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는 말을 실은 공마선(貢馬船)이 출항하기 전에 관할 목사(牧使) 주관으로 선원과 배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정성껏 제수를 마련하여 공손한 마음으로 기원하는 해신제(海神祭)를 지냈으며, 도 내 3개 읍의 수령들이 윤번으로 차원(差員)을 정하고 다른 배와는 달리 말을 실은 배가 육지에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강한 바람이 있은 연후에 비로소 배를 출발시켰습니다. 공마봉선의 해로(貢馬封送海路)는 공마선이 조천관, 별도포, 어등포, 도근천(외도), 애월포에서 정남풍(正南風)에 출항하여 화탈섬(火脫島:관탈섬), 사서도(斜鼠島), 보길도(甫吉島)를 거쳐 영암(靈巖)에 도착하거나, 보길도에서 강진(康津)이나 관두량 완도(莞島)를 거쳐 해남(海南)에 도착하여 하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해로를 건너는 소요시간은 풍랑에 따라 순풍에는 12-24시간이 소요되나 일반적으로 2-4일, 그렇지 못했을 때는 5-10일에도 도착했으며, 육지에 도착한 공마수송은 각 읍에서 징발된 견마군(牽馬軍)에 의해 나주(羅州)·공주(公州)를 거처 한양(漢陽)에 도착하는 하는데 약 1-2개월이 걸렸으며 바다에서의 조난 등으로 수송비용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마선(貢馬船)은 봄부터 여름에 걸쳐 평년에는 10여 척이 왕래하였는데 영선천호(領船千戶) 1인, 압령천호(押領千戶) 1인, 선장(船長) 1인, 사관(射官) 1인, 격군(格軍)은 대선(大船)인 경우 43명, 중선이 37명, 소선이 34명이 승선(乘船)하여 노를 저었습니다.
607년전 오늘의 기사에는 제주 주둔병사의 군량 자급을 위하여 지급한 둔전(屯田) 당 조정에 바치는 말의 수를 조정하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태종실록 22권, 태종 11년 7월 27일 병술 기사 1411년 명 영락(永樂) 9년
말의 양축에 관한 사의를 제주 목사가 상언하니 그대로 채택하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김정준(金廷雋)이 그 지방의 사의(事宜)를 올리었다. 상언(上言)은 이러하였다.
"제주(濟州)에 동서(東西) 두 도(道)가 있는데, 말을 기르는 자가 모두 둔(屯)을 지어서, 매둔(每屯)에서 해마다 말 1필을 바치는 것이 예(例))니다. 지금 보건대, 토성(土性)이 푸석하고 들떠서, 곡식을 파종하는 자가 반드시 말과 소를 모아 그 땅을 밟아서 땅이 반드시 단단하여진 뒤에 종자를 뿌리니, 공사(公私)의 소와 말이 이 때문에 곤피(困疲)하여 집니다. 공가(公家)에서 비록 금령(禁令)이 있으나, 몰래 목자(牧子)와 짜고서 말을 병들게 합니다. 이제부터는 매 1둔(屯)마다 상마(雄) 1필에 피마(雌) 9필을 남기고, 그 나머지 거세(去勢)한 말은 모두 조정에 바치는 것으로 해마다 상례(常例)를 삼으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9책 22권 1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