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63] 임금이 탄 말이 놀라 날뛰자 이를 막은 대신들의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460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63] 임금이 탄 말이 놀라 날뛰자 이를 막은 대신들의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10.0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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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79호, 양력 : 10월 1일, 음력 : 9월 3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나 군사 훈련 또는 사냥 할 때, 그 외에 능행(陵幸)을 할 때에 직접 타는 말을 어마(御馬) 또는 어승마((御乘馬)라 하였는데, 궁궐 안에 있는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관리하였으며, 시대별로 차이는 있었으나 통상 어승마 10여필, 예차(預差) 10여필, 주마(走馬)14필, 변마(邊馬) 30필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마를 타다가 임금이 말에서 떨어진 기록은 10여건으로 임금대별 중요 기록을 살펴보면, 우선, 태종(太宗)대에는 임금이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으며, 좌우를 돌아보며 사관(史官)에게 이를 알게 하지 말라고 한 바가 있으며, 또한 광주(廣州)에서 매사냥을 하고 이튿날 돌아오는데, 임금이 일찍 일어나서 파루(罷漏)를 독촉하여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등을 거느리고 광주(廣州)로 향하니, 날이 아직 밝지 아니하고,

또한 안개가 짙어서 나룻길(津路)를 잃었으며, 뱃사람(舟人)이 인도하여 주어서 건너게 되었고, 임금이 친히 활을 쏘다가 또한 말이 놀라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아니하였으며, 임금이 상왕(上王)인 태조(太祖) 임금을 받들고 해룡산(海龍山) 서동(西洞)에 머물렀을 때는, 짐승이 오니 상왕이 이를 쏘고자 하다가 말이 뛰는 바람에 상왕이 말에서 떨어진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세종(世宗)대에는 상왕인 태종 임금과 두 임금이 등산곶이(登山串) 안에 있는 강무장(講武場)에 들어가서 우현(牛峴)의 남쪽이며 달달리(達達里)의 북쪽이 되는 곳에 막차를 정하였는데, 어가가 금강평(金剛平)에 이르러, 상왕이 매를 팔에 올려서 놓아 보내다가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떨어져서 몸이 편치 아니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임금이 풍양(豊壤)에서 강무(講武)를 행하였는데, 세조가 준마(駿馬)를 타고 준급(峻急)한 언덕을 달려 내려오다가 그 형세가 그만 정지하기 어려워 말이 두어 길 언덕 아래로 떨어졌으나, 세조는 몸을 날려 말에서 빠져 나와 언덕 위에 우뚝 서니, 안장과 말은 모두 부수어졌는데,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탄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60년 전 오늘의 실록에는 임금이 모화관에서 열무(閱武)한 후 환궁하려고 말에 올라 두어 걸음쯤 갔을 때 말이 갑자기 놀라 미친 듯이 날뛰어 말을 이끌던 사람들이 모두 넘어지며 고삐를 놓쳐 버렸는데, 수십 걸음쯤을 가다가 상의 몸이 기울어 거의 떨어지려고 하였는데 선전관(宣傳官)이 말을 막아서고 다른 대신들이 임금의 몸을 안아 내렸으며, 길 왼쪽에 머물면서 의관(醫官)에게 명하여 맥을 짚어 보고 약을 바치게 하였는데, 별 상처는 없어 연(輦)을 타고 돈의문(敦義門)을 거쳐 환궁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사관(史官)은 이에 대해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나 위아래가 모두 경황이 없었으며, 임금이 길에 그대로 나앉았는데도 한참 뒤에야 비로소 장막을 치며 일산을 폈고, 주위의 잡인들이 임금 가까이까지 이르러도 금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임금은 잠저(潛邸) 때부터 말을 사랑하였고 또 말의 좋고 나쁨을 알아 행행할 때마다 질주하듯이 몰기를 좋아하여 어가(御駕)를 호종하는 문무(文武) 관원들이 허겁지겁 달려가야 했으며, 간신(諫臣)들이 그 잘못을 말하였는데도 고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낙마한 이후에 사태를 수습한 기록을 추가로 살펴보면,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평상시에 어마(御馬)를 잘 길들이지 않아 놀라 날뛰게 하였으니, 내구(內廐)와 어승(御乘)을 맡아보는 관리인 내승(內乘)들을 금부에 내려 추국하도록 건의하였으나, 임금이 그 말이 평소에는 말을 잘 들었는데 우연히 놀라 날뛴 것이니, 하옥할 것까지는 없고 추고만 하라고 하였다가 다시 건의를 따라 처리하였으며,

임금이 정원에 전교하여, 말이 놀라 날뛰어 거의 떨어질 뻔할 때, 선전관이 바로 달려와 고삐를 잡고 말을 막았으며 또한 임금의 몸을 부축하였으니, 공이 참으로 적지 않으므로 차례와 등급에 구애하지 않고 자급(資級)을 올려주는 초자(超資)를 하도록 하였고, 이외에도 임금을 안아 내린 자와 고삐를 잡은 자 등도 자급을 올려주고 상을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어마가 놀라 날뛴 일로 중국에서 잘 훈련된 말을 구해오는 일을 의논하여, 조종조에는 좋은 말이 많았는데 지금은 없으니, 북경에 가는 통사(通事)나 사신들로 하여금 각기 말을 무역하여 오게 하고, 또 말이란 적(敵)을 막는 데에도 쓰이며, 지금은 내구(內廐)에 좋은 말이 없으니, 부득이하게 구하자는 건의가 있었으나, 임금이 중국말을 무역해 오는 일은 전에도 시행했었으나 좋은 말을 구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고, 대체로 잘 달리는 말을 구하려 할 것이 아니라 잘 훈련된 말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명종실록 25권, 명종 14년 9월 3일 신미 기사 1559년 명 가정(嘉靖) 38년

모화관에서 열무하고 환궁하다가 말이 놀라 날뛰어 말에서 떨어질 뻔 하다

상이 모화관에서 열무(閱武)하였다. 환궁하려고 말에 올라 두어 걸음쯤 갔을 때 말이 갑자기 놀라 미친 듯이 날뛰어 말을 이끌던 사람들이 모두 넘어지며 고삐를 놓쳐 버렸다. 수십 걸음쯤을 가다가 상의 몸이 기울어 거의 떨어지려고 하였는데 선전관(宣傳官) 이윤덕(李潤德)이 말을 막아서고 한담(韓倓)과 조수흥(趙守興) 등이 상의 몸을 안아 내렸다. 상께서 길 왼쪽에 머물면서 의관(醫官)에게 명하여 맥을 짚어 보고 약을 바치게 하였다. 안현(安玹) 등이 문안하니, 별 상처는 없다고 답하였다. 드디어 연(輦)을 타고 돈의문(敦義門)을 거쳐 환궁하였다.

【이때에 일이 갑작스럽게 일어나 위아래가 모두 경황이 없었다. 상께서 길에 그대로 나앉았는데도 한참 뒤에야 비로소 장막을 치고 일산을 폈으며 주위의 잡인들이 임금 가까이까지 이르러도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은 잠저(潛邸) 때부터 말을 사랑하였고 또 말의 좋고 나쁨을 알았다. 행행할 때마다 질주하듯이 몰기를 좋아하여 어가(御駕)를 호종하는 문무(文武) 관원들이 허겁지겁 달려가야 했다. 간신(諫臣)들이 그 잘못을 말하였는데도 고치지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6책 25권 6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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