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농민이 99% 인류를 먹여 살리는 시대
1% 농민이 99% 인류를 먹여 살리는 시대
  • 김재민 기자
  • 승인 2020.07.03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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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노동의 엄청난 혁신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팜인사이트=김재민 기자] 돼지 농가 및 마릿수를 보여주는 그래프다. 농가수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지만 돼지 사육 마릿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래프 추이는 국내 모든 축산품목이 비스한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경종농업에서도 나타나는 모양이다.

다만 농지라는 제한된 생산요소 때문에 과수나 벼농사, 채소 등의 품목은 양돈처럼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진 않고 있다.

 

우리 농민 수의 감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반면 1인이 사육하는 가축의 수나, 1인이 재배하는 작물의 재배면적은 과거와 비교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에 와 있다.

규모화의 단상

계란을 생산하는 양계장의 규모를 설명하면 더 쉽게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산란계 20만수 사육 농장은 농장 규모로 상위 1%에 들어갈 정도로 매우 큰 농장이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농장의 시설을 현대화한 농장 대부분은 30~50만수 규모로 양계장을 건설하고 있다. 지금은 50만수 이상 규모의 양계장이 수두룩하다.

양계장이 얼마나 규모화되었는지 주요 도시의 인구와 비교하면 감이 올 것이다.

20만수 양계장이면 닭들이 매일 한 개씩의 계란을 낳는다고 가정했을 때 20만 개의 계란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강원, 전남, 경북, 충북 이런 농촌 지역에는 인구가 3만이 안 되는 군 단위 지역이 수두룩하다.

이런 곳에는 요즘 대세인 50만수 가 아닌 3만수 규모 양계장이면 군민들에게 매일 같이 계란 1개씩을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이다.

50만수 규모의 양계장이면 인구 3만 명 내외의 지자체 20개소에 매일 같이 계란을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대한민국 인구가 5천만이니 50만수 규모의 양계장 100곳이면 국내 계란 공급은 끝을 낼 수도 있다.

자급률이 99%인 계란은 약 1500여 농가가 국내 공급을 책임지고 있고, 자급률이 70%인 돼지고기는 6000 농가, 자급률이 80% 정도 되는 쌀은 39만여 농가가 공급을 책임지고 있다. 자급률이 약 50% 정도 되는 유제품은 6000여 농가가 공급을 책임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이 20%대로 낮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가공용으로 사용되는 밀과 옥수수, 콩 등을 제외하면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생각보다 높으며 어마어마한 양의 쌀과 채소, 과일 축산물을 인구수 대비 5%도 안 되는 농민들이 공급하고 있다.

농산물 주요 수출국 농민 비중 1~5%

 

 

전 세계에 밀과 옥수수, 쇠고기 등을 공급하고 있는 미국,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호주 등은 어떠할까? 전 세계 식량 공급기지 역할을 하는 이들 국가의 농민 비중은 우리나라보다 더욱 낮다.

미국은 0.7%, 캐나다 0.9%, 호주 1.9%, 아르헨티나 3.2% 등으로 1~3%의 농민이 세계공급망의 절대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광대한 농지를 가지고 있으니 작은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을 살펴보자 농산물 자급률 100%를 넘기는 프랑스는 0.7%, 독일 0.7%, 덴마크 1.2% 등 유럽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이들 국가는 자국 소비뿐만 아니라 수출까지 할 정도로 농축산물의 생산량 또한 매우 많은 것이 특징이다.

배합사료 축산농장 전업화 견인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요국들의 농업인 비중이 낮은 수준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경제 사회적 요인이 있겠지만, 적은 농지 또는 농장을 가지고는 생존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첫 번째였을 것이다.

농업보다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와 공업부문으로의 인구 이동은 여러 나라에서 관찰되었고 우리나라도 1960~1980년대 일반적 현상이었다.

두 번째는 농업 노동력을 대체할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이를 촉진하였다.

축산농장이 전업화 그리고 이어 대규모화가 가능했던 것은 가축사료의 조달을 용이하게한 배합사료 산업의 영향이 컸다.

과거처럼 쇠죽을 쑤고 꼴을 베어다가 소를 키웠다면 지금도 한 농가가 사육할 수 있는 한우사육두수는 20마리를 넘지 못했을 것이고 사료를 찾아 매일 고된 일상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여기에 사료를 자동으로 공급하는 장치가 개발되고 밀집 사육에도 쾌적한 환경을 가능케하는 환기 등 공조시설, 가축분뇨를 좀더 용이하게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더해 지면서 5000농가가 국내 돼지고기 수요의 70%를 담당하고, 2000농가가 국내 계란 수요의 99%를 공급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축산농장의 극단적인 규모화를 두고 공장형 축산이라 공격하는 이들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의 발전이 축산물을 더욱 안전하고 그리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보는 시각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축력을 대신한 트랙터

여러 기록에 보면 농업이 기계화 되기 이전 소는 한 마리가 10~20명의 몫의 일을 해내었다고 한다. 특히 땅을 갈아 엎는 경운작업은 소가 있고 없고에 따라 그해 농사가 풍년이 될지 흉작이 될지를 결정지을 정도로 매우 중요했다.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소가 많지 않아 한마을에 1~2두가 있었고 이 한두마리의 소가 한마을의 논과 밭을 전부 경작하였다.

이는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여서 오히려 6.25전쟁을 치르며 소의 수가 급격히 줄어 1960년대까지 소를 증식하기 위한 각종 대책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인력과 축력에 의존해 농사를 짓던 시절까지 우리나라도 전체 인구의 50%는 농업에 종사해야만 했다. 당연히 남한이라는 작은 국토에서 많은 국민들이 농업에 종사했으니 1인당 농지면적은 300평을 넘기 어려웠다.

특히 소는 1년에 봄철 파종기, 가을철 동계작물 파종기 때 주로 이용됐으나 소를 돌보는 일은 365일 해야 했기에 농번기가 끝난 이후 농가들을 괴롭히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던 중 일대 혁신이 일어나는데 미국에서는 1940년대 내연기관의 등장 이후 트랙터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곧이어 전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국내도 보행형 트랙터인 경운기가 1970년대부터 본격 보급이 되었다.

경운기의 힘을 마력으로 보통 표시하는데 약 8마력의 엔진을 장착하였다. 말과 소의 힘이 같다고 가정했을 때 1마리의 소가 20명 몫의 일을 했다고 하니 8마력의 경운기는 무려 160명 몫의 일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경운기는 영농기가 끝나면 사료를 주거나 돌볼 필요도 없었다. 농민들이 가축을 돌보는 일에서 해방된 것이다.

트랙터의 발명과 보급은 매우 혁명적인 것으로 인류 대부분을 농업 노동에서 해방시켰으며, 이후 여러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생겨나는 원천이 된다.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도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도 모두 쌀 가계에서 시작한 점을 생각할 때 만약 농업에서의 기술의 진보가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두 회사는 식품회사를 벗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농촌에 거주하던 사람들 농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식량이 충분히 생산될 수 있는 기술의 진보는 인구 대부분이 도시에 거주할 수 있게 했고 식량 생산을 위해 노력할 시간에 새로운 공산품과 서비스를 개발해 판매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 것이다.

사라진 풍경 농촌일손돕기

1960~1980년대 중반까지 봄마다 대규모 농촌봉사활동이 펼쳐진다. 매일경제신문 1979년 5월 21일자 매일경제신문 1면에는 공무원, 예비군, 학생, 기업임직원 508만명이 6월 25일까지 농촌 일손돕기에 나선다는 기사다.

우리나라의 이농현상은 농기계의 보급 이후 농촌의 여유인력이 도시로 이농을 했다기 보다는 농촌보다 일자리가 많고 기대소득이 높은 도시지역으로 먼저 이동하고 이후 기계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봄 모내기철 그리고 가을 수확철 일손 부족현상이 매우 극심했다.

당시 경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전이어서 농산물의 수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자급률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펼칠 때여서 정부가 개입한 일손돕기 활동은 필수적이었다.

 

공무원이 모내기에 동원이 되고, 예비군들은 훈련을 일손돕기로 가름했다. 학생과 기업임직원까지 모든 분야에서 농촌일손돕기에 나서야만 했다.

이후 경운기의 보급으로 경운 작업이 먼저 기계화된 이후, 모내기를 대신에 할 이앙기가 1980년대 초 본격 보급되기 시작했고, 수확을 대신에 해 줄 콤바인도 1980년대 중반부터 보급이 시작되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경운기는 1975년까지 9만여 대가 보급되었지만 1985년도 59만대까지 늘어났고 1990년 76만대로 늘어났으며, 트랙터는 1975년 564대에 불과했지만 1995년 10만대를 돌파했다.

농촌일손돕기의 핵심 농작업이었던 모내기를 대신에 할 이앙기는 1975년 16대 보급에 불과했지만 1985년 4만여 대, 1990년 14만여 대, 1995년 25만대가 보급되며 1990년대 들어 농촌에서 모내기 봉사활동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수확을 도와주는 콤바인도 1975년 56대에 불과했지만 1985년 1만 대가 보급되었고 1990년 4만 대, 1995년 7만 대가 보급되며 가을 봉사활동도 1990년대 사라지게 된다.

1980년대까지 대학가에서는 농활이 대학생들이 꼭 참여해야 하는 연례행사처럼 여겨졌지만 1990년대 들어서 농활은 1980년대 학번들의 무용담이 될 정도였다.

벼농사의 기계화율은 경운, 이앙, 수확의 경우 1990년대 중반 이미 90%대에 도달했으며, 현재는 건조와 방제까지 기계화되면서 99%의 기계화율을 보인다.

이와 달리 밭농사의 기계화율은 2018년 현재 60%에 머무르고 있는데, 다품목 소량 생산이 주를 이루다 보니 기계화보다는 아직도 인력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다. 특히 파종과 수확의 기계화율이 낮은 상황이며 농촌인구의 고령화와 최저임금 인상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밭농사의 기계화율은 계속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녹색혁명

농업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농기계의 보급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농기자재의 혁신으로 1인당 재배할 수 있는 경작지가 크게 늘어난 것은 맞지만 단위당 생산성의 향상 또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주식이 쌀의 생산량 확대를 위해 오랫동안 노력하였는데,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농지의 확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비료와 농약 등의 보급과 함께 다수확 품종의 보급 등 여러 조건이 부합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1960년대까지 식량증산을 위한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나타내기도 했으나 1955년 2000만 섬을 돌파한 후로 오랫동안 큰 폭의 수량신장을 보이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다.

특히 쌀 증산을 위해 비료 사용량을 확대하면 도열병 등 병충해 피해가 많았고 또 벼의 쓰러짐도 심해 쌀 증산에 장애요인이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현재 농촌진흥청 식량과학원이라 할 수 있는 작물시험장이 주축이 되어 서울대 농과대학과 필리핀 소재 국제미작연구소 등과 협업을 통해 병충해에 강하면서 벼의 쓰러짐이 적은 품종육성에 착수해 1971년 통일벼품종을 육성해 농가에 보급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연구진이 육성해 낸 통일벼 계통은 총 3개 품종이었는데 그 중 다수성이 가장 높은 수원213-1호를 전국적으로 보급하게 된다.

통일벼 품종은 기존 품종 대비 최대 30%나 더 많은 알곡이 맺혀 단번에 쌀의 자급을 가능케 했다. 1974년 3000만석 시대를 열었고 1977년 4000만석 시대를 열었으며, 1974년 부터는 광복 후 처음으로 쌀 수입을 중단하기에 이른다.

통일벼가 우리 식량난을 완전히 해소한 것은 아니었다. 1977년까지 벼의 생산량은 계속 증가하였으나 1978년 엄청난 도열병 피해를 입게 되고 1980년에는 설상 가상 냉해피해로 다시 쌀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결국 통일병 한 품종 중심의 식량 수급계획은 재검토되었고 1978년 전체 재배면적의 76.2%까지 확대되었던 통일벼의 재배면적은 1981년 26.5%까지 격감하게 되고 1992년 통일벼 수매 중단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통일벼의 재배면적은 감소했지만 벼 육종가들이 통일벼를 대체할 새로운 품종보급에 나서면서 1980년대 내내 매해 풍작을 이루는 계기가 됐고, 이후 우리나라 쌀 생산체제는 다수확 품종 중심에서 품질 중심으로 전환되게 된다.

녹색혁명은 단순히 신품종 종자의 개발로 좁혀 봐서는 안된다.

같은 기간 병충해를 효과적으로 콘트롤할 수 있는 농약의 보급이 확대되고, NPK를 정확히 개량해 시비하기 어려운 유기질 비료 중심의 국내 비료공급체계에서 정밀하게 양분을 시비할 수 있는 화학비료가 보급되면서 유기질 비료의 단점을 보완했기 때문이다.

다만 너무 많은 화학농자재의 사용에 대한 반작용으로 친환경, 유기농업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면서 화학농자재의 사용량은 감소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화학농자재의 적절한 이용이 종자가 가지고 있는 생산성을 극대화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화확비료의 경우 1990년 총 110만4천톤 458kg/ha이 소비되어 정점을 찍은 이후 2009년 ha당 267kg으로 사용량이 하락한 이후 화학비료 생산량은 ha당 200kg 징후반대를 유지하고 있다.

농약도 2009년 ha당 13.8kg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사용량은 줄어들어 2018년 현재 11.4kg까지 줄어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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