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조금 제도화 이후 30년
자조금 제도화 이후 30년
  • 김재민 기자
  • 승인 2020.09.03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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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업에서 시작된 한국 자조금 운동
“농민 자조활동의 새로운 장을 열다”

[팜인사이트=김재민 기자] 자조금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진지 올해로 30년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축산농가들이 자조금 제도를 배우기 위해 미국을 찾았던 때만 하더라도 생소했던 이 개념은 농축산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공기와 같은 제도가 되었다.

자조금은 각 품목의 소비촉진을 비롯해 발전을 위해 농가 스스로 기금을 조성하고 사용한다는 아주 단순한 사업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눈앞에 이익을 내려놓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조금 먼 미래의 이익을 위해 협조하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품목이 도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많은 품목이 자조금 단체를 꾸려 사업을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품목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게 다 인간의 이기심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자조금 제도에는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면서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묘수가 담겨야 한다.

자조금 사업의 성공을 논할 때 기금을 어떻게 알뜰하게 사용해 우리 품목 발전을 이루느냐에 있지 않다.

사업의 성과는 뒤에 일이고, 어떻게 하면 각 품목의 농가들이 눈앞에 이익을 포기하고, 공동의 이익 그리고 미래의 큰 이익을 추구하게 하느냐로 모여야 한다.

실제로 자조금 제도는 초기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 내에 하나의 조항에 불과했고, 선언적 조항을 보고 달려들었던 농가들은 쓰디쓴 실패를 맛봐야만 했다. 대다수의 농가들이 눈앞에 이익을 좇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자조금은 이후 낙농에서 큰 성과를 내면서 자조금 제도를 고도화 하기 위한 농정활동에 돌입했고 결국은 현재의 법률체계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게 된다.

‘자조금 제도화 이후’ 30년 기획을 통해 자조금 사업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발전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자조금제도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의 판매금액 중 일부를 거출하여 기금을 조성해 해당 품목의 소비촉진과 수급조절 등을 위해 사용하는 제도다.

1980년대 축산단체들이 자조금 제도 도입을 처음 주장하였고, 1990년 4월에 제정된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에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서 자조금의 역사가 시작된다.

법률 제정과 함께 곧바로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조성해 사업을 시작되지는 못했고, 1992년 양돈협회와 양계협회가 자조금사업에 도전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98년 낙농육우협회가 낙농자조금 조성에 성공하면서 자조금 사업의 가능성을 보여줬고, 2001년 모든 축산농가가 의무적으로 자조금사업에 참여토록 하는 의무자조금법이 제정된 이후 한우, 양돈 등의 품목들도 큰 성과를 거두면서 자조금 사업은 축산을 넘어 과수와 채소 등의 품목으로 확산하기에 이른다.

자조금의 인식

1980년대는 소, 돼지, 닭 등 주요 축산물의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며 큰 폭의 가격 하락을 경험했다.

축산물 가격 하락은 농촌 경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정부도 수급조절에 신경을 썼지만, 농민들 마음처럼 정부가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특히 전업화가 가장 먼저 이뤄진 양계와 양돈의 경우 1985년 이후 공급과잉 상황이 만성화 조짐을 보이자 농가들 사이에서 자조금 제도 도입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품목은 양돈이었다.

그림 매일경제신문 1987년 11월 24일. 양돈농가들이 돼지파동 해소를 위한 대책으로 자조금 제도 도입을 정부에 건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림 1은 매일경제신문 1987년 11월 24일자 15면 우측 톱기사로 ‘돼지파동 백약무효’라는 제목이 인상적인 기사다.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정부가 2년 전부터 돼지사육 과잉을 경고하고 11월에만 두 번이나 대책을 내놓았지만 돈가 하락을 막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양돈농가 3000여명이 참석한 결의대회에서 여러 가지 대책을 정부에 긴급 건의하게 되는데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가격 안정과 유통개선을 위해 자조금 제도의 실시”를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 기사가 돈가 하락의 원인 등에 집중하고 있으나 필자가 주목한 것은 이때 농가들이 자조금 제도 도입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돈협회가 자조금 제도 도입을 정부에 건의한 것으로 보아 양돈농가들 사이에서는 1987년 이전에 자조금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돈농가들이 자조금 제도 도입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양돈협회 등 농민지도자들에게 자조금 제도를 소개한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영인 박사는 미국사료곡물협회 한국지사장, 자조금연구원장 등을 지내며 자조금 제도가 국내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산파 역할을 했다.

미국사료곡물협회 자금을 활용해 축산단체 지도자를 대상으로 미국 연수를 실시했는데, 주요 프로그램이 미국의 자조금 제도와 사업 소개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980년대 양돈, 양계, 낙농 등 전업화가 일찍 시작된 품목을 중심으로 자조금 제도 도입을 정부에 요구하게 됐다.

특히 자조금제도는 우루과이라운드 타결이 임박한 과정에서 우리 축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주요 꼭지로 자리잡았고, 1990년 특별법을 통해 제도화 된다.

자조금 사업의 시작

자조금사업을 처음 시작한 품목은 양계와 양돈이었다.

정부도 농가들의 의지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농가들의 자조금 예산의 50%되는 금액을 보조하기로 한다.

정부의 보조사업은 여러 품목협회 등이 자조금 사업에 도전하게 하는 유인이 되었다.

1992년 양계협회와 양돈협회에 각각 1억5천만 원의 보조금이 지급됐다.

법률 제정 2년 만에 자조금 사업이 추진되었고 양돈협회와 양계협회가 도전하였지만, 생각처럼 자조금 사업의 성과는 크지 못했다.

이들 두 단체는 자조금 사업을 2000년대 초반까지 줄기차게 도전하였지만, 협회비를 모으는 수준밖에 농가들로부터 기금을 모으는 데 실패하면서 누구나 체감할 수 있는 소비촉진 등의 효과는 발생하지 않았다.

사업이 지속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기금 조성에는 기여하지 않으면서, 자조금 사업을 통해 얻어지는 이익은 공유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 자조금 연구자들은 무임승차자(free rider)라 부르며 이들 무임승차자 때문에 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사업에 협조하지 않는다며 이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이는 결과를 원인으로 갖다 놓는 오류를 범한 것으로 기금 조성에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소규모 농가의 수가 너무 많았다는 게 근본 원인이다.

최소한 양계협회나 양돈협회에 가입이라도 해야 자조금 거출 협조를 요청할 수 있으나, 소규모 농가가 다수다 보니 산업에 대한 애정도 없고, 협회 사업 참여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두 번째는 당시 자조금 수납을 대행해 줄 곳이 없어 납부의 편리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농가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수입 중 일부를 부정기적으로 자조금 계좌로 송금하는 방식은 한두 번은 협조할 수 있겠지만 지속 가능하지 못한 방식이다.

특히 자조금 조성이 가장 필요할 때인 축산물 가격이 하락한 때에는 농가들이 소득 감소로 납부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낙농업계의 우유자조금이 시행 첫해 큰 성과를 내면서부터다.

양돈협회와 양계협회는 몇해 동안 수억원의 기금 조성도 어려웠으나 낙농자조금은 시행 첫해 약 30억 원의 기금을 확보했다.

낙농육우협회가 1999년 실시한 잡지광고 모습.
낙농육우협회가 1999년 실시한 잡지광고 모습.

낙농자조금의 성공과 의무자조금 추진

낙농육우협회, 대한양돈협회, 대한양계협회는 1980년대부터 미국사료곡물협회 박영인 한국지사장의 도움으로 자조금사업에 대해 스터디를 해왔지만, 자조금 제도 도입 직후인 1992년 자조금 사업에 곧바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낙농진흥회 설립과 원유유통구조 개선 사업에 낙농육우협회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던 때라 자조금 사업에 힘을 기울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낙농진흥법 개정과 낙농진흥회 설립이 마무리되는 시점인 1998년 총회에서 자조금사업 추진을 결의한 낙농육우협회는 1998년 8월부터 거출한 자조금은 이듬해 1999년 7월까지 16억원을 거출하게 됐고, 정부의 매칭펀드를 더해 30억원대의 자조금 사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낙농자조금은 이후 거출율이 계속 상승하면서 정부의 보조금을 합해 50~60억 원대이 기금을 매년 조성해 사용할 수 있게 됐고, 양돈과 양계협회 그리고 때마침 창립한 한우협회 등도 자조금 사업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낙농자조금이 기금 조성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것은 유업체들이 자조금 수납기관 역할을 대행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농가들은 유업체나 낙농조합 등으로부터 받는 유대에서 이러저러한 비용들을 공제하는 일이 많았는데, 유업체와 낙농조합들이 농가들에게 지급될 유대에서 일정한 금액을 자조금을 떼어서 낙농육우협회 자조금 계좌로 송금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행동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호주머니에 들어왔다 나가는 금액은 손실로 느끼지만 유업체가 자조금을 농장 통장에 입금하지 전에 미리 떼어 놓는 방식은 농가들이 상대적으로 손실을 크게 느끼지 않아 거부감이 적었다.

시작 첫해부터 큰 규모의 자금이 조성되면서 자조금을 활용한 소비촉진 사업의 성과도 크게 나타났다. 자조금을 활용한 여러 가지 활동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낙농가들 사이에 참여 동력으로 작용해 임의 자조금이었지만 80% 이상의 농가들이 참여하게 된다.

낙농자조금의 성공 이유를 조사하기 시작한 축산단체들은 축산농가라면 의무적으로 자조금을 납부하는 방안을 생각하게 됐고, 이를 정부와 국회 등에 건의하기에 이른다.

의무자조금 사업의 제도화

시장개방과 외환위기 등으로 어수선했던 1990년대 말을 지나면서 양돈협회와 양계협회가 중심이 된 축산단체협의회는 의무자조금 제도화를 위한 농정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여기에 막 출범한 한우협회 그리고 육계 등의 품목이 의무자조금 법제화 농정활동에 가세하면서 힘을 받게 된다.

의무자조금제도의 핵심은 각 품목별협회와 농협중앙회가 자조금 사업을 위한 인적 구성을 주도하고, 전체 농가들이 참여하는 투표를 통해 자조금사업의 총회격인 대의원회를 구성하고 대의원들은 다시 자조금의 이사회 격인 관리위원회 선출하면서 조직을 갖추게 된다.

대의원회와 관리위원회는 축산단체들이 마련한 거출 계획, 사업계획 등을 심의하고, 이를 의결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전에는 각 품목단체들이 임의로 자조금 사업계획을 수립해 이를 정부에 제출하고, 농가들이 자조금을 납부하면 납부한 금액만큼 정부가 매칭해 펀드를 조성하고 품목단체가 사업계획에 따라 집행하는 구조였다.

의무자조금 사업의 시행은 전체 농가들이 참여해 대의 기구를 조직하고, 대의원회, 관리위원회로 이어지는 기구를 통해 농가들이 조성한 기금을 관리 집행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의무자조금임 만큼 누구나 편리하게 자조금을 납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데, 자조금 거출 창구를 정하도록 했다. 우유자조금이 유업체와 낙농조합을 거출창구로 삼은 것과 같이, 한우와 돼지는 도축장(공판장, 도매시장, 일반도축장)이 거출창구 역할을 하게 되었고, 도축 마리당 일정한 금액을 자조금으로 조성하게 됐다.

농수산 자조금으로 확산

축산자조금사업의 확산은 농어업계를 자극했다.

의무자조금 사업 시작 이후 축산업계가 1년에 집행하는 자조금 규모는 어림잡아 600억 원 대에 이른다.

이를 활용해 소비촉진을 위한 광고와 홍보 사업 그리고 농가 교육사업, 소비자 정보제공, 조사연구사업 등에 사용하면서 각 품목이 활성화되는 게 눈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특히 공급과잉 등으로 가격이 하락할 때 공격적인 소비촉진 활동 그리고 수급조절사업에 자조금이 쓰이면서 과수, 인삼 등의 품목도 자조금 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농수산 자조금도 농안법 등의 근거 조항으로 인해 실시는 가능했지만, 축산업과 달리 농가 수가 많고 조직화도 미흡하여 활성화되지 못하다가 2013년 ‘농수산자조금의 조성 및 운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여러 품목이 도전하게 된다.

다만 농수산물 각 품목의 산업 규모가 축산업에 비해 크지 않고, 농가의 조직화가 미흡하면서 축산품목 만큼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농축산자조금 설치 현황

 

 

 

자조금 제도 농민들의 행동을 바꾸다

우리 농업계는 어떤 사안이 벌어지면 정부가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정부의 농업에 대한 역할이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먹거리 문제 해결을 위해서였다. 쌀이 부족하던 시절 쌀의 자급을 위해 농민들을 지원했고, 고기가 부족하던 시절 쇠고기 등의 자급을 위해 축산농가들을 지원했었다.

하지만, 시장이 개방되고 먹거리가 풍족한 세상이 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어떻게든 지원해 쌀 한 톨이라도 더 생산하도록 유도했던 절박감, 천정부지로 치솟는 축산물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소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라도 더 키우게 하려했던 시절을 시장개방과 함께 벗어났기에 정부가 농업을 대하는 방식, 농민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자조금 제도는 농민들이 정부 의존적 사고를 벗어나게 하고, 산업의 주체적 행동을 하게 했다.

스스로 모여 조직을 만들고, 스스로 기금을 조성하고, 산업 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하게 했다.

과거 농민은 그냥 생산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정부가 바라는 농민의 상도 ‘생산만 잘하라’였다.

하지만 혼자 잘해서는 결코 우리 농업은 발전할 수 없다. 거대 자본이 농업에 진출하고, 시장이 개방된 상황에서 농민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정부도 농민들과 손절하기 시작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 농민들이 협력하는 법을 자조금을 통해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조금 품목도 결국은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 보면 될 것 같다.

협력하는 법을 배운 품목은 머지않은 미래 큰 성과를 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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