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89] 임금이 물새와 곰, 돼지를 잡아서 바치도록 하자 이를 못하게 하였다
[53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89] 임금이 물새와 곰, 돼지를 잡아서 바치도록 하자 이를 못하게 하였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20.01.0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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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04호, 양력 : 1월86일, 음력 : 12월 14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왕조실록에 곰(熊)에 관한 기사는 150여건으로, 사냥이나 곰의 가죽, 곰의 쓸개(熊膽)등에 관한 내용이 많으며, 통상 곰은 힘이 세고 양(陽)에 속하는 짐승으로 이 같은 속성을 비유하거나, 오랑캐인 야인(野人)들의 품성을 표현할 때 인용되었고, 기사 건수로는 공물 목록을 적은 지리지(地理志)를 포함한 세종(世宗)대의 기사가 40여건으로 가장 많으며, 그 외에 임금대별로 고르게 실려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까지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태조(太祖) 대에는 곰 새끼를 바치는 사람이 있어 후원(後苑)에서 기르게 한 바가 있으며, 태종(太宗)대에는 여진(女眞)의 대추장(大酋長)이 사람을 보내어 웅피(熊皮)와 녹피(鹿皮) 1장(張)씩을 바친 기록이 있고, 지금의 황해도인 풍해도 곡산(谷山) 사람이 곰 새끼(熊兒)를 잡아 바치자, 임금이 받지 아니하면서 이 짐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바가 있습니다.

세종 대에는 병조(兵曹)에 전교하여, 강원도 강릉부 방림(方林)·홍계역(洪溪驛) 등지에 있는 강무장(講武場) 안에서 사람이 살 만한 땅에는 백성들이 거주하고 농사짓는 것을 허락하되, 노루, 사슴 외에 곰, 멧돼지, 호랑이, 표범 등은 잡는 것을 금하지 말게 하였고, 여진족(女眞族)의 사신을 접대하고 유숙시키던 객관(客館)인 북평관에서 예조(禮曹)에 야인들의 지리와 혼례풍습, 상례풍습을 보고하면서, 대체로 본토의 소산은 노루, 사슴이 많고, 곰, 호랑이, 스라소니인 토표(土豹), 담비인 돈피(貂鼠)가 그 다음으로, 소와 말은 사철로 항상 초야(草野)에다 놓아먹이고, 오직 타는 말은 꼴과 콩을 먹이는데, 꼴과 콩이 결핍되었다면 노루, 사슴 고기를 썰은 것과 물고기를 먹이는 것으로 나타나있습니다.

문종(文宗)대에는 중국에 진헌(進獻)하는 표피(豹皮)·수달피(水獺皮)와 일본(日本)에 내려 보내는 호피(虎皮)를 반드시 머리와 꼬리와 4발(四足)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것만 바치고, 그 밖에 노루·사슴·곰과 산달피(山獺皮)도 완전하게 갖추어진 것을 바쳐야 하니, 각 고을에서는 갖추어 장만하기도 어렵고 값이 비싸 사기도 어려워, 그 폐단이 작지 않으니, 진헌(進獻)하거나 사송(賜送)하는 이외에는 완전히 갖추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모두 수납(收納)하게 한 바가 있으며, 세조(世祖)대에는 임금이 경기도 영평(永平) 보장산(寶藏山)에 이르러 사냥을 구경하고, 사슴 60마리, 곰 한 마리를 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종(成宗)대에는 장수였던 계성군(鷄城君)이 곰에게 움켜 잡혔는데, 외국인으로 귀화한 향화인(向化人)이 활을 쏘아서 풀게 하자, 임금이 명주로 만든 겨울옷인 주유의(紬襦衣) 1령(領)을 하사하고, 왕실의 신변보호를 위한 친위부대인 겸사복(兼司僕)을 제수하였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보고하기를, 평안도 강변 여러 고을에 생쥐(鼷鼠)와 곰·멧돼지가 곡식을 거의 다 먹어버려 농사가 실패하여, 초가을에 면포(綿布) 한 필이 쌀 6, 7말(斗)의 값이 되었는데 지금은 쌀 두 말 값이라고 하며, 군사들이 면포를 가지고 가더라도 백성이 가진 곡식이 없어 양식을 준비하기 어렵다고 한 바가 있습니다.

연산군(燕山君)대에는 경기 관찰사에게 전교하여, 약에 쓸 곰은 민폐를 끼치지 말고 잡아서, 큰 것은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쪼개어 가닥(條)을 만들고, 작은 놈은 전체를 얼음에 채우고 그 가죽을 이어서 봉진하라고 한 바가 있고, 사신(史臣)이 논하기를, 임금의 미치광이 같은 방탕이 이미 극도에 달하여, 무사(武士)들을 파견하여 범, 표범, 곰, 말곰 등속을 산채로 잡아 다 후원에 가두어 놓고, 혹은 고기를 먹이며 구경하기도 하고 친히 쏘아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532년 전 오늘의 실록에는, 대사헌(大司憲)이 임금이 일찍이 여러 도(道)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깃털을 가진 물새와 곰, 돼지 전체를 잡아서 바치도록 하였는데, 아마도 외간(外間)에서 진기한 물건을 좋아하는 완호(玩好)하시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간언(諫言)을 하자, 임금이 물새는 그림을 그리는 화사(畫師)로 하여금 모방해서 그리게 하려고 한 것뿐이고 완호하려는 것이 아니며, 곰과 돼지 역시 우연한 명령일 뿐이지 상례(常例)로 바치는 공물인 항공(恒貢)으로 삼게 하려던 것은 아니라고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성종실록 210권, 성종 18년 12월 14일 기묘 기사 1487년 명 성화(成化) 23년

대사헌 권건이 진하사의 간택, 물새·곰·돼지의 공물 등에 대해 아뢰다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중략) 대사헌(大司憲) 권건이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 일찍이 여러 도(道)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깃털을 가진 물새와 곰·돼지 전체를 잡아서 바치도록 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아마도 외간(外間)에서 그것을 완호(玩好)하시는 것으로 의심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물새는 화사(畫師)로 하여금 모방해서 그리게 하려는 것뿐이고 완호(玩好)하려는 것이 아니다. 곰과 돼지 역시 한때의 우연한 명령일 뿐이지 항공(恒貢)으로 삼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치지 말게 하라."

하였다. (하략)

【태백산사고본】 32책 210권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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