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28] 종로 비원(秘苑)에 임금이 짐승을 놓아두고 말을 달리면서 사냥하였다
[52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28] 종로 비원(秘苑)에 임금이 짐승을 놓아두고 말을 달리면서 사냥하였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6.2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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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44호, 양력 : 6월 25일, 음력 : 5월 23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궁궐 중 창덕궁 후원(昌德宮後苑)은 비원(秘苑) 또는 북원(北苑)이라고도 하며, 태종(太宗) 임금 대에 창건되어 세조(世祖) 임금 대에 크게 확장되었는데, 당시 동쪽 담에 인접된 민가 73구(區)를 철거하였고, 북쪽으로도 담에 인접한 민가 58구(區)를 철거하면서 담 밖에 있던 동점(東坫)의 산줄기를 담 안으로 넣기 위하여 100척(尺)을 더 뒤로 물린 다음 담을 쌓게 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이 때 둘레가 4,000척으로 도성(都城) 주위의 주민을 징발하여, 109가(家)를 1통(統)으로 25척씩 담을 쌓게 하였고, 모두 160통이 이 노역에 징발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록에 이러한 후원과 관련 된 기사는 500여건으로 주로 종친(宗親)이나 중신((重臣)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고, 무과(武科) 과거 시험을 치르거나, 무사(武士) 들이 짐승의 머리를 그린 과녁에 활을 쏘아 시합하는 사후(射侯)를 관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일부 후원에 논을 만들어 임금이 농작(農作)의 작황을 살피거나 농잠(農蠶)의 형상(形狀)을 구경한 기록이 있으며, 짐승과 관련된 기사는 40여건으로 그중에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세조대에는 사복시(司僕寺)에 명하여 말 10필(匹)을 창덕궁(昌德宮) 후원(後苑)에 방목(放牧)하도록 한바가 있으며, 경상도관찰사가 흰 사슴 2마리를 바쳤는데, 털이 빠지고 다시 나서 누렇고 붉은 빛깔이 되자 흰 사슴이 아니라고 여기어 후원에 내놓아 기르게 하였으며, 세자(世子)등에게 명하여 후원에서 산돼지를 쏘도록 하거나 친히 후원에 나가서 매를 놓아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종(睿宗) 대에는 후원과 응방(鷹坊)에서 기르는 돼지는 모조리 해당 관사(官司)에 주어서 기르도록 하였으며, 성종(成宗)대에는 대왕대비(大王大妃)가 황해도(黃海道)에서 바친 백록(白鹿)을 산림(山林)에 놓아주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절름거려서 다른 짐승에게 해(害)를 입을까 염려되니, 잠시 후원(後苑)에 놓아두었다가 뒷날을 기다려서 놓아 주도록 전지한 바가 있으며, 후원에 나아가 입직(入直)한 정규 병사인 정병(正兵)을 불러 활을 쏘아 시합하는 사후를 하게 하여, 많이 맞힌 9인에게 어린 말(兒馬) 각각 1필씩을 하사(下賜)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대사헌(大司憲) 등이 사냥용 매인 해청((海靑)을 기르지 말도록 임금에게 청하자, 세조 임금은 해청을 어떤 때에는 후원에 날려 사냥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들 밖에서 날려 사냥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본받아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은 작은 일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항상 깊은 궁중에 거처할 뿐이라며 거절의 뜻을 표하기도 하였습니다.

연산군(燕山君)대에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등이 임금이 즉위하신 이래로 경연에 드물게 납시고, 어진 이를 맞아 묻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사소한 오락을 즐기시어 사슴을 후원에서 몰고 다니며, 들돼지를 산채로 잡아 궐내 우리에 가두니, 이것은 반드시 짐승 따라다니는 것을 오락으로 인도하는 것이니 뛰어다니는 짐승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상서를 올렸으나 채납(採納)하지 않았고,

임금이 사복시로 하여금 여우, 토끼, 날담비(蜜狗) 잡는 그물 1백 5벌을 미리 준비하도록 하자, 사신(史臣)이 비판하기를, 임금의 방탕이 극도에 달하여 모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사방에 잡아 바치도록 독촉하여, 산이나 바다의 기괴한 족속을 새장이나 우리에 메고 보내는 것이 길을 이었으며, 무사(武士)들을 파견하여 범, 표범, 곰, 말곰 등속을 산채로 잡아 다 후원에 가두어 놓고, 고기를 먹이며 구경하기도 하고 혹은 친히 쏘아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으며, 돼지, 노루 같은 것은 산속에 놓아두고 준마(駿馬)를 타고 달리며 쫓아 비탈과 골짜기의 밀림 속을 드나들기를 하면서, 공사(公私)의 준마를 징발하여 왕실의 마구간인 용구(龍廐)에 모으므로, 민간이나 역로에 이름난 말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522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창덕궁 북문인 광지문(廣智門) 밖의 경비하는 곳이 너무 문에 가까워서 후원(後苑)을 내려다보게 되고, 임금이 후원에 짐승을 놓아 두고 말을 달리면서 사냥하는데, 파수 숙직하는 군사가 들여다보는 폐단이 있으니, 영(營)을 낮은 곳으로 물려서 문을 바라다보게만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연산군일기 23권, 연산 3년 5월 23일 갑자 기사 1497년 명 홍치(弘治) 10년

광지문 밖의 영을 아래로 옮기게 하다

전교하기를,

"광지문(廣智門) 밖의 경비하는 곳이 후원(後苑)을 내려다보게 되고, 너무 문에 가까워서, 파수 숙직하는 군사가 들여다보는 폐단이 있으니, 영(營)을 낮은 곳으로 물려서 문을 바라다 보게만 하면 가하다."

하였다.

왕이 후원에 짐승을 놓아 두고 말을 달리면서 사냥하는데, 문 지키는 군졸이 엿보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23권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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