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13] 농우(農牛)가 많지 않아 교역이 어려웠고 수소보다는 암소가 많았다
[62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13] 농우(農牛)가 많지 않아 교역이 어려웠고 수소보다는 암소가 많았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5.20 10: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19-229호, 양력 : 5월 20일, 음력 : 4월 16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무역(貿易)은 민간이나 관아(官衙) 또는 국가 간에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 전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전기에는 국가가 경제활동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크게 발달하지 않았지만, 후기에는 유통경제의 발달로 무역 활동이 비교적 활발하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같은 무역의 초기 형태가 조선과 만주 지역 여진인(女眞人) 사이에 이루어진 교역으로 여진 쪽에서는 식량, 소금, 철(鐵) 등을 공급받기 위하여 그들의 특산물을 조선에 진상(進上)하면, 이를 받아들이는 단순한 물자 교역의 형태에서, 변경 지역에 호시(互市)를 개설하는 형태로 발전하여 태종(太宗) 대에는 함경북도 경원과 경성(鏡城)에 정식으로 무역소(貿易所)를 건립하여 물자교역 창구를 마련해 주어 변방에서의 소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여진족들은 만주 지역에서 통합을 이루면서 이미 농경 생활이 많이 보급되었지만, 농기구 및 농우(農牛) 등 생산수단의 자급이 불가능하고 농업 노동력도 부족하여, 이를 주로 명나라와의 마시무역(馬市貿易)을 통하여 해결하였으나, 적대 관계가 표면화되면서 경제 봉쇄를 위해 마시무역을 단절시키자 조선에 국경무역 개설을 적극 요청하게 되었고, 조선은 경제적 손실과 명과의 외교적 관계로 적극성을 띠지 않아, 정묘호란(丁卯胡亂)등 전쟁을 통하여 호시 설립 확대를 강요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실록에 무역에 관한 기사는 2천여건이 넘게 실려 있지만 그중에 북방 민족과 소(牛隻,우척) 교역에 관한 기사는 많지 않으며, 그중 임진왜란 이전 주요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태조(太祖) 대에는 소의 교역을 희망하는 중국 진왕부(秦王府)의 사람에게 무역하기가 어려움을 말하게 하고,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인 내온(內醞)과 저포(苧布), 마포(麻布)등 포목을 보내주었으며, 세종(世宗) 대에는 요동(遼東)에서 우척 무역(牛隻貿易)을 청한 글을 통사(通事)를 통해서 미리 입수하였는데, 중국의 공식 문건인 칙유(勅諭)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준비를 위한 임시 관청인 진헌색(進獻色)을 설치할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조정(朝廷)에서 있었습니다.

또한 이를 위한 준비 과정에서 조선에는 소가 몹시 적은데 요동(遼東)에서 우척(牛隻) 교환이 인준되었으니, 장차 그 수효를 충당할 수 없다고 할 것인지, 또 소가 숫놈은 적고 암놈이 많은데 장차 자웅(雌雄)을 반반으로 갖추어서 할 것인지. 아니면 암소를 많이 갖추어서 교환할 것인지를 논의하여 당초 정해진 원액수(元額數)의 3분의 1을 황소로 바치고 나머지는 암소를 쓰는 것으로 결정한 바가 있습니다.

연산군(燕山君)대에는 여진족인 야인(野人) 등이 조선의 우마(牛馬)와 철물(鐵物)을 이롭게 여겨 담비 가죽인 초피(貂皮)나 족제비 가죽인 서피(鼠皮)를 준비하여 매매하기를 구하는데, 변민(邊民)들이 침탈(侵奪)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농기(農器)와 가마솥을 가지고 오랑캐와 교역을 하고, 또 한양 안에서 흥판(興販)하는 무리들이 바리바리 면포를 싣고 변방 진(鎭)을 두루 횡행하며 철물과 우척(牛隻)을 사가지고 통역하는 통사(通事)와 결탁하여 날마다 팔아 넘기기를 일삼으니,

엄한 수령(守令)이라도 능히 금하지 못하여,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강개(慷慨)한 어사(御史)를 1년에 한 차례씩 교체해서 파견하여, 사찰을 엄하게 하고 그 행장(行裝)과 마문(馬文) 관첩(關帖)을 고찰해서 이름을 점호하여 출입하게 하면, 불법(不法)이 있을 경우에는 변진(邊鎭)을 어지럽게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의 상소가 있었습니다.

한편, 조선시대 초기 압록강에 이르기 까지 평안도 일대의 행정구역을 서북면(西北面)이라 칭하였으며, 후에 평양과 안주의 지명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평안도로 개칭하였고, 감영(監營)을 평양에 두었으며 도 관찰사를 파견하였는데, 평양은 대동강과 의주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육로와 수로 교통의 요지여서 역사적으로나 지역적으로 감영(平安監營)을 설치하기에 충분하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626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중국 진왕부(秦王府)에서 사람을 보내어 소(牛)를 무역하기 위하여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고 보고하자 도승지(都承旨)에게 명하여 회답할 자문(咨文)을 지어 오게 하였습니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4월 16일 경인 기사 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진왕부의 사람이 소 무역을 위해 의주에 도착하니 회답할 자문을 짓게 하다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 조온(趙溫)이 보고하였다.

"진왕부(秦王府)에서 사람을 보내어 소[牛]를 무역하기 위하여 의주(義州)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승지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도평의사사에 의논해서 진왕부에 회답할 자문(咨文)을 지어 오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7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