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낙농산업(제1편)
격동의 낙농산업(제1편)
  • 김재민 기자
  • 승인 2021.11.05 13:41
  • 호수 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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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인사이트=김재민 기자] 인류가 가축의 젖을 이용한 역사는 매우 깊다.

성서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처럼 소와 양, 염소를 키우는 유목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이들 젖을 활용한 음식이 발달하였다.

아쉽게도 한반도에서는 가축 젖의 이용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우리나라의 근대 낙농 그러니까 전용 젖소 품종 사육 시도는 구한말 견미보빙사 일원으로 참여해 미국의 축산업을 시철하고 돌아왔던 최경석에 의해 시도되었다.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 일행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 일행

최경석은 고종의 지원속에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시범목축장인 ‘농무목축시험장’을 서울 우이동에 설치하고 저지(Jersey)종 젖소 3마리와 말 3마리 외래 가축을 실제 도입하였으나 갑자기 병사하고, 후임으로 왔던 외국인 농업기술자 R. Jaffray도 취임 후 10개월여 만에 병사하면서 농무목축시험장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나고 많다.

1902년 농상공부의 기사로 근무한 프랑스 사람 쇼트(Short)가 지금의 서울 신촌역 부근에 우사를 짓고, 일본으로부터 20여두의 홀스타인(Holstein)종을 도입해 사육하였고, 1906년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이 설치하면서 젖소가 도입되었던 기록들이다.

전용 젖소는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한우에서 우유를 생산한 기록이 여럿 나오는데 새끼를 생산한 어미소에서 젖을 짜 타락죽 등의 음식으로 만들어져 왕에게 진상되었고, 왕이 병약한 신하들에게 보양식으로 타락죽을 하사한 기록도 나온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젖소사육을 하였으나 이는 우리 농가의 소득증대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였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사육되는 젖소는 일본인이나 선교사 등 외국인들에 의해 사육되었기 때문이다.

6.25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농림부가 조사한 남한 전역에 젖소 사육두수는 889마리였으며 그마저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당시 일본 등으로부터 도입된 젖소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였고 1957년 농림부가 조사 발표한 젖소 사육두수는 488두에 불과하였다.

1. 한국 낙농의 시작(1960년대)

가. 현대 낙농의 태동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낙농업이 시작되었을 때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미재단을 통해 젖소가 도입되기 시작한 1961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후 매년 미국,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 등을 통해 젖소가 도입되면서 소득작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1961년 농협 젖소 도입 ⓒ국가기록원
1961년 농협 젖소 도입 ⓒ국가기록원

특히 1962~1966년까지 진행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낙농 정책이 포함되면서 본격적인 낙농 정책이 이 당시 추진된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된 낙농 정책은 ‘낙농 진흥 10개년 계획’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71년까지 낙농 기반 조성을 위한 방대한 계획이 수립되어 추진된다. 한국 농정 50년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813~1815)

낙농 진흥 10개년 계획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립되었다.

① 많은 유휴지를 효율적으로 개발하여 초식가축의 사육을 확대. ② 가축 증식에 따른 구비의 생산증대로 지력 향상을 도모. ③ 유휴노동력을 낙농업 분야로 흡수하여 노동생산성을 제고. ④ 우유 보급을 확대하여 국민 보건 향상과 장기적인 식생활 개선. ⑤ 수입 유제품(분유)을 국내산으로 대체하여 외화 절약 등이다.

주요 사업내용을 살펴보면 ① 호당 사육 규모 3두 미만을 3∼5두 규모 이상으로 증대 ② 젖소 입식을 희망하는 농가는 젖소 1두당 1정보의 초지를 확보할 경우 우선 입식 ③ 다두 사육 능력이 있는 낙농가에게는 기업 목장 형태로 지원 육성 ④ 낙농가에서 생산되는 원유의 원활한 집유 등 원유 수급의 대책 강구 ⑤ 유가공공장의 설치를 적극 지원 등이다.

젖소의 도입 및 증식 계획도 이 당시 세워지게 된다.

 

1959년 159 농가에 불과했던 농가 수는 젖소 도입에 힘입어 1961년 254 농가로 100 농가가 늘어났고, 1962년 676호에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종료된 1966년 1478호로 증가했다. 사육두수도 676두에서 1966년 8,471두로 증가하게 된다.

우유생산량도 1962년 1,520톤에서 1966년 1만2,896톤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하지만,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중 낙농 관련 정책을 보면, 유가공공장 3개소를 건설하기로 계획했고 실제 1962년을 시작으로 1963년, 1965년 각 1개소가 완공된다.

젖소의 도입은 당초 5,000두를 목표로 잡았으나 실행계획에서는 4,010두로 조정하였고, 1965년 3,400두만 최종적으로 도입되었다.

 

낙농 진흥 10개년 계획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1962년 676 농가 2,406두에 불과했고 1인당 우유소비량은 101g에 불과했다. 5년 뒤인 1966년 낙농가 수는 1478호로 늘어났고, 사육두수는 8,471두로 늘어났다. 농가당 사육두수는 5.7두로 늘었으며, 1인당 우유소비량은 422g으로 네 배 이상 증가했다.

사업이 종료된 1971년은 사육농가는 3270호로 늘었고, 사육두수는 3만 두를 돌파했다. 1인당 우유소비량은 1,851g으로 1962년 101g 대비 18배가 늘었다. 인상 깊은 것은 1인당 소비량을 표기하는 단위가 kg이 아닌 g이었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우유 소비가 적었다.

다만 당시 젖소의 사육은 경기도와 서울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농림부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1963년 전국 젖소 사육농가는 813호였으나 그중 서울이 168호, 경기도가 274호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젖소 사육두수도 3,539두 중 서울이 983두, 경기도가 1,270두로 64%를 수도권에서 사육하고 있었다.

1960년대 낙농업의 태동기는 전쟁 이후 황폐해져 있던 땅을 초지로 일구고, 뒤이어 젖소를 수입한 것이 큰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젖소사육 관련 기술의 보급이 뒤따르지 못했고, 늘어나는 원유량에 대응한 유가공설비도 매우 부족했다.

나. 연유와 분유 중심의 초기 유가공산업

우리나라에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립 당시 낙농 부문은 초지 조성, 젖소 도입 통한 낙농가 육성, 생산된 우유의 처리를 위한 가공업 지원 통한 자급기반 마련이라는 일련의 프로세서를 그리고 사업이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1963년 서울우유협동조합의 가당연유 시설이 준공되었고, 1965년 한국 비락유업도 연유생산에 참여한다. 1965년에는 전량 해외에서 수입되던 영유아용 조제분유를 공장을 준공하였고, 1965년 남양유업도 천안에 공장을 준공하고 조제분유와 무가당 연유를 생산하게 된다. 1969년 해태유업 전신인 대한식품(주)은 수원에 공장을 짓고 연유와 분유를 생산하였다.

1960년대 지금의 5대 유업체(서울우유, 매일유업, 남양유업, 빙그레, 한국야쿠르트)라 할 수 있는, 서울우유와 남양유업이 유가공사업의 싹을 틔웠다.

이 당시 서울우유협동조합과 같이 유가공조합이 여러 지역에서 생겨났지만, 자본력이 미천하여 큰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였다.

냉장 유통이 일반화되기 이전이던 시기였기에 이 시기 유업체들의 생산 품목은 상온 보관이 가능한 연유와 분유가 주 생산품이었으며, 이후 아이스크림, 발효유, 시유 등이 제품화되기 시작한다.

 

2. 낙농 진흥 법제화 및 낙농 차관 도입(1970넌대)

가. 낙농유가공산업 마중물 낙농 차관

초지 조성과 젖소 수입만으로는 국내 낙농산업은 완성되기 어려웠다. 낙농 관련 기술 보급이 뒤따라야 했고, 우유를 가공해 유통할 수 있는 인프라가 동시에 만들어져야 했다.

당시 낙농 목장에 가축사양 기술을 보급할 전문가도, 이를 학습한 공간도 마련되지 못했고, 유가공산업을 지원을 자금도 확보되지 못했다.

특히 유가공산업은 대규모 설비가 필요했고, 원유도, 완제품인 우유도 쉽게 부패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가공사업에 진입할 수 있는 기업은 당시 많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낙농 유가공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법적 뒷받침이 필요했다.

1967년 제정된 낙농진흥법은 낙농산업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낙농산업이 빠른시간에 괘도에 오를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독일과 뉴질랜드 등과 합작 목장 건설을 통해 선진국 낙농 기술을 수혈할 수 있었다.

경기 안성에 조성된 한독낙농시범목장은 우리 정부가 목장 후보지를 선정 제공하면, 서독 정부가 목장 조성에 필요한 자금과 기자재, 초지 조성 및 사양 기술자를 파견하는 방식이었다. 국내 사업주관기관은 농협중앙회였고, 현재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안성팜랜드의 시초는 한독낙농시범목장이었다.

한독시범목장은 낙농업을 희망하는 농가를 위한 표준 목장과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목장경영과 젖소의 사양기술 보급을 하는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한뉴낙농시범목장은 낙농 경영, 지도 훈련 및 우량종 젖소를 생산 보급하기 위해 뉴질랜드의 재정지원으로 당시 농어촌개발공사 자회사인 한국낙농가공주식회사(매일유업 전신)가 낙농업 개발을 위한 시범 목장으로 운영하였다.

한독시범목장과 한뉴시범목장은 이후 낙농가들에게 해외 젖소를 도입해 공급함과 동시에 낙농 기술을 전파하는 시범 목장으로 역할을 하였으며, 뉴질랜드 낙농목장에 우리나라 훈련생을 파견해 낙농 훈련을 받도록 하는 등 여러 프로그램이 함께 운영된다.

또한 정부는 낙농시범목장사업과 함께 캐나다와 세계은행(IBRD)로부터 낙농차관을 도입하게 된다.

캐나다 낙농차관은 젖소 도입을 위해 대부분 사용되어 1968년 790두, 1969년 732두 등 캐나다산 젖소가 국내로 도입된다.

IBRD 낙농차관은 1971년 2월 12일 세계은행산하 국제개발기구(IDA)와 700만 달러 낙농차관협정이 조인되어, 종합낙농개발사업이 시작된다. 이 자금으로 젖소 수입, 초지조성, 낙농목장용 기자재 지원, 유가공공장 건설 등의 사업에 사용되었으며, 이후 IBRD 자금 1500만 달러 기타 800만 달러의 차관이 도입되어 총 3000만 달러 규모의 낙농 개발 자금을 확보하게 된다.

 

매일유업의 전신인 한국낙농이 비행기로 젖소를 도입하였다.
매일유업의 전신인 한국낙농이 비행기로 젖소를 도입하였다.

이 자금은 농어촌개발공사 자회사인 한국낙농가공(주)의 평택공장과 호남공장 건설과 젖소 도입에 사용된다.

한국종합낙농개발계획에 의한 젖소 도입은 1차로 IDA 자금을 활용해 4,973두(1972~1975년)가 수입되고, 2차로 IBRD 자금을 활용해 6,250두(1976~1978년) 등 총 1만1,232두가 수입된다.

대규모 젖소 도입 그리고 낙농업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이 당시 많은 낙농 목장이 우후죽순 생겨나지만, 우유 소비가 단기적으로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유업체의 대규모 유대 미지급 사태가 발생하는 혼란이 있기도 하였다. 1970년대 말 많은 농가들이 젖소사육을 포기하는 등의 부작용도 발생하였고 일시적으로 쇠고기 공급량이 증가하며 쇠고기 가격이 하락해 농촌에 연쇄 충격을 가하게 된다.

1970년대 낙농차관의 도입으로 가장 큰 변화는 유가공공장의 건설이 활발하게 이어지면서 1980년대 낙농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뒷받침하게 된다.

 

나. 유가공공장 건설과 낙농목장 창업기

1970년대는 유가공공장 건설이 본격화되던 시점이다.

1970년대 이전 정부는 서울과 인천, 부산 등 대도시에 우유처리장을 정부가 건설해 운영토록 하였는데, 해당 인프라는 지역축협 또는 낙농 관련 협동조합들이 위탁 운영하게 된다.

부산우유협동조합은 1961년 부산시 우유 처리장을 위탁운영 하면서 유가공사업에 진출했고, 인천축협은 1963년 인천시 우유 처리장 운영 대행권을 인수해 유가공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서울우유는 지금의 본점이 있는 서울시 중랑구에 1962년 유가공공장을 준공했고, 남양유업은 1964년 천안에 공장을 준공한다.

서울우유가 거대 소비시장인 서울과 수도권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였고, 민간 유업체로는 남양유업이 천안 공장이 건설하며 조제분유 시장에서 절대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정부의 축산진흥정책이 본격화하면서 정부는 낙농업의 확대를 위해 유가공공장 건설계획을 발표하고, 농어촌개발공사(현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는 매일유업의 전신인 한국낙농가공(주)를 민간합작으로 설립한다.

한국낙농은 이후 유가공공장 건설과 함께 시범목장 운영, 젖소 수입과 농가 보급 등을 담당하게 된다.

한국낙농가공은 1972년 경기 평택과 전남 광주에 유가공공장을 건설하면서 수도권에 편중되어 있던 낙농업이 호남 등 다른 지역에서도 농가 소득 품목이 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건설하게 된다.

1971년 한국야쿠르트(현 hy)는 1971년 안양에 이어 1978년 평택에 공장을 건설했고, 빙그레는 1973년 남양주1공장, 1979년 남양주2공장을 준공하면서 수도권에 집중한다.

서울우유협동조합도 1961년 서울 중랑구에 제1공장 준공에 이어 1975년 경기 용인에 제2공장을 준공한다. 소비지 인근에 제품생산을 위한 인프라를 갖추게 된 것이다.

부산우유는 부산시 소유의 우유 처리장을 1961년부터 위탁 운영하면서 유가공사업에 진입했고 1971년 1978년 1, 2공장을 건설하며 본격적인 유가공사업이 시작된다.

우유의 냉장수송이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유가공공장은 소비지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고, 낙농목장도 유가공공장을 중심으로 분포하면서 수도권과 제2의 수도라 불리는 부산·경남지역, 남양유업 천안 공장 인근을 중심으로 낙농목장이 생겨난다.

 

다. 1970년대 낙농산업 현황

낙농진흥법 제정, 1960년대 낙농종합계획 추진, 1970년대 낙농차관 도입과 젖소도입, 유가공공장의 건설 등으로 이어진 대규모 투자는 낙농업의 비약적 발전을 이끌게 된다.

1970년 2만3,624두였던 사육두수는 1979년 16만3,299두로 8배 성장하였고, 농가 수도 3126호에서 1만7170호로 늘어난다. 농가 호당 사육두수도 8두에서 10두로 늘어난다.

우유생산량은 1970년 4만8천 톤에서 1979년 38만1천 톤으로 8배 증가하고, 1인당 우유소비량도 1.6kg에서 10kg으로 늘어난다.

1971년 9%로 비교적 높았던 서울의 낙농업 비중은 1979년 1.4%로 감소했다.

대신 충남은 사육두수 기준 9.9%에서 11.8%로 그 비중이 증가하며 서서히 수도권 다음의 낙농단지로 탈바꿈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본 기사는 농장에서 식탁까지 2021년 9~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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