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형 순환 경제 기반···지역 공유 생태계 부활에 방점
[팜인사이트=박현욱 기자] 글로벌 시대다. 외딴곳에서 어떤 상품을 생산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상품은 순위가 매겨진다. 낮아진 무역 장벽과 손안에 핸드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비교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Top10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반대로 꼴찌 할 권리도 사라졌다. 국경을 가리지 않는 무한 경쟁시대는 꼴찌를 가만두지 않는다. 지구촌의 세계화는 국제 경쟁력이라는 이름 하에 농업의 다양성을 갉아먹고 있으며 식량의 다양성도 위축시키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트렌드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농업 라이프 스타일을 주장하는 이가 있어 주목된다. 곡물가공 전문 기업 라이스텍 정종성 대표는 식량의 획일성, 무너지는 농촌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휠링 라이프를 제안한다.
국민 섭취 열량 90%, 고작 15종 작물에서 섭취
"지금의 먹거리 생태계는 극단으로 치우쳐 있어요. 농업이 세계화되자 식량의 다양성은 감소하고 균일화됐죠. 2016년도 기준으로 사람들이 섭취하는 열량의 80%를 차지하는 작물은 고작 12종에 불과하고 90%를 차지하는 작물도 15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 대표는 농업의 다양성이 훼손됐다고 판단하고 있다. 먹거리 생태계가 세계화되면서 스스로의 자연 순환의 궤도를 벗어났다는 얘기다. 먹거리 시스템의 조화와 균형은 잃어버린지 오래고 전문화, 중앙화, 집중화로 닦인 일방통행 도로를 다시 균형 상태로 만드는 게 우리의 당면 과제라는 주장이다.
"우리나라도 2000년대부터 농업정책이 글로벌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집단화·전문화를 강요했어요. 이는 식량의 편향됨으로 나타났어요. 공은 있죠. 안정적인 먹거리 공급은 됐을지 몰라도 너무 극단으로 치닫고 있어요. 이제 먹거리 시스템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정책과 실천 모델이 절실합니다."
편의점 먹거리의 비극 "당신은 잘 먹고 계십니까"
현재 우리는 편의점에서 한 끼를 해결해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편하기까지 하다. 전자레인지 앞에서 2분의 시간만 허락하면 진수성찬까지는 아니어도 다양한 라인업의 식재료를 맛볼 수 있다. 편의점은 먹거리 유통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건강한 삶은 담보하지 못했다.
"건강한 먹거리를 맛보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가격을 지불할만하지 않나요. 좋은 식재료는 건강한 삶을 살아갈 기회를 제공해주죠. 그런 의미에서 편의점 먹거리는 고장 난 먹거리 체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시공간을 극복하고 편안함을 제공해줄지언정 식품들이 창출할 수 있는 부가가치를 가공이라는 한계로 막아버린다고 할까요."
가공식품의 지나친 성장은 우리 먹거리 생태계가 낳을 수 있는 다양성의 기회를 막는다. 농축산물 생산으로 인해 얻는 다양한 공익적 가치가 베일에 가려지기 때문이다. 가공식품의 번성은 완제품인 상품만 남는다는 얘기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재화의 분배 문제다. 소매 유통으로 급격하게 쏠리는 재화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부가 외부로 유출되는 문제를 낳는다.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은 생산단계에서부터 부가가치가 창출됩니다. 생산이라는 노동, 토양을 비옥하게 하려는 노력, 작물 자체가 가지는 잠재력 등 이 모든 것들이 농업, 즉 먹거리가 지니고 있는 가치죠. 중앙화·집중화는 이 같은 가치를 희석시키고 재화의 분배를 지역에 기여하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4차 산업혁명, 3만 달러 시대의 충격
지난해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화두는 '4차 산업혁명'이었다. 표면적으로 정보통신기술의 획기적 발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본질은 탈 중앙화, 공유 등을 지향한다. 정 대표는 혁명의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의미의 4차 산업혁명은 연결, 분권, 개방을 통한 맞춤시대의 지능화 세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글로벌 사회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얘기죠. 여기에서 확장한다면 농업 가치의 공유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올해 3만 달러 문턱을 넘었다는 사실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비자의 지갑이 두툼해졌다는 의미인데 이미 시장에서는 가격보다 가치와 다양성에 관심을 둔 소비자가 늘고 있다.
"농업의 가치 공유, 먹거리의 다양성 확보는 시대의 트렌드와 맞아떨어지죠. '4차 산업혁명'과 '3만 달러'라는 키워드는 콘텐츠가 살아있는 먹거리를 생산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소멸하는 지방 무너지는 농촌
지방이 소멸하고 있다. 2017년 우리나라에서 단 한 명의 신생아도 태어나지 않은 곳은 전국을 통틀어 17곳이나 된다. 보통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곳일 것이라 예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인천시 서도면,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등 대도시와 멀지 않은 곳들도 인구 감소 충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인구문제는 농업뿐만 아니라 모든 제조업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구문제는 구매력으로 이어지고 구매력은 유통에 힘을 실어주죠. 유통이 살아나야 제조업도 연명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인구의 감소는 우리 농업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대안을 모색해야 할 중요한 이슈입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은 더 충격적인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앞으로 30년 안에 전국 시군 단위의 1/3인 84곳에서 단 한 명의 거주자도 없을 것이란 데이터를 들고 나왔다. 인구 절벽 충격은 농촌지역부터 잠식할 가능성이 크다. 지방이 소멸되면 농촌은 사라진다. 소멸 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 1위는 경북 의성이며 2위 전남 고흥, 3위 경북 군위로 조사됐다. 대부분 1차 생산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지역이다.
"서두에서 말한 농업의 가치가 살아나려면 먹거리를 생산하고 있는 지방에 살아 숨 쉬어야 가능하죠. 인구 절벽으로 인한 충격은 지방에 타격을 주고 농촌이 붕괴되고 농업 기반이 괴멸할 가능성이 커진 겁니다."
일터·쉼터·장터·배움터·삶터를 묶은 패러다임 혁명 필요
모든 것을 종합하면 우리 먹거리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선 당면 과제는 ▲먹거리 다양성 확보 ▲소비 트렌드 동참 ▲농업의 부가가치 재생 ▲지역 경제 활성화 ▲농촌 지역 붕괴 억제 등으로 요약된다.
"새로운 먹거리 모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정책을 혁신할 때 가능하죠. 슬로푸드와 로컬푸드 운동은 각론이죠. 이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총론 개념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정 대표가 생각하는 모델은 휠링 라이프(WHEEL'ing Life)다. 일터(Working), 쉼터(Healing), 장터(먹거리·Eating), 배움터(Educating), 삶터(Living)의 앞 글자를 딴 톱니바퀴 삶이다. 이들이 각각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고 돌아가는 지역경제순환형 자립 공유경제 생태계를 구축하자는 게 정 대표의 주장이다.
이 모델의 기본 전제는 경제, 환경, 사회로 압축된다. 경제 커뮤니티는 수익을 내야 하며, 환경은 지속 가능해야 하고 시스템 플랫폼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자체에서는 일터에서의 지역 재투자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쉼터에서는 힐링케어타운과 같은 쉼터를 제공해 워라벨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 슬로푸드와 로컬푸드의 합성어인 슬로컬푸드도 조달 서비스를 구축해 먹거리 장터를 해결하고 팜, 숲 유치원 등으로 배움터를 조성한다. 끝으로 셰어하우스로 지역 삶터를 공유하자는 게 이 대표가 그리는 큰 그림이다.
"한국적 커뮤니티 경제, 자원순환형 사회적 경제, 장수 친화적 케어 시티, 슬로컬 스마트 시티를 기본 방향으로 하는 휠링 라이프 개념은 우리나라 농업이 지녀야 할 모든 가치를 포괄한다고 보면 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우리의 먹거리 시스템과 삶도 나아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