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 역사 속으로⑦] 해방 이후 농지개혁과 그 과정-1
[팜 역사 속으로⑦] 해방 이후 농지개혁과 그 과정-1
  • 박현욱 기자
  • 승인 2018.05.11 15:17
  • 호수 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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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조지(Henry George)가 쓴 ‘진보와 빈곤’ 출간 4년 후 조지의 사회문제 경제학 러시아판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유럽인들이 헨리 조지의 주장을 실천에 옮겨질 경우 사회 질서와 자신들의 기득권이 무너질 것이라 생각해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것을 은폐하고자 애쓰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 러시아에서는 인구의 9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헨리 조지의 이론은 러시아 인민들의 정의감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땅은 인간의 역사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끝없는 욕망추구 수단인 동시에 권력을 창출하는 근간이었다. 헨리조지의 진보와 빈곤에서는 토지의 독점적 소유로 인해 모든 부가 땅의 소유주에게 집중되면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지대가 상승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토지 공유의 필요성을 말하며 모든 지대를 조세로 징수해야 한다는 내용을 설파하면서 땅을 가진 기득권과 지주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그가 말한 토지를 둘러싼 다양한 제도의 중요성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특히 토지는 농업분야에 있어 젖줄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토지의 소유가 누구냐에 따라 한 나라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으며 토지개혁으로 국가의 부가 증대하고 국민들의 삶이 행복해지는 원동력이 됐던 사례도 있다. 농장에서 식탁까지 3~4월호는 농지법에 대한 특집을 진행한다. 이번 장에서는 해방 이후 급변했던 한국사회의 토지개혁의 역사를 살펴본다.

권력의 힘 토지, 소유와 개혁의 역사

조선시대 토지는 상위계급이라 불리는 토지소유 지도층에게는 큰 특권이었다. 농민들이 토지 소유주에게 토지를 이용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토지는 국가 소유이거나 국가로부터 하사받은 관료의 몫이었다. 농민들은 경작의 대가로 토지 소유주에게 조를 납부하면서 생활을 영위해 갔으며 왕족과 관료들은 조를 기반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조선시대 경제는 농민들이 경작한 수확물을 중심으로 통용되면서 수확물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 토지 소유 시스템을 만드는 토지제도가 왕족을 비롯해 모든 관료들의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토지 소유 여부가 그들의 권력구조를 공고히 해주고 서열관계를 가를 수 있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토지제도는 과전법을 기반으로 실시됐는데 관료들은 등급에 따라 국가로부터 땅을 하사받았다. 왕권이 확립되고 안정되면서 점차 새롭게 관료 가 되는 사람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면서 토지제도도 수차례 변화를 거듭했다. 세조의 과전법은 현직 관료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으로 바뀌었고 명종은 이마저도 폐지되고 관료들에게 녹봉만을 지급하게 됐다.

이후 유형원과 같은 실학자와 지식인들은 토지가 국가의 부와 백성들의 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데 주목하고 토지를 국유화하고 백성들에게 땅을 나눠주자는 토지 개혁론을 주장했다.

조선시대에도 농민에게 최저생계비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균전론이나 지주제의 폐해를 타파하는 다양한 혁신안이 제시됐으나 기득권의 반발로 토지제도의 개혁은 쉽게 이뤄지지 못했다.

토지의 농민 사유화는 농지 생산성에 있어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는 단초였다. 소작제에서 농민들은 생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했지만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땅을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능동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농업기술은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고 정보의 독점 역시 지주에게 집중돼 있어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되더라도 그 효과는 쉽게 실현하기는 힘들었다.

토지제도와 관련한 일대 사건은 일본 식민지시대 토지조사사업이었다. 법적으로는 근대적 토지제 확립에 기여했으나 이는 소농 몰락과 봉건적인 지주제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또한 수탈을 목적으로 진행됐으며 일본인들의 정착에 물적 토대를 이루게 해줬다. 일본은 일부 양반계층을 식민 지주로 흡수하기도 했다. 때문에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국내 토지는 급속한 소유의 과점화가 이뤄졌다.

일제 식민지 시대가 종식될 때까지 대규모 농지를 소유한 지주는 급속하게 증가해 50ha 이상 소유한 소유주의 수가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토지의 소유가 일부 계층에 집중되면서 농민의 소작도 크게 늘었다. 1910년대 전체 농가의 40%이던 소작농은 1930년대 후반에는 55%를 넘어섰고 소작농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소작농이 생산한 농산물의 최대 70% 소작료로 납부해야 됐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토지의 과점화는 농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땅의 과점화로 미활용 토지가 늘면서 토지의 활용도와 집약도가 낮아지는 결과를 불러왔다.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한 토지개혁

해방 이후 1948년 남한에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미국은 대부분의 정치권력을 사실상 독점했다. 그들은 일본이 물러난 자리를 이어받고 미군정이라 는 이름으로 우리 민중에게 미국에 유리한 모든 정책을 강요했다. 공식적으로 반공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수단 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반도라는 땅덩어리에 미국과 소련이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독특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미군정은 미국의 정책을 남한에 이식할 수 있도록 법령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미군정은 해방 후 한국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농지개혁은 미군정의 주요 정책 중 하나였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 남기고 간 토지와 재산은 미군정과 한국정부에 귀속됐는데 미군정은 헤이그 조약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소유재산을 모두 몰수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해방 직후 남한 전 국민의 77%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어 농지문제는 한반도의 최대 이슈였다. 기획재정부에서 발간한 한국의 농지개혁에 따르면 1945년 말 남한의 총 경지 223만 정보 중 65%인 145만 정보가 소작지인 상태였다. 당시 완전한 자작농은 28만4천호로 전체 농가의 14%에 불과 했다.

국민 대다수가 농민인 한국사회는 농민들의 생활이 농지 소작료로 인해 좀처럼 개선되지 못했다. 미군정은 남한의 경제가 부흥하고 그로 인해 자국의 이익이 되길 원했다. 국내 농민들의 생활개선은 미국의 입장에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또한 남한을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전진기지로도 이용하는 한편 미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수출기지로도 활용하기를 원했다.

다양한 이해관계 속에 주판알을 튕기던 미국은 남한의 지주들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식량 수입에 관해 반대 목소리를 크게 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식량수입에 반대하는 지주계급을 없애고 농민들의 투쟁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미군정은 지주계급을 약화시키는 방편의 하나로 소작료 3·1제를 실시했다. 이 법안은 소작료 비율을 낮추는 게 주요 골자다. 수곡총액의 1/3을 넘어서는 소작료를 받는 지주에게는 군사재판소에 넘겨 처벌했다. 또한 소작계약의 유효기간 중에 지주가 일방적으로 소작권을 해지할 수 없다고 명시했으며, 새로운 소작계약에서도 소작료 비율 1/3을 넘지 못하게 했다.

지주들도 이 제도를 반대할 명분이 약했다. 당시에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는 농지개혁의 요구가 드높았기 때문이다. 지주들은 농지개혁 보다는 소작료 3·1제로도 농지개혁에 준하는 효과를 볼 것이라고 선전했다. 여러 이해관계라 맞아 떨어지면서 소작료 3·1 제도가 실시됐지만 소작료 3·1제는 단순히 소작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는 농지개혁의 첫 발을 뗀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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