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 역사 속으로13] 굴곡진 한우사육의 근현대사1
[팜 역사 속으로13] 굴곡진 한우사육의 근현대사1
  • 옥미영 기자
  • 승인 2018.06.2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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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한우파동의 시련이 불다

“소를 키우시오.”

운반 및 이동, 일소로서의 용도가 다한 한우가 비육우로 변화하면서 동시에 우리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향상되고 육류 소비가 증가하면서 정부도 이에 빠르게 대응했다. 먼저 정부는 증가하는 쇠고기 소비에 비해 국내 소 사육기반은 취약해 쇠고기 공급부족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1976년 첫 쇠고기 수입을 시작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만성적으로 부족한 축산물 생산을 주곡작물에 복합시켜보자는 발상에서 1982년 ‘복합영농’을 추진키로 했고, 이 가운데 대표적인 정책이 ‘소 입식자금 지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과욕에 있었다. 정부는 축산진흥을 위해 67년부터 한우입식사업을 추진했지만, 80년대 들어 의욕에 넘친 나머지 소 입식자금을 크게 확대하는 등 단기간에 지원규모를 확대하면서 자금 규모가 82년 289억원, 83년에는 무려 873억원까지 늘어났다.

한우입식사업은 암송아지를 구입해 새끼를 낳을 때까지 농가가 팔지 않는 조건으로 일반 축산농가는 마리당 50만원, 소만 키우는 전업농가에는 30만원씩을 3년 거치 2년 분할상환조건으로 축산진흥기금에서 지원했다.

당시 소값이 크게 오르면서 농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농사를 지으며 함께 소를 기르고자하는 사육의욕이 왕성해진데다 정부의 소 사육장려정책까지 겹쳐 소 사육농가는 82년 전체농가의 45% 수준이었으나 85년에는 전체농가의 57%까지 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엔 지금과 달리 ‘질’보다는 ‘양’을 중시했기 때문에 육량이 많은 외국품종인 심멘탈, 헤어포드, 샤로레와 같은 외국산 소가 수입됐으며 소 입식자금 지원 시기와 같은 81~83년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소 값 하락에 사라진 푸른 꿈’. 동아일보 84년 8월 22일자. 84~84년 소 값 파동으로 전국 각 산지에 일구어놓은 초지가 부실초지로 버려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초지조성허가를 얻은 농가들은 소 값 폭락으로 대부분 목장경영을 포기해 떠나버려 전국에서 빈초지가 늘어나 황폐화가 가속화됐었다.
‘소 값 하락에 사라진 푸른 꿈’. 동아일보 84년 8월 22일자. 84~84년 소 값 파동으로 전국 각 산지에 일구어놓은 초지가 부실초지로 버려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초지조성허가를 얻은 농가들은 소 값 폭락으로 대부분 목장경영을 포기해 떠나버려 전국에서 빈초지가 늘어나 황폐화가 가속화됐었다.

통계에 따르면 83~84년 2년 동안만 외국산 생우 7만4000마리가 수입됐다. 여기에 57만 마리분에 달하는 수입산 쇠고기까지 공급과잉을 초래하며 소 파동에 불을 지폈다. 80년 136만마리에 불과했던 한우마릿수가 84년 무려 두 배 가까이 불어 231만두까지 늘었고, 85년에는 250만두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170만원을 호가했던 큰 암소 값과 110만원까지 갔던 암송아지가격은 85년 각각 80만원과 20만원대로 폭락하는 사 태가 빚어졌다.

농림수산부는 부랴부랴 소 값 안정을 위해 ▲생우 28만1000마리 수매 ▲83~84년 소 입식농가에 대한 각종지원 중단 ▲85년 5월 쇠고기 수입 전면 중단 ▲암소도축연령폐지 등 84년부터 87년까지 4년간 10여 개의 대책을 쏟아 냈다. 여기에 소요된 자금만 모두 3412억원에 달했다.

소 값 파동으로 인해 우리 정부가 실시한 생우와 쇠고기 수입 전면 중단 조치는 결국 쇠고기 수출국들과의 합의하지 못하고 GATT에 제소되어 분쟁 해결을 위한 패널 설치로 이어졌고 이후 93년까지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주요 쇠고기 수출국가들과의 다자 및 양자간 쇠고기 협상이 각각 10차례와 15차례 진행됐다.

국내에서는 가격 하락세가 3년간 지속되면서 축산농가들은 ‘살인농정 철폐’ 등의 현수막과 소를 앞세워 정부의 축산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고, 소 값 파동은 1986년 최초의 부채대책이 포함된 농어촌종합대책이 나오게 된 계기가 됐다.

제2차 소 값 파동과 외환위기의 파고…1990년대

소 값 파동의 혹독한 수업료를 치러야했던 한우농가들은 수년간 번식 의향이 되살아나지 않으면서 한우사육두수는 88년 155만두로 최저점을 찍은 뒤 이후 공급물량 부족에 따라 산지 송아지가격이 서서히 오르면서 회복기에 접어든다.

더불어 1990년대는 1993년 UR 협상 타결로 본격적인 시장개방 이 시작된 가운데 한우가 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품질고급화 등 차별화 사업이 본격화한 시기였다. 특히 국민들의 소득증가에 따라 한우고기 소비 시장의 성장 잠재력과 실제 소비량도 2배 이상 늘어나는 등 도약의 시기이기도 했다.

1992년에는 현재까지 축산업 정책 중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는 소도체 등급기준이 제정되어 시범 실시됐다. 쇠고기 등급제는 이듬해 고급육 출하장려금 지급 시행은 물론 소비시장에서의 안착과 맞물려 한우의 품질고급화를 빠르게 촉진시켜 나갔다.

1980년대 지역명을 따거나 사료에 첨가제를 섞은 초기수준의 한우 브랜드는 90년대 거세를 통한 한우고기의 차별화가 본격화되면서 브랜드의 성장기를 맞아 지역의 농·축협과 시·군단위에 이르기까지 ‘한우의 브랜드화’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근육 내 마블링을 침착시키는 근내지방도는 한우 품질고급화와 수입육과의 차별화로 인식되면서 1+등급 세분화 요구로 이어졌고, 1997년에는 육질 1+등급(No. 6,7번 신설)을 신설하기에 이른다. 수입육 시장도 90년대 들어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80년대와 달리 호주와 미국에서는 풀을 먹여 키운 소에 대한 한국 소비자들의 기호성이 낮은 점을 감안해, 90년대 들어 Feed Lot(피드랏)에서 비육 후기 별도로 곡물을 비육해 키운 소를 들여오면서, 85년 5톤에도 미치지 못했던 수입쇠고기는 95년 무려 146만톤까 지 늘어 쇠고기 자급의 절반이상을 충당하게 됐다.

한편, 한우의 품질고급화와 각종 판매망 확충으로 동반 상승하던 한우사육두수와 가격은 급기야 95년 260만두까지 늘었으며 이 가운데서도 수송아지 가격은 190만원을 기록하는 등 사상 최고 가격을 경신했다.

위태로운 고공세를 이어가던 사육두수와 가격에 대한 신호가 지속되면서 80년대 소 파동이 재현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는 가운 데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됐다.

96년 전년대비 소 값이 30%가까이 하락해 250만원 수준까지 하락하면서 정부는 또다시 ‘수매’ 카드를 꺼내 들었다. 96년부터 98년까지 이뤄졌던 소 수매사업은 당시에 일시적으로 가격 회복에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수매된 물량을 보관할 수 있는 기간이 길지 않은데다 장기간 보관할 경우 품질이 저하되는 문제로 다시 시중에 나오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첫 2년 동안은 수소만 수매해 왔으나 산지 소 값이 회복되지 않자 1998년 7월부터는 암소까지 수매 대상에 포함해 시행했다.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1999년 9월 전국한우협회 창립총회 모습. 김종필 국무총리, 김성훈 농림부장관, 강성원 한우협회 창립추진위원장, 이규석 초대회장을 비롯한 전국의 한우농가 5천여명이 참석했다.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1999년 9월 전국한우협회 창립총회 모습. 김종필 국무총리, 김성훈 농림부장관, 강성원 한우협회 창립추진위원장, 이규석 초대회장을 비롯한 전국의 한우농가 5천여명이 참석했다.

한우사육농가의 소득 보장을 골자로 한 한우산업종합발전대책이 나온 것도 이시기다. 농림부는 97년 7월 번식농가의 소득 보장을 위한 송아지생산안정제 도입과 고급육 생산 농가에 대한 마리당 5만원의 거세장려금 지급, 농촌진흥청에 한우연구소 설치, 한우 전업농 1만 농가 육성을 골자로 한 한우산업발전대책을 발표했다.

정부 대책은 2001년 쇠고기 및 생우 시장 개방에 대응한 한우산업 발전과 농가 보호를 위해 계획됐지만 97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외환위기는 축산업계와 한우산업을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빠뜨렸다.

사료용 원료의 90%를 해외에서 조달하던 현실에서 800~900원대를 유지하던 달러 환율이 2천원대에 육박하면서 1998년 국내 사료용 곡물 도착가격은 1996년 대비 2배 가까이 급등했고, 배합사료 가격도 덩달아 2배로 뛰었다.

가격 상승 뿐 만이 아니었다. 당시 외환보유고 바닥으로 달러를 구하지 못한 배합사료업계는 축산농가에 사료를 원활하게 공급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으며, 결국 농가와 외상거래 중단을 선언하는 사태까지 이어졌다.

오랜 기간 사육두수 과잉의 상황에서 경영적자에 허덕였던 한우농가들은 2001년 생우 및 쇠고기 시장 개방을 앞두고 불안감이 엄습하는 상황에서 외환위기에 따른 사료 가격 급등과 사료 품귀 현상까지 겹쳐 사육을 지속할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너나할 것 없이 소를 출하하면서 결국 홍수출하로 이어졌고 한우산업은 붕괴 직전까지 내몰리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외환위기와 쇠고기 시장 개방의 위기가 엄습하며 홍수출하와 암 소도축률의 급격한 증가로 한우사육두수는 90년대 말 200만두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그간 소 사육기반 확대와 쇠고기 자급률 확보를 위한 정부와 농가의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것 이다.

불안한 한우산업 속에서 한우농가들은 스스로 뭉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위기감과 자생의 의지가 싹텄고, 마침내 1999년 9월 축산단체로는 막내격인 ‘전국한우협회’가 태동했다.

농민단체를 압력단체의 하나로 구분했던 정부는 축산업의 핵심 이자, 농민수가 급감하기는 했으나 가장 세가 많은 한우농가들의 결집을 반대하며 협회 설립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전국 도지회와 시군지 부까지 조직화한 한우농가들의 구심체가 마침내 탄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