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97] 송아지를 굶겨 타락죽을 얻는 것은 인정(仁政)이 아니므로 이를 금하였다
[25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97] 송아지를 굶겨 타락죽을 얻는 것은 인정(仁政)이 아니므로 이를 금하였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20.02.05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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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11호, 양력 : 2월 5일, 음력 : 1월 12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임금이나 왕족은 이른 아침 시간에 조반(朝飯)을 먹기에 앞서 가볍게 죽(粥)이나 미음을 먹었는데, 아침 일찍 먹기에 초조반(初早飯) 또는 자릿조반이라고도 하였으며, 죽상에 올리는 죽의 종류로는 흰죽, 잣죽, 깨죽, 검은 깨로 만든 흑임자죽, 살구나무 씨로 만드는 행인죽(杏仁粥), 팥죽, 콩죽 등이 있었으며, 왕실의 의약(醫藥)을 맡아 보던 관청인 내의원(內醫院)에서는 물에 불린 쌀을 물과 함께 맷돌에 간 후 체에 밭쳐 가라앉힌 앙금인 쌀무리를 먼저 쑤다가 반쯤 익으면서 생우유를 부어 섞어 쑨 우유죽도 준비하여 올렸는데 이를 낙죽(酪粥)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실록에 낙죽에 관한 기록은 20여건으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선조(宣祖)대에는 임금이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관직인 원접사((遠接使)와 사신을 영접하는 예에 대해서 논하면서, 사신을 반드시 지성으로 봉행하되, 전에 일찍이 들으니 낙죽(酪粥)을 즐겨 먹어 도처에서 매양 낙죽을 먹었는데, 한 번은 어떤 참(站)에 이르러 먹으려 하다가 갑자기 도로 놓아버리므로 상을 물린 뒤에 괴이하게 여겨 죽그릇을 보았더니, 위에만 약간의 낙죽으로 덮어놓고 그 속에는 다른 죽이었다고 하니, 각별히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인조(仁祖)대에는 임금이 병이 들어 여러 달 동안 위독했던 영의정을 인견하면서, 환관을 시켜 안에서 낙죽(酪粥)을 내어다 먹이게 한 바가 있고, 대사헌(大司憲)이 기력이 편치 아니한 임금에게 아뢰기를, 원기(元氣)가 상하면 외부의 나쁜 기운이 쉽게 침입하여 찬바람을 잠깐만 쐬어도 바로 크게 상하게 되고, 임금의 모습이 수척하고 검음이 너무나 심하시니 대단히 염려스러워 낙죽(酪粥)으로써 차츰차츰 조리 보양해야 할 것이라고 하자, 임금이 낙죽은 마땅히 먹겠다고 한 바도 있습니다.

숙종(肅宗)대에는 대사헌(大司憲)이 들어와서 관직을 제수 받은 것에 대해 임금에게 숙배(肅拜)하고 감사하는 사은(謝恩)을 하니, 물러난 뒤에 양식과 반찬은 물론 땔감으로 쓰이는 시탄(柴炭)을 주도록 하였으며, 별감(別監)으로 하여금 그의 안부(安否)를 묻게 하고, 담비 가죽으로 만든 모자인 초모(貂帽)와 낙죽(酪粥)을 하사하였으며, 연로한 문신(文臣)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인 기로소(耆老所)에 절일(節日)에는 식물(食物)이 있고 매달 약값, 토세(土稅), 어선(魚鮮)을 나누어 쓰는 규례(規例)가 있지만, 낙죽은 물론 족편처럼 썰어서 만든 전약(煎藥), 갈증을 풀어 주고 위와 장을 튼튼하게 하며 설사를 그치게 하는 효능이 있는 제호탕(醍醐湯)은 마땅히 봉진(封進)해야 할 듯하다는 대신들의 건의에 임금이 따른 바가 있습니다.

영조(英祖)대에는 내의원(內醫院)에서 전례에 따라 우유에서 얻은 버터의 일종인 우락(牛酪)을 올렸는데, 하루는 임금이 암소의 뒤에 작은 송아지가 따라가는 것을 보고 마음에 매우 측연(惻然)히 여기며 어공(御供)에 낙죽(酪粥)을 정지토록 명한 바가 있고, 젖소인 낙우(酪牛)가 비록 짐승이기는 하나 예전부터 봄갈이를 위하여 봉진(封進)을 멈추었으므로 이토록 많지 않았는데, 이제 책자(冊子)를 보니 열여덟 마리나 되고 그 송아지를 아울러 서른여섯 마리나 되니, 다섯 주발의 타락죽을 위하여 열여덟 마리의 송아지가 젖을 굶게 하는 것은 인정(仁政)이 아니므로, 맏손자가 사는 원손궁(元孫宮)에 소는 내의원으로 하여금 수를 줄이게 하여, 예기(禮記)를 따르는 뜻을 보이고 한편으로는 시민(市民)의 폐단을 덜라고 하교하였습니다.

252년 전 오늘의 실록에는 임금이 봄갈이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낙죽(酪粥)을 올리지 말며, 그 소는 본 고을로 내려 보내어 봄갈이에 사용하도록 해야 하는데, 막 젖을 짰던 소를 도살장에 보낸다면 옛날 선왕께서 청둥오리를 드시지 않았다는 가르침을 못 받드는 것이므로, 당일에 봄갈이에 사용할 소를 내려 보내도록 내국(內局)에 보고할 것을 경기 감영에 분부하고 있습니다.

■영조실록 110권, 영조 44년 1월 12일 신축 기사 1768년 청 건륭(乾隆) 33년

낙죽을 올리지 말 것과 대소의 제사를 신중히 할 것을 명하다

내국에서 입시하였다. 하교하기를,

"봄갈이할 날이 머지 않았으니, 낙죽(酪粥)을 올리지 말라. 그 소는 본 고을로 내려 보내어 봄갈이에 사용하도록 해야 하는데, 막 젖을 짰던 소를 도살장에 보낸다면 어찌 옛날 선왕께서 청둥오리를 드시지 않았다는 가르침을 몸받은 것이겠는가? 당일에 봄갈이에 사용할 소를 내려 보내도록 내국(內局)에 보고할 것을 경기 감영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략))

【태백산사고본】 74책 110권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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