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년 전 오늘 - 축산 소식38] 활을 만들기 위해 각지에 물소를 70마리나 길렀다.
[509년 전 오늘 - 축산 소식38] 활을 만들기 위해 각지에 물소를 70마리나 길렀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8.08.3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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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54호, 양력 : 8월30일, 음력 : 7월 20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활은 물소뿔(水牛角)로 주로 만들었으며, 물소뿔인 수우각은 궁각(弓角)·흑각(黑角)이라고도 하며 수우각을 원료로 만든 활은 각궁(角弓)· 흑각궁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우각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아 주로 중국을 통해 수입되었으며 동남아시아산이 일본을 통해 수입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제조비용이 높고 안정적인 공급이 어려운 물소뿔 대신 국산 황소 뿔을 사용한 각궁도 제작하였는데 이런 활은 향각궁(鄕角弓)이라고 불리웠으며 국산 황소 뿔은 물소 뿔에 비해 짧기 때문에 활 하나를 만들기 위해선 황소 뿔 세 개가 필요하여 삼각궁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이러한 활을 포함한 병기(兵器)의 제조 등을 관장하던 관청은 군기감(軍器監)으로 정 3품 판사(判事)가 관장하였으며, 특별히 궁중에서 사용하던 활이나 화살을 만들어 보관하는 궁내의 관아는 내궁방(內弓房)으로 활과 화살을 만드는 공장(工匠)들이 있었으며, 이들을 내궁인(內弓人)·궁장(弓匠)·궁공(弓工)·내시인(內矢人)·시장(矢匠)·시공(矢工)이라 불렀고, 군기감 소속의 궁장들이 내궁방의 일을 돕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활을 제조하는데 쓰이는 뿔을 확보하고 보통 황소에 비해 밭을 가는 능력이 2배인 물소의 확보·번식을 위해 세종 때부터 많은 노력이 있었으며, 세조 때에는 일본 유구국(琉球國 ; 지금의 오키나와 등에 있던 왕국)에서 2마리를 도입하여 경상도 웅천(지금의 진해 일대)에서 기르게 하여, 성종 때에는 70여 마리에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509년전 오늘의 기사에는 이렇게 번식된 물소를 섬으로 추방하지 말고 민간에 나누어 주어 경종(耕種)에 쓰도록 하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중종실록 8권, 중종 4년 7월 20일 경술 기사 1509년 명 정덕(正德) 4

병조 겸판서 유순정·판서 김응기가 북도인이 야인에게 사람을 파는 일을 아뢰다

병조 겸판서 유순정·판서 김응기가 아뢰기를,

(중략) 그리고 조종조에서, 물소가 비록 우리 땅의 소산이 아니지만 각 고을에 나누어 기르게 한 것은, 자식(孶息) 시켜서 우리 나라 인민으로 하여금 경종(耕種)에 쓰도록 하고자 하여서였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소용이 없다 하여 해도(海島)로 추방하였으니, 필시 주리고 얼어서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이는 선조의 뜻이 아니니, 청컨대 민간에 나누어 주고, 만약 물고(物故)하더라도 그 치사(致死)케 한 죄를 다스리지 말면, 재산이 있는 백성은 혹 능히 길러서 점차 경종을 익혀 백성이 그 이익을 입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사람 파는 일은 아뢴 대로 하유하고, 물소 일은 의논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8권 66장

【주】자식(孶息) : 새끼를 쳐서 번식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