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농가의 고된 일상을 바꿔 놓은 착유기의 역사
낙농가의 고된 일상을 바꿔 놓은 착유기의 역사
  • 김재민 기자
  • 승인 2020.07.03 1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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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인사이트=김재민 기자] 2003년 직장을 그만두고 낙농목장을 해보겠다며 2년간 부모님의 농장에서 목부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착유 등 목장에서의 허드렛일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조금씩 해보았기 때문에 특별히 어렵거나 한 것은 없었으나 새벽과 저녁 2시간 정도 이어지는 착유 작업은 매우 고되고 힘든 일 중에 하나다.

우리 목장은 초기 버킷 착유기로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냉각기가 없어 낙농목장을 하신 분들은 알겠지만, 소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유방을 씻고 착유기를 부착하고 착유가 끝나면 버킷에 가득 찬 우유를 스테인리스 소재 우유 통에 담아 차가운 물에 담가 두었다가 집유 차에 실어 보냈다.

얼마 있지 않아 유가공업체들은 우유의 선도 유지를 위해 냉각기 보급사업을 진행했고 우리 집에도 500ℓ 크기의 냉각기가 설치되었다.

바킷착유기로 착유된 원유는 냉각기에 부어 보관했다.

당시 낙농가들은 10여 마리의 소의 젖을 반복해서 짜야 하는데 허리와 무릎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1세대 자동 착유기인 버킷식 착유기 손으로 직접 착유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1세대 자동 착유기인 버킷식 착유기 손으로 직접 착유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러다가 파이프라인 착유기라는 것이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착유기에 버킷은 사라지고 파이프를 통해 착유 된 우유가 냉각기로 이송되는 방식이다.

이 당시 20여 마리의 소를 착유했는데, 우유를 냉각기까지 들고 나르는 공정이 사라지면서 노동강도도 조금 낮아지고 착유 시간도 단축될 수 있었으며, 유질도 향상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파이프라인 착유기는 2000년대 중반까지 표준적인 착유장으로 정착이 된다.

바킷식 착유기, 파이프라인 착유기 모두 작업자가 쭈그리고 앉거나 허리를 숙여 작업해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경북 함양군 우상목장에 설치된 2열 4두 텐덤 착유기 모습.
경북 함양군 우상목장에 설치된 2열 4두 텐덤 착유기 모습.

그러던 중 국내에 이른바 템덤식 착유기가 본격 보급되는데, 착유장에서 작업자들의 위치가 낮아져 서서 소를 관찰하고 소의 젖을 씻고 착유기를 부착할 수 있게 되었다.

소를 관찰하기도 쉽고 착유 과정 중 쭈그리고 앉거나 허리를 굽히지 않게 되었고, 특히 사람이 착유 장비를 들고 일일이 소에게 이동해야 했던 이전 설비와 달리 소가 착유기가 있는 부스로 이동하는 방식이라 한 사람이 한 번에 3~6마리까지 착유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텐덤식 착유기가 도입되면서 착유 시간은 매우 빨라졌고 무거운 착유기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 않아도 되니 50~60마리까지 착유가 가능해졌다.

착유 관련 설비의 발전으로 생산성은 높아져 한사람이 관리할 수 있는 소의 마릿수도 많아졌다.

생산성도 높아지고 한사람이 관리하는 마릿수도 늘어났기 때문에 1980년대 인력이나 2000년대 초 인력 숫자는 비슷하게 필요했다. 다만 관리가 용이해졌을 뿐이지 관리하는 소의 두수가 증가하면서 노동강도는 여전히 높았다.

특히 오전 6시 착유를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고, 저녁 6시 착유를 위해 4시부터 준비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 시간에 메어 있다 보니 삶의 여유가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청년세대의 경우 새벽 5시 기상은 매우 힘든 일로 단련이 되어 있는 부모세대와 갈등이 여기서 일어나고 낙농목장의 경영 승계를 어렵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상의 낙농목장의 노동강도는 매우 주관적 접근이다. 그래서 통계청이 매년 조사 발표하는 축산물 생산비 중 인건비 비중을 살펴보았다.

 

위의 표는 주요 축산품목 중 가축의 생산비 인건비 항목의 비율을 보고자 한 것으로 인건비 비중이 타 축종에 비해 소의 비중이 높은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젖소의 인건비 비중은 16%로 육계의 3배가 될 정도다.

한우는 아직까지 규모화가 덜 된 탓에 자가 인건비의 비중이 높고 시설자동화가 더딘 반면 낙농목장은 한우농장에 비해 규모가 커 자동화에 대한 투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고용과 자가노동 모두 타 축종과 비교해 매우 높은 편이다.

이는 앞서 소개한 낙농목장의 특수성 때문이다.

한우, 젖소, 돼지, 산란계, 육계 모두 공통적으로 사료의 급여, 분뇨의 처리라는 기본적인 공통 활동이 있고, 낙농은 착유라는 공정이 매일처럼 반복되기 때문에 노동강도가 비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산란계도 계란을 수집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육계와 비교해 인건비 비중이 2.4% 높게 나온다 할 수 있다.

양돈과 산란계와 육계의 경우 사료급여와 급수는 자동화가 된 지 오래고, 산란계는 계란의 수집과 분뇨 수거 과정까지 자동화되어 있는 곳이 많아 인건비 비중은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2000년대 중반 낙농 목장 노동자 실종

2000년대 중반 낙농 목장들은 인력난에 직면한다.

1980년을 전후해 시작된 국내 낙농목장들은 1980년대 중반쯤부터 전문 노동자가 필요해진다. 목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목장주의 자가노동력만으로 대응하기가 버거워졌고, 노동자가 없으면 365일 목장에 메어 있는 구조가 되다 보니 필연적으로 낙농목장 노동자는 필요로 했다.

특히 새벽에 착유를 해야했기 때문에 낙농목장 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실함이었고, 개체의 특성을 알아야 착유를 제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섬세함까지 요구되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낙농목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고, 기본적으로 숙소가 제공되었다.

1990년대까지 인력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2000년대 들어서는 쉽지 않았다. 1세대 낙농인들과 마찬가지로 낙농목장 노동자들도 나이가 들어 은퇴하기 시작했고, 여러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낙농목장이 아니어도 일자리는 주변에 많았기 때문이다.

다시 우리집 이야기를 한다면 1990년대 우리 목장에서 일했던 분들 상당수가 2000년대 들어 주변에 들어선 공장에 취업을 하거나 목장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자기 농장을 꾸리기도 하였다.

국내 인력은 더 이상 낙농목장으로 유입되지 못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외국인이 낙농목장의 주된 노동자로 전환되었고, 이 같은 현상은 낙농뿐만 아니라 양돈, 산란계 등 대형화된 품목에서도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사람의 값어치 그리고 로봇착유기

낙농목장들은 2010년대 들어 로봇착유기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로봇착유기가 국내에 판매되기 시작한 때는 2000년대 중반부터지만 당시만 해도 로봇착유기는 낙농인들 사이에서는 사치재처럼 여겨졌다. 있으면 좋겠지만 너무 고가여서 로봇착유기를 놓는 대신 농장노동자를 더 채용하는 식으로 접근을 하였다.

하지만 농장경영이 2세대로 넘어가고 있는 지금, 낙농목장에 365일 붙들려 있는 삶을 어느 청년이 좋아하겠으며 그런 젊은이에게 누가 시집을 오겠는가?

부모세대도 자녀가 낙농목장이 붙들려 사는 것을 원치 않기에 로봇착유기는 대안이 되었다.

특히 최저임금의 인상과 최저임금 적용 사업장에 농업도 포함되고 또 외국인 근로자들도 함께 포함되면서 인건비가 크게 상승했고 로봇착유기가 사람을 대신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로봇착유기가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의 농장 규모면 3명 이상을 채용해야 하는데 1~2명 인건비를 절감하면 3~4년안에 충분히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기에 속속 착유자동화에 도전하는 농장이 늘고 있다.

노동집약적 품목인 낙농업이 자본집약적 품목으로 전환시키는 주요 변수는 결국 사람 값어치 상승이었다.

착유설비의 자동화는 낙농가의 라이프 스타일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노동에 얽매여 있다 보니 가축을 축사에 가두고 있는 것인지 사람이 축사에 묶여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으나 착유라는 공정에서 해방되면서 낙농가들을 옭아매고 있던 줄이 풀어지는 심리적 해방을 맛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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