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31] 임진왜란 시 노략질로 남아 있는 소가 없었고, 죽은 것도 많아 농우가 없었다
[42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31] 임진왜란 시 노략질로 남아 있는 소가 없었고, 죽은 것도 많아 농우가 없었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7.0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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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47호, 양력 : 7월 3일, 음력 : 6월 1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선조(宣祖) 임금 대인 1592년 4월부터 1598년 11월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전국(戰國)시대를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해외 진출을 목표로 일으킨 전쟁으로, 초기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 전투 병력 16만명이 18일만에 한양에 도달할 정도로 무방비 상태로 치루어 졌으며, 1593년에 중국 명나라가 참여하면서 평양성을 수복하고 이후로 4년여에 걸친 협상이 결렬되는 과정을 거쳐 , 1597년에 14만명의 일본군이 다시 공세를 펼쳤으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육지는 물론 바다에서 승리하면서 전쟁이 끝이 나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조선은 전 분야에 걸쳐 국가의 물질적 토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전쟁 이전 상태로 복구하는 데 100여 년이라는 긴 기간이 걸린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데, 이중에는 축산분야도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축종인 소(牛)에 관한 기사는 약탈되거나 노략당하여 남아 난 것이 없고, 군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우마(牛馬)도 확보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특히 농사를 짓기 위한 농우(農牛) 확보도 쉽지 않아 여러 가지 대책을 논의한 기사가 많은데, 왜란 기간에 기록된 소에 관한 기사 50여건 중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초기에는 전쟁 시 국무 수행기능을 맡았던 비변사(備邊司)가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각 고을의 마소(牛馬)가 적에게 다 노략당하여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 게다가 수레를 끌고 양식을 운반하다 도로에서 쓰러져 죽은 것이 많아서 농우(農牛)가 핍절되어 밭갈이를 할 대책이 없는데, 각 고을에서 공급할 반찬이 없어 부득이 남아 있는 소를 잡는다고 하자 사헌부와 의금부로 하여금 일체 금지하도록 한 바가 있으며, 굶주린 백성들이 가을보리의 종자를 뽑아 먹으며, 경종을 해야 하는데 농우(農牛)나 종자를 구비할 형세가 미치지 못한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또한 황해도 해주(海州)는 중전(中殿)께서 임시로 거처하는 시어(時御)하는 곳으로, 시위하는 제신(諸臣)들은 마땅히 일마다 간소하게 하여 민간에 해를 끼치는 일이 없어야 하는데, 입번 군사(立番軍士)들을 모두 제 집의 노복(奴僕)으로 대립(代立)하게 하고서 그 품값인 번가(番價)를 함부로 거두어들이며, 심지어 농우(農牛)까지도 공공연히 탈취하므로 온 경내에 원성이 자자하고 흩어져 도망하는 자들이 잇따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와중에 경성(京城)의 한강 이남 직로(直路)는 모두가 쑥대밭이 되어서 백성이 모이지 않고 도적이 설치는데, 훈련 주부(訓鍊主簿) 등이 스스로 모여 양재역 근처에다 목책을 설치하고, 흩어진 마을 주민과 역졸을 불러 모아 명년에 경작을 하려하자, 호조(戶曹)에서 농우(農牛)와 종자 등을 마련하여 주도록 조치한 바도 있습니다.

전쟁 후반기에는 중국군의 남행에 따른 군량 조달 등의 문제들을 논의하면서, 수원(水原) 본부와 오산 근처의 독성(禿城)에 저축한 미두(米豆) 및 이웃 고을인 양성(陽城)과 안성(安城) 등에 저축한 미두를 경기 감사로 하여금 본 읍과 독성을 지키는 군사 중 노약자(老弱者)와 우마(牛馬)를 모두 징발하여 지고이고 운반하게 해서 군사가 이르는 곳마다 결핍되는 걱정이 없도록 한 바가 있으며,

중국 지휘관인 부총(副摠)이 소 1백 마리와 목방(木枋)과 목판(木板) 각각 1백 개를 속히 준비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이것들을 가지고 성(城)을 공격할 때 도구로 쓰는데, 특히 소 가죽인 생우피(生牛皮)는 성에 오를 때 뒤집어쓰고 올라가면 철환(鐵丸)이 뚫지 못하여 한 명의 군사도 다치지 않아, 왜적들과 여러 번 싸웠는데 성을 공격하는 도구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자, 임금이 직접 공급을 약속하기도 하였습니다.

왜적이 철수하면서 전쟁이 끝나는 시기의 기록에는 사시(巳時)에 전라도 순천 예교(曳橋)의 왜적이 모두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갔는데,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 보니 성중에는 우리 백성 3명과 우마(牛馬) 4필만 남아 있었다고 적고 있어 당시의 치열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전쟁이 끝난 후 경상도 암행어사가 보고하기를, 병영(兵營)의 둔전(屯田)에 소가 단지 세 마리 뿐이므로, 백성들이 논밭을 갈지 못하고 있어, 호조(戶曹)가 제주(濟州)의 관우(官牛)를 옮겨와 농사를 돕게 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제주의 소 목장에도 소가 없다고 하니, 공사(公事)를 이처럼 마련하여 민폐를 끼치게 할 수는 없다고 하교한 바가 있습니다.

426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왜란 이듬해에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구황(救荒)과 능군(陵軍)의 식량이 날로 감축되어 가고 있고, 봄에 경작하지 못하였으므로 가을이 되어도 수확할 것이 없으며, 피(稷)와 조 그리고 메밀(木麥)은 지금이라도 파종할 수 있으나 경기 열읍에 저축된 종자가 없어, 강원도에서 피와 조 그리고 메밀 각 1백 석, 충청도에서 각 3백 석, 전라도에서 각 4백 석을 수송하게 하였고, 강원·황해도의 경우는 만곡(晩穀) 종자를 배정하였는데, 소에 있어서는 경기에는 남은 것이 없어 중국에서 보낸 의주에 있는 농우 21마리를 내온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39권, 선조 26년 6월 1일 갑신 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호조가 우의정 유홍이 파종을 위한 종자와 농우 조달에 대해 장계했다고 아뢰다

호조가 아뢰었다.

"우의정 유홍(兪泓)의 장계에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구황(救荒)과 능군(陵軍)의 식량이 날로 감축되어 가고, 또 봄에 경작하지 못하였으므로 가을이 되어도 수확할 것이 없다. 피(稷)와 조 그리고 메밀[木麥]은 지금이라도 오히려 파종할 수 있으나 경기 열읍에는 이미 저축된 종자가 없으므로 전일에 강원도에서 피와 조 그리고 메밀 각 1백 석, 충청도에서 각 3백 석, 전라도에서 각 4백 석을 수송하게 하였다. 강원·황해도의 경우는 만곡(晩穀) 종자를 또 배정하였다. 소에 있어서도 경기에는 이미 남은 것이 없어 중국에서 보낸 의주에 있는 농우 21마리를 이미 내왔다.’라고 하였습니다."

【태백산사고본】 21책 39권 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