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76] 중국에 말을 보내면서 압록강에서 사람과 말이 익사(溺死)하자 죄를 주었다
[610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76] 중국에 말을 보내면서 압록강에서 사람과 말이 익사(溺死)하자 죄를 주었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11.1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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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91호, 양력 : 11월 18일, 음력 : 10월 22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초기 중국에 진헌(進獻)할 말을 모으기 위해 임시로 두었던 관청을 관마색(官馬色)이라 하였는데, 당시 조정(朝廷)에서는 정식 관청에서 담당하지 못하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설치한 조직에 ‘색(色)’이란 명칭을 쓴 것으로 보이며, 대표적인 것이 왕실의 혼례식을 주관하던 임시 관청인 가례도감(嘉禮都監)과 더불어 가례색(嘉禮色), 가례청(嘉禮廳)이라는 말이 쓰인 바가 있고, 궁궐 내의 정원을 관리하고 과채(果菜), 화초(花草)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서를 동산색(東山色)으로 부른 바가 있습니다.

실록에 관마색에 관한 기록은 20여건으로 주로 태종(太宗)대에서 세종(世宗)대 까지 기록이 대부분으로, 우선 태종대에는 통역을 담당하는 통사(通事)를 보내어 먼저 말 5백 필을 끌고 요동(遼東)에 가게 하였는데, 관마색 제조(官馬色提調)가 된 판삼군(判三軍), 총제(摠制) 등이 전라도·경상도에서 바친 좋은 말을 친한 사람의 나쁜 말과 바꾸었던 것으로 적고 있으며,

경덕궁에서 사신(使臣)에게 잔치를 베풀면서 좌정승 등이 바꾸는 말을 4백 필을 더 바친다고 하자, 사신이 지금 가지고 온 말 값은 6천 4백 80필의 값뿐이니, 요동(遼東)에 돌아가서 주문(奏聞)하여 말 값을 더 보내겠다고 한 바가 있고, 이에 대해 임금이 관마색(官馬色) 관원을 불러 말 값의 수(數)를 물으니, 7천 필이라고 하였다가 6천 4백 80필의 값이라고 하자, 임금이 계산이 틀린 것에 노하였으나 죄는 가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세종 대에는 임금이 세 의정(議政)과 육조(六曹)을 불러 황제의 명을 맞이할 때에 어떤 의복을 입겠는가를 의논하면서, 즉시 관마색(官馬色)을 설치하고, 좌·우 의정(左右議政)과 종친(宗親)의 일을 담당하던 돈녕부(敦寧府)의 정1품 관직인 영돈녕(領敦寧), 병조 판서, 인수부 윤(仁壽府尹)으로 제조(提調)를 삼았으며, 관마색 제조(官馬色提調)에게 임금이 내려주는 술인 선온(宣醞)을 보내기도 하고, 친히 관마색(官馬色)에서 뽑은 중국에 보낼 말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진헌 관마색이 평안도 점마 별감(點馬別監)의 관문(關文)에 의하여, 세 번째 운송된 말들이 압록강을 지날 때에, 사람과 말이 익사(溺死)한 자가 있었는데, 그것을 미리 상고하여 살피지 못한 감고(監考)·차사원(差使員)과 수로(水路)를 살피지 못한 사공 등을 법률에 의하여 죄줄 것을 청하자, 계한 바와 같이 시행하고, 그 익사한 자는 선군(船軍)이 익사한 예와 같이 장사를 돕게 하라고 한 바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중국에 파견된 사신의 행로 중 구련성(九連城)에서 요동(遼東)까지 여덟 군데에 설치된 역참(驛站)인 동팔참(東八站) 길가에 풀이 불에 다 타버렸기 때문에 말 먹이기가 어렵게 되어, 평안도 차관(平安道差官)에게 명하여, 군인 3백명을 거느리고 먼저 동팔참(東八站)에 가서 풀을 베어서 노변(路邊)의 마필 숙소에 쌓아 두었다가, 임시(臨時)에 나누어 먹이도록 하기도 하였고, 관마색(官馬色)을 설치하면서 중외(中外)의 각품(各品)으로 하여금 말(馬)을 차등 있게 내게 하되 5천 필을 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관마색에서 진헌할 마필의 등급 기준을 정미년(丁未年)의 예(例)에 따라 중마(中馬) 상등(上等)은 높이 4척 7푼, 중등(中等)은 4척, 하등(下等)은 3척 9촌 3푼이고, 소마(小馬) 상등(上等)은 3척 8촌 6푼, 중등(中等)은 3척 7촌 9푼, 하등(下等)은 3척 7촌 2푼으로 정식(定式)을 삼게 하자고 하자 그대로 따르기도 하였습니다.

610년 전 오늘의 실록에는 진헌 관마색(進獻官馬色)을 두어 중외(中外)의 각 품(品)으로 하여금 말을 내게 하되 차등 있게 하면서, 임금이 조정(朝廷)에서 바꾸는 말을 반드시 내년 정월 안으로 진헌(進獻)을 끝내야 한다고 명하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제주 경차관(濟州敬差官)을 삼아, 사의(事宜)를 헤아려 군민(軍民) 가호(家戶)의 말을 쇄출(刷出)하게 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10월 22일 경신 기사 1409년 명 영락(永樂) 7년

진헌 관마색을 두고, 중외의 관원에게 말을 바치도록 하다

진헌 관마색(進獻官馬色)을 두어 이천우(李天祐)·김남수(金南秀)·설미수(偰眉壽)·윤사수(尹思修)로 제조(提調)를 삼고, 중외(中外)의 각 품(品)으로 하여금 말을 내게 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임금이 의정부(議政府)에 명하기를,

"조정(朝廷)에서 바꾸는 말을 반드시 내년 정월 안으로 진헌(進獻)을 끝내야 한다." 하였다. 호조 참의(戶曹參議) 조원(趙源)으로 제주 경차관(濟州敬差官)을 삼아, 사의(事宜)를 헤아려 군민(軍民) 가호(家戶)의 말을 쇄출(刷出)하게 하였으니, 정부(政府)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7책 18권 3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