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안래억 한국홀스타인검정중앙회장(흥천목장 대표)
[인터뷰] 안래억 한국홀스타인검정중앙회장(흥천목장 대표)
  • 옥미영 기자
  • 승인 2020.07.08 12: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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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농인생 40년, 목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여전히 가장 행복합니다"

국내 젖소, 산유량 높지만 두당 능력편차 커 노동력 투입 과다

우군 능력 집단화시키는 목장단위 개량 여전한 과제
안래억 회장.
안래억 회장.

1989년 5월 27일. 국내 낙농업계 역사상 처음으로 고능력우평가대회가 열렸다.

지금의 홀스타인품평회 전신인 그날 대회 영예의 챔피언은 다름 아닌 안래억 홀스타인검정중앙회장(흥천목장 대표)이었다.

내로라하는 목장을 모두 따돌리고 챔피언을 거머쥔 안래억 회장은 그 후로도 각종 품평회에서 상을 휩쓸면서 명실 공히 국내 최고의 목장 대표로 이름을 높였다.

81년에 시작한 목장 경영이 어언 40년을 맞으면서 8년 전 부턴 아들(안준현)과 함께 목장을 꾸려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그는 새벽 3시에 목장으로 출근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낙농인으로서의 삶을 지속하고 있다.

안래억 회장은 “목장에 나와 소들의 각종 기록관리를 점검하는 새벽녘의 고즈넉한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편안하고 또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평생을 낙농인으로 살아온 안래억 회장의 ‘낙농과 함께한 인생’을 일문일답으로 풀어봤다.

―흥천목장, 그리고 안래억 회장님은 낙농업계에서 워낙 유명인이다 보니 목장을 시작하시게 된 배경도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특별할 것 까진 없고, 아버지께서 목장을 하셨어요. 이북에서 홀홀단신 내려오셨는데, 1960년대부터 낙농을 하셨어요.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엔 서울 전농동에 살았는데 낙농을 하기 전에도 아버진께선 벌을 치시고 양과 같은 가축들을 키우셨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서울이 점차 도시화되면서 더는 가축을 키우기 어렵게 되자 전농동에 서 석관동으로 또 이문동에서 면목동, 답십리로 결국엔 남양주로 계속 이주할 수밖에 없었지요.

서울우유가 지금 상봉동에 있잖아요. 다 이유가 있어요. 면목동, 답십리 이쪽이 예전엔 다 목장 부지였거든. 장한평서 살 때 중랑교쪽을 내려다보면 뚝방 쪽으로 소 들이 늘어서있는 모습이 쭉 보였어요. 모두 목장이었지. 예전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짐 자전거에다가 우유통 몇 통씩을 싣고 나르던지, 아니면 소 달구지로 직접 배달하고 그랬던 때예요.

―회장님은 대학에서 축산을 전공하시고도,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던 공직이나 민간 회사의 취업이 아니라 낙농인으로서의 삶을 택하셨는데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나는 어렸을 적에도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이면 늘 아버질 따라 목장에 갔어요. 집과 목장은 항시 떨어져 있었는데, 아버지 따라 토요일 저녁에 목장에 들어가면 그 다음 일요일에 새벽같이 일어나 아버지와 같이 젖을 짜고 하는

그런 게 너무 좋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목장에서의 시간들이 즐거웠습니다. 장남이라는 나의 위치에 대한 책임감도 은연 중 있었던 건지 아버지를 이어 서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도 항상 가지고 있었던 같아요.

1989년 제1회 고능력우평가대회에서 챔피언을 차지한 이래 숱하게 그랜드챔피언을 거머쥔 흥천목장. 사진은 지난 2007년 한국홀스타인품평회에서의 그랜드챔피언 수상 모습. 안래억 회장은 "품평회에 출품해보아야 우리 목장소들의 체형과 개량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89년 제1회 고능력우평가대회에서 챔피언을 차지한 이래 숱하게 그랜드챔피언을 거머쥔 흥천목장. 사진은 지난 2007년 한국홀스타인품평회에서의 그랜드챔피언 수상 모습. 안래억 회장은 "품평회에 출품해보아야 우리 목장소들의 체형과 개량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로 목장경영 40년이라고 들었습니다. 40여 년 전의 낙농 목장은 쉽게 상상이 가질 않는데요, 목장을 시작했을 당시의 상황은 지금의 낙농여건과 상당히 달랐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남양주 목장은 경사도 심한데다 돌이 무척 많았어요. 산에 로터리를 치다가 돌에 무릎을 까인 일도 부지기수였죠. 아버지 목장에선 죽어도 낙농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다 평지를 찾아 이곳(이천)으로 오게 된 겁니다.

아버진 내가 목장을 시작할 당시 착유우가 2백 여두나 되셨는데, 목장부지와 딱 열 마리의 착유소만을 내어주셨어요.

정말 죽어라고 일을 해야 했죠. 지금은 TMR 사료도 있고, 좋은 건초들도 많아 수입도 자유롭고 얼마나 좋아 졌어요. 옛날엔 죄다 사람 몫이었죠. 낫으로 풀을 베어다 먹이고, 옥수수도 손 수 심어야 하고, 제초기도 줄로 잡아 써야하고. 어디 그 뿐인가. 처음 낙농을 시작할 땐 냉각기가 어디 있었겠어요. 버킷 착유기라고 하잖아요.

바께쓰로 착유한 우유를 가지고 나와 수조에다가 넣어 물을 계속 흘리면서 엉키지 않게 계속 저어주는 작업을 했었지요. 착유 작업하면서는 다치기도 참 많이 다쳤지. 심지어 기절도 했어요. 파이프라인 착유할 때인데 착유하러 들어가자마자 소 뒷발 에 차여 쓰러졌었어요.

지금은 세제도 얼마나 좋아요. 그때 당시 가성소다 사가지고 녹여서 쓰다가 수정체에 소다가 달라붙어서 난시가 되어버렸어요. 안경을 쓴 것도 그때 부터예요. 아들에게는 더 나은 환경에서 목장을 하게 해주고 싶다는 욕심으로 참고 견뎌냈던 것 같아요.

―흥천목장하면 ‘개량의 선도 목장’, ‘그랜드챔피언’ 이런 말들이 떠오릅니다. 회장님께서 남들보다 개량에 일찍 눈뜨고 남다른 의식을 가지게 되신 계기가 있었는지요.

▲목장을 시작하면서부터 숱하게 외국을 방문했지만 관광을 목적으로 한건 최근 몇 년을 빼면 거의 없을 정도예요. 내 관심은 오로지 목장의 소와 낙농관련 시설, 장비들이었죠.

목장을 시작하고 몇 년 뒤였을 거예요. 친구 형이 캐나다에서 목장을 하고 있었던 탓에 캐나다의 유명한 목장을 견학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본 소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요. 대학시절 교수님이 슬라이드로 보여주셨던 그림 같은 소들이 거기에 ‘딱’있더라고요.

놀랐던 건 맞지만 그래도 내 관심은 시설이었어요. 그런데 목장 주인이 일침을 놓더라고.

“그런 건(시설) 돈만 있으면 다 한다. 이 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걸 들으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 소의 어미소와 아비소, 조부모 등 혈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더라고요.

그 다음날 다른 목장에 갔는데, 거기에서도 똑같은 얘길 들었어요. 혈통 얘기였죠. ‘아! 개량이 이만큼이나 중요한거였구나’ 무릎을 치게 된거죠.

흥천목장 전경.
흥천목장 전경.

―선진국의 낙농목장을 둘러보시며 새로운 목표가 생긴 셈이시네요.

▲새로운 목표라기보다는 사진에서나 봤던 소들을 실제로 보니 신기했고, 욕심이 났어요.

캐나다에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에도 개량사업을 지도하는 종축개량협회가 있다는 얘길 듣고는 한국에 오자마자 한 걸음에 달려갔어요. 헌데 문제가 있었어요. 우리 집 착유소가 16마리밖에 되지 않은데다 당시엔 종축개량협회 직원들도 차가 없어 이천시 내에서 일일이 픽업해야 했어요.

더구나 우리 목장 인근의 목장들은 개량사업엔 도통 관심이 없어서 직원 출장이 더욱 쉽지 않았어요. 결국 주변의 젊은 친구들을 설득해 모임을 만들어서 86년 처음 검정을 했어요. 그때 착유마리가 20마리였어요. 그것이 우리목장 개량의 첫 시작입니다.

나는 젖소 개량에 점점 욕심이 생겨서 당시 이곳 땅 한 평에 2천 원 할 때 좋은 정액 하나에 12만원을 주고 사기도 했어요. 주위에선 미쳤다고도 했죠(웃음).

좋은 소를 사려고 각지를 누비고 다니며 마음에 드는 소를 사들이기도 했어요.

―우리나라 젖소의 평균 산유량은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유량만 놓고 보면 국내 젖소의 개량도 정점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국내 낙농 개량사업의 현주소,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산유량만 따지자면 그 말이 맞을 겁니다. 2000년대 중반 원유수급불균형으로 낙농업계가 몸살을 앓을 땐 종축개량협회가 개량을 너무 많이 진척시켜 놔서 그렇단 얘기까지 나왔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이나 일본, 미국 등 낙농선진국에 가보면 우군의 성적이 거의 하나로 ‘집단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낙농가들이 착유작업시에 부 족한 소들에게 일일이 소들에게 드레싱 사료를 줍니다.

하루에 두 번씩 평생 이 작업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목장의 우군들을 하나로 생력화해서 완전티엠알로 커버할 수 있으면, 노동력은 절감시키고 마리당 생산성은 더 올릴 수 있습니다.

사육두수를 줄이더라도 기존의 쿼터량 납유가 가능해 질 수 있단 얘기죠. 최근엔 환경분야의 규제가 얼마나 심각합니까.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개량은 생산성은 물론 환경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최근 축산농가에 대한 환경규제가 도를 넘었다는 불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흥천목장과 같은 선도목장도 어려움이 있을까요.

▲정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에요. 과거에 비해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

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개선’이 목적이라면 ‘개선’에 초점을 두어야지, ‘규제’에 초점을 두어선 곤란하다는 얘깁니다. 규제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좋아질 겁니다. 체세포수 등급만 봐도 그렇잖아요. 인센티브를 주는 쪽으로 농가들을 유인하면 하지 말래도 농가들이 알아서 할 거예요.

가축 분뇨 문제도 그렇습니다. 환경부에선 우리를 자꾸 유럽과 비교하는데, 유럽의 토양은 평지에 석회질이에요. 퇴비 뿌려 비오면 모두 바다로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우리 국토는 화강암 지반에 경사지잖아요. 쟁기질하러 땅을 요만큼만 파도 모두 백토에요. 게다가 장마라는 것까지 있잖습니까. 지하수나 바닷물을 오염시키는 유럽과 환경이 전혀 다름에도 선진국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유럽방식을 우리에 적용하고 규제하려고 하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낙농가로서의 삶을 시작한지 어언 4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목장에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안래억 회장은 말했다.
낙농가로서의 삶을 시작한지 어언 4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목장에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안래억 회장은 말했다.

―환경문제도 그렇지만 낙농목장은 인력투입량과 강도가 세다보니 후계자 확보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낙농목장의 미래, 회장님은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어렸을 때부터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있었어요. 나보다 공부를 못하는 동생들에게 ‘이놈은 좀 떨어지니 나중에 목장을 시켜야겠다’는 말씀이었어요. 나 는 그 얘기가 그렇게 싫더라고요.

근데 우리 주위 목장들을 봐도 그랬어요. 공부 잘하고 똑똑한 자식은 공부시켜 서울로 보내고 좀 모자란 아들에게 목장을 이어받게 하는 거예요. 결론은 어땠을까요. 그런식으로 목장을 이어받은 곳은 수 십 년 전에 이미 망하고 말았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정말 하고자하는 사람,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요. 부모가 아무리 얘기하고 싸워 봐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게다가 요즘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양질의 정보를 무궁무진하게 얻을 수 있어요. 우리 때보다 더 새롭게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 더욱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환경에 대한 규제로 갈수록 압박이 심하지만 투명한 정액과 사료 유통 구조 여기에 유대까지 생산비에 연동해 보장해 주는 나라에서 목장을 하는 것은 그래 도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목장의 미래도 우리 낙농의 미래도 그리 어둡지는 않을 겁니다.

―최고의 목장인 흥천목장의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열심히 묵묵히 목장일을 돌보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하지만 저희 목장이라고 해서 쉬운일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구제역 예방백신 항체 검사 명령만 떨어져도 우리 목장이 검사대상 1순위예요.

퇴비부숙도 문제와 같은 경우도 다른 농가와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다만 갈수록 변화하고 더욱 높아지는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늘 안주 하지 않는 모습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납유량이 적지 않다보니(약6톤) 리터랑 몇 십 원의 인센티브도 소득에 큰 영향 을 미치더라고요. 무항생제 인증을 받고 있는데, 현재는 동물복지 인증을 준비 중에 있어요.

이제 목장의 굵직한 계획은 아들에게 맡기고 저는 목장에서 소들의 건강과 기록을 체크하고, 착유하는 행복한 시간을 즐기려고 합니다.

목장이 보이게 창이 난 안래억 회장의 집무실.
목장이 보이게 창이 난 안래억 회장의 집무실.

이 기사는 월간 농장에서 식탁까지’ 2020년 7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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