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년 전 오늘 - 축산 소식179] 왜적이 충청도 비인(庇仁)에 쳐들어와 민가를 약탈하니 개와 닭도 씨가 말랐다
[469년 전 오늘 - 축산 소식179] 왜적이 충청도 비인(庇仁)에 쳐들어와 민가를 약탈하니 개와 닭도 씨가 말랐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4.01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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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95호, 양력 : 4월 1일, 음력 : 2월 26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 시대 초기 극성을 부린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倭寇)는 도서(島嶼)지역과 해안가는 물론 내륙 깊숙한 곳까지 노략질을 일삼았는데, 고려시대 역사서에는 바다에서 많게는 50리(20km)에서 적어도 30~40리는 떨어진 곳이라야 백성들이 겨우 편안히 살 수 있었던 것으로 적고 있어, 지형적 특성상 해안가 넓은 평지에 많이 밀집한 논과 밭에는 이들 왜구들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거의 황폐화 되었으며, 이에 따른 재정적 어려움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게 한 요인으로도 분석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왜적(倭敵)에 관란 기록은 3천5백여건, 왜구(倭寇)에 관한 기록은 800여건으로 초기 세종(世宗)대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있었던 선조(宣祖) 대의 기록이 많으며, 왜구들의 침입으로 우마(牛馬)를 기르기 위해 해안가나 도서 지역에 설치되었던 국영목장(國營牧場)들도 실제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임금대별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세종대에는 경기 감사가 강화(江華)의 목장을 쌓는 군사의 수효와 기일에 대하여 보고를 하자, 대신(大臣)들 간에 거주하는 백성을 옮기지 않더라도 목장 안이 넓어서 만 마리의 말을 방목(放牧)하여도 여유가 있을 것이며, 이 지역은 바다 입구의 요해지(要害地)이므로 왜구(倭寇)가 있다면 모두 이곳을 경유(經由)하게 되니, 거주하는 백성을 다 옮기는 것은 분명히 옳지 못한 일이라는 논란이 있어, 조관(朝官)을 보내어 다시 성을 쌓는데 넓게 하고 좁게 할 것과 높게 하고 낮게 할 것을 살피게 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단종(端宗)대에는 경상도 거제현(巨濟縣) 사람들이 장고(狀告)하기를, 살고 있는 땅이 모두 큰 산과 바위로 되어 있어 경작할 만한 평지가 없는데도 목장(牧場) 9개소를 설치하였고, 나머지 바닷가의 경작할 만한 땅은 왜구가 다시 침입할까 두려워 경작을 금하여 생계(生計)가 매우 어려우니, 목장 옛터의 묵은 땅(陳地)을 경작하게 해달라는 건의도 있었습니다.

세조(世祖)대에는 양계(兩界)인 평안도와 함길도에 충청도 안면곶이(安眠串)의 거주민(居住民)을 보내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 지역에는 목장(牧場)이 이미 반을 차지하고 있고, 남북쪽으로 방어(防禦)가 있으며, 해안(海岸)에는 배를 정박하는 곳이 없어 왜구(倭寇)가 침구(侵寇)할 수가 없으므로 거주민을 그대로 두고, 소나무가 없는 산기슭에는 백성에게 밭을 갈아 농사를 짓도록 하며, 소나무가 무성한 곳에는 벌채(伐採)를 엄중히 금지시켜 전지(田地)를 만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연산군(燕山君)대에는 진도(珍島)는 전라도에 왜적(倭賊)이 드나드는 문(門)인데, 해마다 백성들이 농사를 실패하여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유랑하여 도망하는 사람이 서로 잇따르니, 관찰사로 하여금 목장의 혁파(革罷) 여부와 모든 공물(貢物)의 감량(減量) 가부를 살펴서 의논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중종(中宗)대에는 제주(濟州) 왕래에 왜적(倭賊)이 있어서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약탈하며 관리들도 피해를 입자, 대마도(對馬島) 도주(島主)에게 통유(通諭)하여 왜적을 추치(推治)하게 한 바가 있으며, 전라도 영암(靈岩)에 있는 노도(露島)·달목도(達木島)는 말을 방목하는 목장(牧場)으로 삼았는데, 말을 점고할 때면 왜구(倭寇)와 수적(水賊)이 가벼운 배, 작은 배로 출몰하니, 두 섬의 말의 수효가 겨우 백 30필에 불과하고 말 때문에 사람이 상하거나 빠져 죽게 되면 안 되니, 두 섬을 도외시(度外視)해버리자는 상소가 있었고, 왜적이 충청도(忠淸道) 비인(庇仁)에 쳐들어와 병선(兵船)에 불을 지르고 현성(縣城)을 포위하며 민가를 약탈하니, 개와 닭도 씨가 말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69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중국 배가 황해도 풍천(豊川) 고을의 초도(椒島)에 와서 정박하여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고 목장의 말을 도살하는 등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온 듯 하였으니, 관할 부사(府使)를 파직시키고 추고하라고 적고 있습니다.

 

■명종실록 10권, 명종 5년 2월 26일 신유 기사 1550년 명 가정(嘉靖) 29년

초도에 정박한 중국배의 노략질을 알지 못한 부사 전순인의 파직을 명하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중국 배가 풍천(豊川) 고을의 초도(椒島)에 와서 정박하여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고 목장의 말을 도살하는 등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온 듯하였으니, 감목(監牧)이 된 자는 마땅히 즉시 군사를 일으켜 기회를 보아서 쳐 죽였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평소에 방비를 소홀히 하여 그들의 오고감을 전혀 알지 못하였으니 매우 경악스러운 일이다. 부사(府使) 전순인(全舜仁)을 먼저 파직시킨 다음 추고하여 방비를 삼가지 않은 죄를 다스리라."

【태백산사고본】 8책 10권 9장

【주】 감목(監牧) : 감목관(監牧官)의 약칭.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 6품의 외관직 무관. 목장이 있는 곳의 수령(守令)이 겸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