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77] 우역(牛疫)이 심하다는 이유로 도살장을 파하고 단속을 엄하게 하였다
[349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77] 우역(牛疫)이 심하다는 이유로 도살장을 파하고 단속을 엄하게 하였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11.20 0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19-292호, 양력 : 11월 20일, 음력 : 10월 24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왕조실록에 가축 도살(屠殺)에 관한 기사는 300여건으로 대부분 마소(牛馬) 도축(屠畜)에 관한 내용이며 그중에는 도살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주(主)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과는 별도로 도살장(屠殺場)에 관한 기사는 조선 중기 이후에 우역(牛疫)이 심했던 현종(顯宗)대와 영조(英祖) 대에 20여건의 기사가 실려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현종(顯宗)대에는 사헌부 집의(執義), 지평(持平)등이 우역(牛疫)이 심한 것을 이유로 도살장을 혁파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당시 의정부(議政府)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라고 명한 바가 있으며, 그 상황을 경상감사(慶尙監司)가 치계(馳啓)하기를, 우도(右道)의 각 고을은 기근이 더욱 심하여 닭·개를 죄다 잡아먹고 또 마소까지 잡아먹고 있는데 사람마다 도살장이 없이 직접 도살하고 있으며, 형세의 급함이 서로 잡아먹기 직전이고 심지어는 굶주린 창자에 고기를 먹자 설사병이 갑자기 일어나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는데, 애초에 마소가 없는 자는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시장의 가격은 겉보리 한 말로 거친 무명 너 댓 단(端)과 바꾸기까지 하고 있으나, 보리를 가진 사람이 전혀 없고, 좌도(左道)의 각 고을은 우역(牛疫)이 크게 치열한데 저절로 죽은 것의 고기는 혹 사람에게 해로울까 염려하여 파묻게 하고 있으며, 그러면 굶주린 백성들이 밤을 틈타 파내어 먹고는 죽은 자가 매우 많으며, 각 고을의 굶주린 백성이 날마다 구름처럼 모이고 있으나, 진휼할 밑거리가 이미 떨어져서 보리죽을 먹이고 있어 구제되기를 바라기 어려운데 여역(癘疫), 이질(痢疾)이 전염되면 즉시 죽고 있는 실정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대사간(大司諫) 등이 보고하기를, 고을에서 소를 잡아 파는 것은 법에 어긋난 짓인데다 더구나 지금 우역으로 소가 거의 다 죽었으니, 기근 끝에 백성이 경작할 희망이 없으며, 도신(道臣)이 계청(啓請)하여 점포를 설치한 것은 본디 진휼의 밑거리를 위해서이지만, 폐단이 점점 더 퍼져 도살을 마구하고 있으므로 남아 있는 소도 다 푸주로 끌려가니, 경기 각 고을의 점포를 낱낱이 금지하도록 하자 그대로 따른 바가 있습니다.

한편, 영조(英祖) 대에는 임금이 하교하기를, 봄갈이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우유를 넣어 끓인 낙죽(酪粥)을 올리지 말라고 하면서. 그 소는 본 고을로 내려 보내어 봄갈이에 사용하도록 하고, 막 젖을 짰던 소를 도살장에 보내면 안 되는 것이니, 당일에 봄갈이에 사용할 소로 내려 보내도록 내국(內局)에 보고할 것을 경기 감영에 분부하도록 하도록 한 바가 있습니다.

349년 전 오늘의 실록에는 병조 판서가 우역이 심하다는 이유로 도살장을 파하고 단속을 엄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10월 24일 무신 기사 1670년 청 강희(康熙) 9년

병조 판서 김좌명이 도살장 혁파를 아뢰니 따르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우역이 심하다는 이유로 도살장을 파하고 단속을 엄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형조 판서 정지화가 속죄의 재물을 징수하지 말고 삼차의 형을 베풀어 중법으로 금할 것을 청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형을 삼차에 걸쳐 가하면 생명을 잃을까 염려되고 돈만 받고 죄를 용서해 주면 금령이 반드시 해이될 것이니, 엄형 한 차례로서 금령을 범한 죄를 징계하고 또 속죄의 재물을 내게 하여서 전가 사변의 율을 대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4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