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 역사 속으로⑧] 해방 이후 농지개혁과 그 과정-2
[팜 역사 속으로⑧] 해방 이후 농지개혁과 그 과정-2
  • 박현욱 기자
  • 승인 2018.05.16 14:00
  • 호수 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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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을 둘러싼 국내외 정치상황의 변화

당시 농지개혁에 대한 정치권의 입장은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농지개혁에 적극적이고 농민운동을 주도해 온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좌익인 조선 노동당, 친일세력과 지주계급으로 구성된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이다. 민족전선과 조선 노동당은 농민들의 입장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 아래 농지개혁을 주장했던 반면 한민당은 농지개혁에 의한 무상몰수에는 반대했다.

한민당은 국가가 지주의 토지를 사들이면 농지개혁 없이도 농지의 분배가 이뤄질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지주의 토지 수익을 공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보장해 달라고 주장했다. 토지분배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겠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웠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무상몰수는 재산의 반환 즉, 지금까지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라는 소리와 진배없었다.

1946년 북한이 토지개혁을 실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북한도 총 지주의 4%가 북한 전체 면적의 60%에 가까운 땅을 소유할 정도로 토지의 과점화가 심화돼 있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1946년 2월말에 개최된 북조선 농민대표대회에서 토지개혁에 대한 최종안을 확정하고 모든 소작지를 지주에게서 무상몰수한 다음 소유권 자체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 법령을 통과시켰다.

북한이 과격한 대규모 저항 없이 토지 개혁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주들이 조직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기반이 취약해졌던 이유도 있었지만 소련군 주둔으로 인해 단단하고 촘촘해진 공산주의 세력을 와해시킬만한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남한으로의 이주라는 탈출구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면서 농지개혁에 대한 저항 모멘텀을 분산시켰고 해방 후 소련과 미국이라는 냉전시대 갈등 소산으로 급진적인 농지개혁 바람을 거스르기 쉽지 않았다.

북한의 급진적 농지개혁으로 소작농들이 힘을 얻고 이들은 북한에 공산당이 집권하는데 몸집을 불리며 정치세력화됐다. 농민들은 사회주의 세력과 결합하면서 성장해 북한 농촌사회 농지개혁의 선봉장이 됐다. 결과적으로 농지개혁은 북한에 공산당이 안정적으로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셈이 됐다.

중국에서도 비슷한 시기 중국 재건을 둘러싸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장제스를 필두로 한 국민당은 미국 원조 하에 마오쩌둥으로 대변되는 중국 공산당과 힘을 겨루고 있었다. 양측은 내전은 피하고 평화로운 신중국 건설에 합의 했지만 군사력 우위에 있던 장제스가 일방적으로 협정을 파기하면서 1946년 본격적인 대결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중공군은 처음 힘에서 밀렸지만 농지개혁을 추진하면서 정치적 군사적 기반을 닦았다. 국공내전이 진행되면서 중공군은 지주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일반 농민에게 나눠주면서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미국 원조를 받는 국민당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공산당은 농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국민정부를 타이완으로 몰아내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유상매수·유상분배’ 농지개혁법 실시

북한, 중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은 농지개혁이 냉전시대 세력을 확장하는 도구의 하나로 이용됐음을 보여줬다. 지주로부터 해방이라는 거창한 구호가 소작농을 해방하고 농민 소득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어떤 면에서 볼 때 정치적으로 이용된 셈이 됐다.

이에 미국은 공산주의 세력 확장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남한에서의 농지개혁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농지개혁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미군정은 토지개혁법 통과를 위해 한민당을 압박했지만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민당으로써는 달갑지 않아 했다. 한민당은 미군정의 개혁법 을 질질 끌면서 보이콧했고 미군정은 결국 일본으로부터 몰수한 토지부터 기존 소작인에게 매각했다.

이후 우익진영으로 국회가 구성되고 이승만 단독정부가 수립됐다. 미국 자본과 결탁했던 이승만과 미군정, 북한발 농지개혁으로부터 불어온 일반 농민들의 농지개혁법 제정 열망, 친일 지주의 도덕적 문제로 인한 권력약화 등 모든 상황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농지개혁이 실행되기에 이른다.

지주를 대변하는 한민당이 맘에 들지 않았던 이승만은 초기 내각에 한민당을 배제하면서 둘 사이에 골이 깊어졌다. 진보적 인사인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면서 개혁적인 안을 제시하는 듯 했지만 지주들에게 유리한 유상매수 유상분배 원칙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은 한민당이 다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부가 안을 제시해도 통과시키지 않거나 반려하는 등 수차례 정부와의 줄다리기를 지속했다.

결국 1950년 분배 대상 농지 규모 3정보 이상, 보상 지가 15할, 보상방식 5년 균분(연3할) 상한지가 15할, 상환방식 5년 균분(연3할)으로 협의, 통과됐다. 이렇게 확정된 농지개혁법은 좌익세력이나 농민들에게는 아쉽기는 하지만 전근대적인 반봉건적 지주제를 정부가 개입해 강제로 해체시킨 역사적 사건이 됐다.

농지개혁의 성과 ‘스타트라인의 평등’

농지개혁은 잉여 농지를 배분하면서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장점, 그리고 농민 스스로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해 농산물 품질을 끌어올리거나 자신 소유의 땅에 양질의 투입물을 투자하면서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토지개혁 후 우리나라는 영세한 농지소유구조로 전환됐다. 한국의 자영농들은 당시 기술적인 한계로 최신 정보에 소외될 수밖에 없었고 농지개혁법은 토지를 담보로 대출이 불가능해 농업을 위한 투자조차 할 수 없었다. 정부에서도 농촌 기반시설을 증축하거나 품종 개량 등 기술지원을 할 수 있는 역량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농지개혁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농지개혁으로 소작농에서 자영농으로의 전환은 성공적이었으나 영세한 자영농은 대지주들과 달리 자신이 수확한 농산물의 일부를 농업 투자를 위해 쓰기 힘든 측면이 있었다. 입에 풀칠하는 수준의 경제력으로는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농업생산성을 올릴만한 여력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농지개혁 후 한국전쟁 발발로 농민이 전쟁비용 조달창구로 활용되면서 새롭게 도입된 세금을 농민이 떠안는 상황이 연출됐다. 농민의 삶은 극도로 악화됐으며 농산물 생산 증대를 통한 농가소득 증진은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해 쉽게 도달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농지개혁은 결론적으로는 짧은 기간 동안 반봉건적 소작 제도 및 지주 제도를 철폐했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개혁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농지개혁을 바탕으로 인적자본의 급속한 확대를 꾀할 수 있어 산업화를 진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게 한국의 농지개혁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과 교육개혁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둘 사이의 시너지가 빛을 발하면서 성공적인 산업화의 단초가 됐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해소되면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이 같은 스타트 라인에 서게 됐고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교육 받은 인적자원 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일부를 제외하면 특별히 기득권이라 불릴만한 존재가 없었다. 특히 공직자 선발의 투명성과 훌륭한 인적자원 덕분에 우리나라는 성공신화와 같은 산업화의 길을 갈 수 있게 된 밑바탕을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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