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70] 한양을 둘러싼 산에 송충이가 극성을 부리자 군대(坊軍)를 동원하여 잡았다
[31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70] 한양을 둘러싼 산에 송충이가 극성을 부리자 군대(坊軍)를 동원하여 잡았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10.2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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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86호, 양력 : 10월 28일, 음력 : 10월 1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왕조실록에는 농작물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해충(害蟲)에 대한 다양한 기사가 실려 있는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황충(蝗蟲)은 250여건의 기록이 나타나 있고, 충해(蟲害)에 대해 50여건, 메뚜기(螣) 40여건, 이외에 흑충(黑蟲), 청충(靑蟲)에 대한 기록도 있으며, 멸구(螟,蟊蟲)나 나방(螟螣)에 대한 기록도 여러건 실려 있습니다.

이렇게 농작물에 발생하는 벌레 외에 소나무에 발생하는 송충(松蟲)에 대한 기사도 50여건 실려 있는데, 송충이를 방제하기 위해 관리(官吏)는 물론 군대를 동원하기도 하였고, 백성들을 동원하여 일정량을 잡아 묻거나 태운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임금 대별 중요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태종(太宗)대에는 개성부(開城府) 용수산(龍首山)의 솔잎을 벌레가 먹으니, 특수 목적으로 편제한 행정구역인 방리(坊里)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잡아 묻었으며, 송충이가 송악산(松岳山)의 솔잎을 먹고, 벌레가 제릉(齊陵)의 솔잎을 먹어 명하여 잡게 하였고, 특히 송악산 골짜기의 송충이를 잡는데는 1만여명의 인력을 동원하였으며, 송충이가 종묘(宗廟) 북쪽 산과 백악(白岳)·인왕(仁王)·장의동(藏義洞)의 여러 산의 솔잎을 갉아먹으므로, 중부(中部)·동부(東部)·남부(南部)·서부(西部)·북부(北部) 등 오부(五部)의 사람들을 발(發)하여 잡게 하였습니다.

또한 벌레가 솔잎을 갉아 먹으니, 조관(朝官) 6품 이상으로 하여금 정부(丁夫)를 내게 하여 잡아서 묻도록 하였고, 제릉(齊陵)의 송충이를 잡는데, 정부(丁夫) 6백 80명을 조발(調發)하고, 유후사(留後司) 창고의 쌀을 내어 5, 6일치 양식을 내 주기도 하였으며, 이조 정랑(正郎)이 병조에 재임시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을 고하지 아니한 까닭에 핵문(劾問)을 하였고, 한양의 안암동·사한동·청량동의 송충이를 잡게 였으며, 국가에서 벌채를 금지하는 산(禁山)의 소나무에 송충이가 일어 이를 잡게도 하였습니다.

세종(世宗)대에도 병조에서 계하여, 송충이가 성 밑의 모든 산의 솔을 먹으니, 동서반(東西班)의 관리 및 방리(坊里) 사람을 동원시켜 잡아 없애도록 하였고, 송충이를 이루다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제릉(齊陵) 바깥 산을 불태웠으며, 안쪽 산은 백성을 동원하여 송충을 잡았고, 개성에 있는 태조(太祖)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던 목청전(穆淸殿) 근처 산의 솔잎을 송충이가 먹으므로 마을 장정들을 징발하여 그것을 잡게 하였습니다.

중종(中宗) 대에는 한양 근처의 소나무는 조종(祖宗) 때부터 길러온 것이나 근래 한양 10리 사이의 소나무들을 송충이가 모두 먹었고 능침의 소나무들까지도 송충이가 모두 먹었는데, 한성부가 송충이를 잡으려 해도 다 잡을 수가 없다고 하였으며, 특히 남산의 소나무는 송충이가 먹지 않았으나, 동대문 밖과 동소문 밖, 성균관 주산(主山)과 건원릉(健元陵) 근처에는 송충이가 많아 작년에는 방내(坊內)의 역군들을 풀어서 송충이를 잡았어도 다 잡을 수가 없었는데, 올해에는 유충(幼蟲)들이 아직 다 자라지 않았는데도 송충이가 많아 산 아래에 있는 큰 소나무는 갉아 먹지 않았지만 산 위에 있는 작은 소나무는 다 갉아 먹었다고 한 바가 있습니다.

이 밖에도 선조(宣祖)대에는 사직단 소나무를 송충이가 갉아 먹어 단수(壇樹)가 거의 고사(枯死)하였으며, 숙종(肅宗)대에는 송충이가 너무 극성스럽게 번져서 서쪽으로부터 동쪽에까지 원릉(園陵)과 사묘(私墓)의 다 자란 나무들이 송충이에게 껍질을 먹히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그로 인하여 말라 죽게 되어 쓸 만한 재목들이 모두 그 해(害)를 입었고, 송충이의 재해(災害)를 비는 제사를 삼각산(三角山)·백악산(白岳山)·목멱산(木覓山)·송악산(松岳山) 등 여러 산에서 거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한양 근교의 산에 송충(松蟲)이 다시 성하게 일어나, 방민(坊民)을 뽑아내어 3일을 한정으로 해서 잡게 하였는데, 3일 동안 잡은 수효가 대략 합계가 3천 9백 72석이 되었다 하며, 경복궁(景福宮) 안에 송충(松蟲)이 치열하게 발생하여 오부(五部)로 하여금 방민(坊民)을 내어 잡게 하였습니다.

한편, 영조(英祖)대에는 송충(松蟲)이 성하게 일어나서 사산(四山)의 소나무를 갉아 먹어 말라 죽은 소나무가 많자, 한성 판윤이 부민(部民)에게 송충(松蟲)을 잡아서 날마다 3승(升)씩 바치도록 하였는데, 간혹 간사한 주민이 파묻은 것을 파서 다시 바치는 폐단이 있으니, 태워 죽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자, 임금이 송충이도 생명이 있는 것이니 태워버리는 것은 너무 심하니, 다 잡게 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316년 전 오늘의 실록에는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북쪽의 백악산(白岳山),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동쪽의 타락산(駝駱山)등 사산(四山)에 송충이가 극성을 부리자, 한성부에 명령을 내려 도성안의 지역 군사인 방군(坊軍)을 징발하여 잡도록 하였습니다.

 

■숙종실록 38권, 숙종 29년 10월 1일 계유 기사 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

한성부의 방군에게 사산의 송충이를 잡도록 명하다

사산(四山)에 송충이가 극성을 부려서, 경조(京兆)에 명령을 내려 방군(坊軍)을 징발하여 잡도록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5책 38권 30장

【주】

경조(京兆) : 한성부.

사산(四山) : 한성부를 에워싸고 있는 동‧서‧남‧북의 네 산을 통틀어 이르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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