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년 전 오늘 - 축산 소식47]인왕산에 표범이 나타나 가축에게 피해를 입혔다
[524년 전 오늘 - 축산 소식47]인왕산에 표범이 나타나 가축에게 피해를 입혔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8.09.12 0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 18-63호, 양력 : 9월12일, 음력 : 8월 3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왕조실록에 표범에 대한 언급은 200여건으로 주로 출현한 기사와 가죽에 대한 기록이 많으며,조선시대 한반도에 서식한 대형 맹수 중에 호랑이 보다 더 많이 서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왕실에서는 호랑이 가죽보다 표범 가죽이 더 부드럽고 고급스럽다하여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물품으로 사용하였으며, 실제로 권위 있는 문신이나 무신들의 초상화에는 호피(虎皮) 보다는 표피(豹皮)를 깔고 앉은 그림이 더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수요를 감안하여 조선시대 중기까지만 해도 전국 대부분의 군현에서는 호피 혹은 표피를 매년 3장씩 진상하도록 하여 조정이 해마다 거두는 호피와 표피는 1천여 장에 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러한 물량을 가지고 당시에 최대 6천여두의 호랑이와 표범이 살았다는 연구보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호피와 표피를 받치게 하는 제도는 급격한 개체 수 감소로 영조(英祖) 대에 폐지되게 되었는데, 당시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하는 전문 군사인 '착호갑사' (捉虎甲士)가 성종(成宗)대  400여명에서 숙종(肅宗)대에는 1만 1천여명으로 늘어난 기록만으로도 포획의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524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인왕산에 표범이 들어와 가축에 피해를 주었으나 잡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종실록 293권, 성종 25년 8월 3일 기미 1번째기사 1494년 명 홍치(弘治) 7년

인왕산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표범을 잡게 하다

표범이 있어 인왕산(仁王山)으로 들어와 사람과 가축(家畜)을 해치니, 이를 잡도록 명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7책 293권 1장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