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35] 국립대학인 성균관(成均館)에서 하루에 수백 마리씩 소(牛)를 도살하였다
[417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35] 국립대학인 성균관(成均館)에서 하루에 수백 마리씩 소(牛)를 도살하였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7.15 14: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19-251호, 양력 : 7월 12일, 음력 : 6월 10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관료 후보자인 유학자 양성을 위하여 수도 한양에 설치한 국립대학을 성균관(成均館)이라 하였는데, ‘성균(成均)’이란 뜻은 아직 쓸모 있는 상태로 다듬어지지 않은 인재들을 완성시킨다는 뜻의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와 고르지 못한 풍속을 고르게 한다는 뜻인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 구절 중 첫 글자를 취해 만든 이름으로, 선현(先賢)들의 제사를 주축으로 하는 교화와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공간으로 나뉘어,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文廟), 유학을 강론하는 명륜당(明倫堂)이 주요 시설이었습니다.

성균관의 운영 재원은 국가에서 지급한 전답(田畓), 노비, 어장(漁場) 그리고 수시로 지급되는 돈, 쌀, 잡물 등으로 충당되었으나,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학전(學田)과 노비로 학전은 초기에 1,000결(結,약3백만평) 정도였으나 나중에 최고 2,600결에 까지 늘어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후에는 400결로 정도로 줄어들었으며, 노비들은 성균관 인근에 있는 반촌(泮村)에 거주하면서 문묘 제향, 유생의 식사 준비, 잡역 등에 종사하는 선상노비(選上奴婢)와 각지에 흩어져 거주하면서 성균관의 학전에서 농사를 짓거나 생업에 종사하면서 해마다 일정한 신공(身貢)을 바치는 외거노비(外居奴婢)로 구분되었습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우금정책(牛禁政策)을 실시하면서 소의 도축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였으나, 식재료는 물론 제사에 쓰이는 제수용품으로 일부 도축을 허용하는 공도(公屠)라는 제도를 운영하였는데, 이러한 소 도살 판매권을 성균관의 성인(聖人) 묘인 성묘(聖廟)에 수직(守直)하는 역을 지고 있던 노비들인 전복(典僕)들에게 일종의 보상책으로 주었고, 소고기 판매점인 도사(屠肆)를 운영하게 하였으며, 이를 현방(懸房)이라고도 하였는데, 일부 지역에서는 그 지역 관노비가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성균관 전복은 도사 당 60~80호(戶) 정도가 배정되어, 한양에만 10~40여 곳 정도가 있었으며, 지방에도 분점을 설치하였고, 수원, 광주, 강화, 개성, 전주, 동래, 원주 등에도 도사가 있었는데, 도사는 도축 외에 소에 관련된 각종 생산품인 소가죽(牛皮), 소기름(牛肪), 소뿔(牛角) 등을 판매해서 이익을 얻어, 전복들은 도사에서 나오는 소가죽에 대한 독점권을 가진 시전(市廛)인 창전(昌廛)을 경영하며, 소기름 판매도 도사에서 담당하였고, 활을 만드는 재료인 소뿔도 처음에는 군문에 상납했던 물품이었으나, 나중에는 군문이 값을 지급하면 도사에서 공급하는 방식(給價貿納)으로 변화하기도 하였습니다.

417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이러한 성균관에 대해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임금이 비망기로 전교하기를, 성균관에서 소를 도살하는 것은 모든 일에 본보기가 되어야 할 곳이 도살하는 소굴이 된 것으로 추하니, 유생과 스승들은 엄금하도록 하고, 성균관을 이러한 행위의 성역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하루에도 수십 마리 혹은 수백 마리씩이나 함부로 도살하면서 태연스럽게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사람들도 해괴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비루한 습속을 변화시키기가 너무나 어려워, 이후로는 각별히 엄금하여 한 사람의 도수(屠手)도 그곳에 용납하지 못하게 해서 정숙하고 깨끗이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151권, 선조 35년 6월 10일 경자 기사 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성균관에서 수십·수백 마리 씩 잡는 소 도살 행위를 엄금토록 하다

비망기로 전교하였다.

"성균관에서는 지금도 소를 도살하는가? 이 일은 평소 전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선 국법은 그냥 두고라도 수선(首善)의 곳이 도살하는 소굴이 되었으니 어찌 추하지 않은가. 저 유생과 그 스승들은 어찌하여 엄금하지 않는가? 내가 듣기로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그 시기가 아닐 때 꺾으면 어질지 못하다고 하였고, 옛날 사람은 창문 앞의 풀도 뽑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도리어 아무도 탓하지 못하는 성역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하루에도 수십 마리 혹은 수백 마리씩이나 함부로 도살하는데도 유사(有司)는 감히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소도 생명체로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소리와 피비린내가 신성한 곳까지 미치는데도 태연스럽게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사람들도 해괴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비루한 습속을 변화시키기가 너무나 어렵구나. 이후로는 각별히 엄금하여 한 사람의 도수(屠手)도 그곳에 용납하지 못하게 해서 반궁(泮宮)을 정숙하고 깨끗이 하도록 성균관에 말하라."

【태백산사고본】 90책 151권 3장

【주】수선(首善) : 본보기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