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74] 여의도(汝矣島)는 원래 돼지와 양을 방목하여 가축을 기르던 곳 이었다
[547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74] 여의도(汝矣島)는 원래 돼지와 양을 방목하여 가축을 기르던 곳 이었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11.11 11: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19-289호, 양력 : 11월 11일, 음력 : 10월 15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에 한강에 있는 여의도(汝矣島)에 대한 기록은 중종(中宗)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지금의 밤섬인 율도(栗島)와 함께 잉화도(仍火島)라는 명칭으로 언급되어 있으며, 서강(西江) 남쪽에 있고 목축장이 있는데, 사축서(司畜署)와 전생서(典牲署)의 관원 각각 1명씩을 보내어 목축을 감독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또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펴낸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여의도로 지칭되며, 율도의 서쪽에 있는데 전생서의 외고(外庫)가 설치되어 있고 양(羊)을 놓아기르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여의도에 관한 실록의 기사는 10여건 내외로 주로 가축 사육에 관한 내역이 주이며, 임금대별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우선 세종(世宗)대에는 예조(禮曹)에서 예빈시(禮賓寺)의 보고에 의거하여, 양, 돼지, 닭, 오리, 당기러기(唐雁) 등은 전에는 홍제원동(洪濟院洞)에 있는 수연(水碾)과 서강(西江)에 있는 잉화도(仍火島)등에서 나누어 길렀는데, 임시직 벼슬인 권지직장(權知直長)을 정해 보내어 감독하여 기르게 하였으나, 마음을 써서 먹여 기르지 아니하여 양과 돼지가 날로 파리하기만 하니, 수초(水草) 좋은 곳에다가 전구서(典廐署)의 전례에 의하여, 관청을 짓고 본시(本寺) 관리를 나누어 보내서 감독하여 기르게 하도록 건의하자 그대로 따른 바가 있습니다.

또한 이조(吏曹)에서 보고하여, 경기도 고양 목장 감직(高陽牧場監直) 두 사람을 혁파(革罷)하고, 거기에 기르던 희생(犧牲)은 전구서(典廐署)에 이속(移屬)하며, 본서(本署)에는 하급 행정실무를 맡는 녹사(錄事) 두 사람을 더 두되, 직계(職階)는 5부 녹사의 위에 있게 하고, 잉화도 감목 제거(仍火島監牧提擧) 한 사람, 수강궁직(壽康宮直) 한 사람을 혁파하여, 일이 많은 선공감(繕工監)에는 부녹사(副錄事) 두 사람을 더 두고, 직계는 예빈시(禮賓寺) 부녹사 밑에 있게 하도록 한 바도 있습니다.

명종(明宗)대에는 간원(諫院)이 보고하기를, 잉화도(仍火島)는 양화진(楊花津)과 율도(栗島) 사이에 있는 별도의 구역으로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돼지와 양을 방목하여 가축을 기르는 곳으로 만들어 전생서(典牲署)와 사축서(司畜署)의 관원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여왔는데, 그 관서의 노복(奴僕)들인 전복(典僕)들이 관원에게 지공할 돼지와 양을 기르는 일 때문에 그 섬에 집을 짓고 살고 있으며, 그들의 풍속이 족친(族親)끼리 서로 혼인을 하여 사촌이나 오촌도 피하지 않는가 하면 홀아비나 과부가 있으면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다른 곳으로 보내어 결혼시키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같이 살면서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고 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풍습은 대개 섬의 사면이 모두 물이고 인접한 마을이 없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이 미치지 않기 때문으로, 출입하기 위해 물을 건널 적에 예사로 물이 깊으면 벗고 얕으면 걷고 건너는가 하면 남자는 끌고 여자는 붙들고 가는데, 그들의 추잡한 행실은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따라서 섬의 인가(人家)를 모두 철거하여 본서(本署) 근처로 이주시키고, 만약 남녀가 전처럼 섬에 출입하는 자가 있으면 무거운 율(律)에 따라 좌죄시키고, 관원에게 지공하는 것과 가축을 기르는 일은 일체 남자가 하게 하여 추잡한 폐단을 근절시킬 필요가 있다고 건의하자, 임금이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한 바가 있습니다.

547년 전 오늘의 실록에는 호조(戶曹)에서 보고하기를, 이전에는 전생서(典牲署)의 염소를 반은 잉화도(仍火島)에 놓아길렀으나 금년은 비가 많이 와서 섬 전체가 모래로 덮이어 염소에게 먹일 풀이 없으니, 청컨대 풀이 무성할 때까지 본사(本司)에서 합치어 기르게 하도록 하자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성종실록 23권, 성종 3년 10월 15일 무인 기사 1472년 명 성화(成化) 8년

호조에서 전생서의 염소를 기르는 것에 대해 아뢰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이전에는 전생서(典牲署)의 염소를 반은 잉화도(仍火島)에 놓아 길렀으나 금년은 비가 많이 와서 섬 전체가 모래로 덮이어 염소에게 먹일 풀이 없으니, 청컨대 풀이 무성할 때까지 본사(本司)에서 합치어 기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4책 23권 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