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년 전 오늘 - 축산 소식50] 여우·토끼·노루·사슴을 생체(生體)로 쓰는 제사도 있었다
[573년 전 오늘 - 축산 소식50] 여우·토끼·노루·사슴을 생체(生體)로 쓰는 제사도 있었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8.09.17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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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66호, 양력 : 9월17일, 음력 : 8월 8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동지(冬至) 뒤 세 번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에 종묘 등 조종(祖宗)의 신위에 희생(犧牲)을 바치고 한 해의 농사나 그 밖의 일을 고하는 제사를 납향(臘享)이라 하였습니다.

납향은 납제(臘祭)라고도 하였고, 납제는 납일에 지기(地祇)에게 거행하는 제사인 반면 납향은 인귀(人鬼)에게 지내는 제향으로 구분도 하였으나 서로 혼용되었고 납향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초기에는 납향은 사냥(獵)으로 잡은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로 여겨 사냥한 고기를 바치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관습은 곧 폐지되었고, 일반적으로 납육(臘肉)이라 하여 지방관청에서 진상(進上)하는 산짐승의 고기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납육을 진상하는 것을 납일(臘日) 진상이라고 하여 대개 생돼지(生猪), 생노루(生獐), 생꿩(生雉), 생사슴(生鹿), 생토끼(生兎) 등을 올렸으나 여우를 사용한 기록도 있고, 올리는 방법도 생체(生體)를 털만 뽑고 가죽은 벗기지 않고 바로 올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동물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양민에게 여러 가지 폐단을 야기하여 납육의 정기 진상에 곤란을 겪기도 하여, 수령이 백성을 동원하여 사냥하는 폐단을 엄금 하게 하였으며, 나중에는 진상해야 하는 납육을 공인을 통해 공물가로 대납·봉진하는 형태로 바뀌어 시행되었습니다.

한편, 납향은 사시제와 함께 오향대제(五享大祭)라고도 하여, 종묘에서 납제를 거행할 때에는 선왕과 선후 외에 배향공신(配享功臣)과 나라에서 모시는 일곱 신(七祀)에게도 함께 제사지냈으며, 그 밖에 사직, 경모궁, 영희전 등에서도 납향제를 거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573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평안도에서 잡은 흰노루의 처리 방안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109권, 세종 27년 8월 8일 기유 기사 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강계부에서 흰 노루가 잡히다

평안도 감사가 아뢰기를,

"강계부(江界府)에서 흰 노루[白獐]를 잡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행류(五行類)에 이르기를, ‘왕자(王者)의 덕이 성하면 흰 노루가 나온다.’ 하였으나, 내가 본래 기이한 짐승을 좋아하지 않으니 놓아 보내고자 한다."

하매, 도승지 유의손(柳義孫) 등이 아뢰기를,

"이 어린 노루는 길들이기 쉬우니 가지고 와서 바치더라도 또한 2, 3인의 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하례하기를,

"흰 까치와 흰 꿩은 일찍이 보고 들은 일이 있으나, 흰 노루의 상서는 성대(聖代)에 처음 보는 것이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흰 노루를 과천(果川)에서 보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 사복시(司僕寺)에서 가서 잡으려 하기에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흰 노루도 우연히 나온 것이니 와서 드리게 하지 말고, 또 예조에서 알아서 번거롭게 와서 하례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5책 109권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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