 경기 감사가 활, 살, 사냥개 외에 새매를 바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전라도 감사가 흰 새매(白鷂子)를 진상하자 의복 1습을 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아울러 왕세자인 동궁(東宮)이 학문할 때에 새매와 사냥개를 데리고 사졸(士卒)을 갖추어서 들판을 달리면서 학업(學業)을 일삼지 않는다면 이것은 교양(敎養)하는 길이 아니라는 대신들의 건의에 임금이 게을러서 동궁으로 하여금 대행시키는 것이 아니라며 타이르기도 하였고, 평안도와 함길도의 채방별감(採訪別監)에게 송골매(松鶻)를 잡을 때에, 혹시 매의 일종인 흰 나진(那進)이나 흰 새매를 잡거든 송골매의 예(例)에 따라 포상할 것을 널리 효유(曉諭)하여 아울러 잡게 하라고 유시하기도 하였습니다.

566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새매가 참새를 쫓다가 궁궐안 전내(殿內)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매가 전내에 들어오다

새매가 참새를 쫓다가 전내(殿內)에 들어왔다.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1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