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과 낙농목장의 급격한 증가(1980년대)
경제성장과 낙농목장의 급격한 증가(1980년대)
  • 김재민 기자
  • 승인 2021.11.05 13:52
  • 호수 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팜인사이트=김재민 기자] 인류가 가축의 젖을 이용한 역사는 매우 깊다.

성서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처럼 소와 양, 염소를 키우는 유목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이들 젖을 활용한 음식이 발달하였다.

우리나라의 근대적 낙농 그러니까 전용 젖소 품종 사육 시도는 구한말 견미보빙사 일원으로 참여해 미국의 축산업을 시철하고 돌아왔던 최경석에 의해 시도되었다.

3. 경제성장과 낙농목장의 급격한 증가(1980년대)

가. 낙농인프라의 확충

1980년대는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면서 유제품의 소비가 급격히 증가하였지만, 우유의 생산량도 크게 늘어 수급불균형이 반복해 발생하였다.

이에 반해 우유의 품질관리는 콜드체인시스템조차 완성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목장에서 유가공공장으로의 원유 수송과 공장에서 판매업체로의 유제품 수송 모두 상온에서 이뤄지다 보니, 목장과 유가공공장의 거리도, 유가공공장과 소비지의 거리도 최대한 가까워야 했다.

쉽게 부패할 수 있는 유제품의 특성 때문인데, 이러한 물리적 거리가 와해 되기 시작한 사건이 일어난다.

콜드체인시스템이 일반화되면서부터다.

1970년대 식료품 판매점에 냉장고나 냉장쇼케이스가 보급되기 이전 우유는 주로 배달을 통해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이스박스 같은 것을 이용해 보관하는 예도 많았다.

하지만 상당수의 작은 슈퍼마켓들은 상온에 유제품을 판매하였는데, 여름철 식중독 사고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당시 농수산부는 유업체들과 수시로 소통하며 냉장쇼케이스가 설치되지 않은 업소에 우유 판매를 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압박했다.

1980년대 들어 유가공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하나의 판매점이라도 더 확보하는 방안으로 냉장쇼케이스를 제공하는 출혈 경쟁이 펼쳐졌다. 서울우유, 남양유업, 매일유업, 대일유업(빙그레) 등이 전면에 나섰다.

이 같은 현상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고 유업체 대리점이 신규 거래처를 확보할 때 냉장고를 설치해 주는 게 관례화될 정도였다.

 

유업체들이 냉장고 등을 소매점에 제공하며 출혈 경쟁을 하고 있다는 보도 내용. 매일경제. 1983.06.20.자 10면
유업체들이 냉장고 등을 소매점에 제공하며 출혈 경쟁을 하고 있다는 보도 내용. 매일경제. 1983.06.20.자 10면

이렇게 유업체들이 전방산업이 대리점과 우유판매점의 냉장 유통에 관심을 쏟고 있던 때 서울우유는 목장에서 유업체까지의 유통경로를 콜드체인화 하는 것에 힘을 쏟았고, 국내 최초로 농장에서 소매점까지 전 과정 콜드체인화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1980년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목장에서는 착유 후 철재 우유통에 우유를 가득 담았다가 우유수송트럭이 지나는 곳에 대기하고 있다가 우유통을 인계해 주는 방식으로 집유가 이뤄졌다. 목장의 위생수준이 높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상온에서 인계되는 과정에서 우유의 품질이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여름의 경우 농가들이 우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찬물에 우유통을 담가 놓는 등 노력을 하였지만, 목장에서 유가공공장까지 냉각하지 않은 채로 배송이 되었기 때문에 품질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서울우유가 유질개선비 명목으로 냉각보조금을 지급하면서 목장에서 유가공공장까지 냉장 인프라가 완성되게 된다. 낙농목장에서 착유한 원유를 냉각탱크에 보관하기 시작했고, 냉장 보관 된 원유를 유업체나 낙농조합은 냉장탱크로리에 옮겨 실어 유가공공장까지 이송했다. 소매점마다 냉장쇼케이스가 설치되고, 유업체는 유제품을 냉장트럭에 실어 유통점으로 배달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다른 유업체들도 냉장수송차량 도입 등 냉장운송을 위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던 때였는데, 서울우유가 이를 마케팅에 이용하면서 농가에 냉각보조금을 주는 것이 관례화 된다.

소매점의 냉장고 설치, 낙농목장의 냉각기 설치는 유업체들의 투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할 수 있다.

콜드체인시스템의 구축은 유가공공장이나 낙농목장이 소비지에 위치할 이유가 사라지게 하였다.

도시화로 대도시 인근에서는 목장을 경영하기 어려워지면서 도시 근교에 밀집되어 있던 목장들은 경기북부인 양주, 파주, 연천, 포천 등으로 밀려났고, 광주, 용인, 이천, 화성, 평택, 안성, 충남 등이 낙농단지로 자리 잡게 된다.

서울우유는 1984년 서울 중랑에 있던 제1공장을 양주로 이전하게 되고, 안산에 제3공장을 준공하게 된다.

매일유업은 1989년 경북 경산과 1994년 충남 아산에 공장을 건설하고, 남양유업은 1980년 충남 공주와 1988년 경북 경주, 빙그레는 1982년 김해에, 한국야쿠르트는 1985년 논산에 공장을 건설한다.

이는 수도권의 도시화가 계속되면서 안정적인 원유수급이 어려웠기 때문이며, 유가공공장이 지방에 속속 들어서면서 1980년대 낙농목장의 창업붐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게 된다.

나. 1980년대 낙농산업 현황

 

1980년대는 낙농유가공산업의 고도 성장기이다.

사육가구수가 급격히 늘어나 1980년대 중반에는 4만호를 넘어섰고, 사육두수도 1980년대 말에는 50만 두를 돌파하였다.

다만 호당사육마릿수는 10두 내외를 기록하다 1990년 15두로 규모화 추세를 보였다.

생산량도 사육두수 증가에 1980년 45만톤이었던 것이 176만톤까지 급격히 늘어나면서 원유수급불균형이 반복해 일어난다.

1인당 우유소비량도 1988년까지는 매년 2~5kg씩 늘었으나 이후 정체된다.

낙농목장도 유가공공장도 늘었지만, 늘어나는 공급에 비해 우유의 소비는 상대적으로 정체되면서 수급불균형이 반복해 발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유대 미지급 등 낙농가와 유업체와의 갈등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1980년대 말 시장개방이 추진되었는데, 신규목장이 대다수다 보니 목장의 영세성이 경쟁력 확보에 걸림돌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4. 한국 낙농·유가공산업의 1차 위기

가. 유질 논란과 고름우유 파동

지금은 롯데푸드의 우유브랜드인 파스퇴르우유는 1986년 최명재가 설립한 파스퇴르유업이 시초가 된다. 최명재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중퇴한 이후 1977년 성진목장을 세웠고 일본에서 ‘진짜우유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고 파스퇴르유업 창업을 결심하게 된다.

파스퇴르유업은 당시 조선일보 등의 주요 언론 1면에 대대적인 광고를 게재하며 저온살균을 하는 자사 우유가 진짜 우유이고, 고온살균을 하는 다른 우유는 가짜우유라는 자극적인 광고를 대대적으로 펼친다.

이는 우유 열처리 방식을 둘러싼 논쟁인데 파스퇴르유업은 섭씨 3도의 우유를 섭씨 62~65도의 저온에서 30분간 살균처리하기 때문에 유청단백질, 카제인, 비타민 등 영양분이 파괴하지 않고 우유 고유의 영양과 맛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선전했다.

파스퇴르유업은 단순히 저온살균 공법이 영양소 파괴가 최소화된다는 이야기만 하지는 않았다. 저온살균을 하기 위해 목장단위부터 유질관리를 철저히 해야했는데, 파스퇴르는 목장단위부터 온도관리, 미생물관리를 철저히 해 다른 유업체보다 1kg에 300원이나 더 비싸게 원유를 구매하고 있다는 등의 광고를 게재하며 다른 유업체들을 압박했다.

이러한 네가티브 광고는 소비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단숨에 메이저 유업체들을 위협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제품판매 가격도 다른 유업체 제품의 2배나 비싼 가격에 판매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섭씨 85도에서 우유를 수초 간 예비가열한 후 다시 섭씨 135도에서 2초 내외의 순간 살균 처리를 하는 기존 유업계는 즉각 반발하며 파스퇴르가 소비자를 현혹하고 있다고 공정거래실에 제소하기에 이른다.

해태 빙그레 매일 남양 서울우유 등 기존 16개 업체가 소속된 유가공협회는 초고온살균으로 처리한 우유도 영양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논쟁거리가 아니라는 입장이었고 이후 파스퇴르유업의 광고가 허위과장광고에 해당한다는 공정거래실의 판단이 나오면서 이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1995년 ‘파스퇴르 우유는 고름 우유를 절대 팔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의 광고를 게재하며 다시 한번 유질 논란을 증폭시켰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고름이란 우유 내 존재하는 체세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고름과 같은 성분이라고 소비자들을 자극했고, 파스퇴르는 1987년부터 체세포와 세균검사를 실시해 유방염이 걸린 소의 젖은 제품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광고를 게재하며 차별점을 부각시켰다.

‘고름’이라는 자극적인 용어가 우유와 결합하자 우유 소비는 급감했고, 다시 유가공협회와 파스퇴르와의 일전이 벌어진다.

 

고름 우유파동으로 유가공업계가 이전투구 하고있는 가운데 다시 한번 낙농-유가공업계를 충격에 빠뜨린 일이 발생한다.

고름 우유파동에 이은 항생제 우유 파동이다.

보건복지부 산하 국립보건원이 1995년 11월 20일 5개 유업체의 유제품을 수거해 항생제와 항균제 잔류 검사를 실시했는데, 동서식품의 동서우유 제품에서 항균, 항생 물질이 기준치 이상으로 잔류하였고, 나머지 유업체 제품은 기준치 이하이기는 하지만 미량의 항균, 항생 물질이 검출됐다는 내용을 발표한다.

동서우유는 1개월간 제조 정지 처분을 받게 되고, 이듬해 결국 판매 부진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 유가공사업에서 철수를 선언해야만 했다. 1987년 적자에 허덕이던 인천축협의 유가공 시설을 인수하며 유가공사업에 뛰어든 지 9년 만에 일이다.

판매 부진은 동서우유뿐만 아니라 다른 유업체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우유에 항생제가 많이 들어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회자할 정도다.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낙농 유가공업계는 우유 가격 산정 공식에 세균수에 따른 등급, 체세포수에 따른 등급제를 도입하였고, 각 등급에 따라 인센티브와 페널티를 부과하게 된다.

잔류물질 검사도 강화되면서 가축 의약품으로 허가된 모든 종류의 항생제와 항균제를 검사하며 국내산 우유의 위생과 안전성을 높이는 계기가 된다.

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과 시장 개방

1990년대 낙농산업은 시장개방이라는 위험에 노출된다.

1980년대까지 우리 정부는 농축산물 수입을 철저히 제한했다.

수입하더라도 국내 생산량 등 수급 상황을 고려해 최소한의 농축산물만을 수입하였는데, 우루과이라운드 협상(UR)이 타결되면서 관세만 내면 누구나 수출도 수입도 할 수 있도록 상황이 바뀌게 된다.

과거 농축산물을 수입하려면 농림부에 수입허가를 받고 이 내용을 관보에 게재하고 하는 등의 절차가 필요했고, 이러한 절차 때문에 국영무역 형태로 공공기관에서 수입 업무를 담당하였다.

문제는 우리 농축산업의 경쟁력이다.

농축산물을 수출하는 나라들의 축산여건은 우리와 비교해 월등히 좋았다.

땅이 넓어 농지와 초지 모두 가격이 매우 낮았다. 농지 가격이 낮다 보니 규모화가 쉽고, 농업의 기계화도 가능했다.

유제품을 수출할 수 있는 미국, 뉴질랜드, 유럽 모두 농장의 규모가 크고 선진 낙농 기술이 보편적으로 보급되어 있었지만, 우리나라 농가당 젖소 사육두수는 1990년 기준 15두에 그쳤다.

사육두수가 15두라는 것은 실제 착유 가능한 소는 7두 내외라는 것으로 농가들의 일 착유량도 100kg 내외에 불과했다.

시장개방을 하려면 농장을 규모화시켜 경쟁력을 높이고, 불필요한 비용을 줄여 가격 경쟁력을 갖춰야만 했다.

다. 낙농 발전종합대책

■ 유가공산업 현황과 과제

1980년대 우유 소비는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연평균 소비증가율이 16.6%에 달할 정도로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우유의 소비도 급격히 늘어났지만 1988년 1인당 우유 소비량이 40kg대에 진입한 이후 연평균 성장률은 2.8%로 둔화하였다.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가 모두 청년이 된 시점에 우유 소비량 증가율의 황금기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계속된 악재와 시장개방 등의 대외 여건 변화는 낙농 유가공산업의 일대 개혁과 시장개방에 따른 경쟁력 강화 대책이 필요했다.

앞선 유질 논쟁, 시장개방이라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당시 낙농산업이 가지고 있던 과제는 사육규모의 영세성, 조사료 자원 부족, 낮은 생산성 등으로 인한 경쟁력 저하가 지적되었고, 소비유통 측면에서는 음용유가 전체 유제품의 70%를 상회하면서 생산과잉 시 원유 처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 낙농 발전 방향

 

낙농발전대책 중 정부가 가장 공을 들인 분야는 집유제도를 개선이었다. 한 지역에 여러 유업체와 집유조합이 원유를 중복집유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효율을 없애고 원유 유통비용을 줄인다는 게 목표였다. 생산자 단체인 집유조합으로 일원화를 목표로 전국의 집유권을 20개로 광역화(1권역 1조합 원칙)하고 단독집유장은 단계적으로 정리하고, 낙농가에서 유가공장까지 직수송체계로 개선해 40%에 달하는 100㎞ 이상 집유노선을 전부 100km 이내로 줄인다는 것이다.

우유수급 및 가격 조절 기능을 강화해, WTO 체제하에서는 정부가 할 수 없게 된 원유가격조정을 민간자율기능으로 전환하고, 원유의 용도별, 계절별 차등 가격제를 도입해 원유의 수급이 가격신호에 따라 탄력적 조정을 유도하고, 계획생산제도 도입을 추진한다.

낙농민간전문기구를 설치해 민간자율의 수급, 가격조절, 원유배분 및 분쟁조정 기능을 담당할 상설기구로 낙농진흥회를 설치한다.

원유 검사의 공영화로 공정성 유지 및 신뢰성을 확보하고 원유 검사 결과를 신속히 농가들에게 전달해 유질 향상과 사양관리 개선을 위해 활용토록 한다. 쟁점이 되는 원유검사 비용은 원유수요자 부담 원칙으로 한다.

소비자 신뢰 회복을 위해 우유의 위생 및 품질관리 체계를 개선해 우유의 품질기준을 국제규격 CODEX·FDA 수준으로 보완하고 유가공장의 원료유·시유 제품의 잔류물질 허용한계를 설정하고 위해요소중점관리제도(HACCP)를 조기 도입한다.

가족 중심의 전업농 육성과 낙농업의 구조조정을 통한 경영합리화로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착유우 30두 이상 사육 전업낙농가 1만 호를 2020년까지 육성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 1996년 8월 24일 낙농발전종합대책이 확정되고 1996년 8월 28일부터 2개월간 낙농진흥법개정 법률안을 입법예고한다. 1996년 11월에 국회에 제출되어 1997년 7월 국회에서 심의 통과되어 낙농관련 업무를 총괄하게 될 낙농진흥회의 설립 근거가 마련되었다.

1998년 1월부터 낙농진흥회설립사무국이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9년 1월 1일 낙농진흥회가 공식 발족하여 업무에 들어갔다.

라. 1990년대 낙농 현황

 

1990년대는 시장개방과 외환위기와 같은 외부요인과 고름우유와 항생제 잔류 등 유질 논란이 겹치면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였다. 1989년 51만 두까지 늘었던 젖소 사육두수는 1991년 49만6천두까지 감소했다. 1991년 3만호였던 농가수는 2000년 1.3만호로 감소하였다.

이 기간 두 유형의 농가로 나뉘게 되는데, 시장개방, 계속된 유질 논란과 그에 따른 소비위축, 외환위기에 따른 소값 폭락과 생산비 폭증 등을 겪으며 낙농업을 포기하는 농가가 있었으며, 반대로 낙농종합대책 등의 일환으로 정부의 경쟁력 강화사업에 참여해 농장을 현대화하고, 규모를 키운 농가로 나뉠 수 있다.

이러한 여파로 젖소 사육두수는 2000년 54만두까지 늘어나고 호당 사육두수도 16두에서 41두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게 된다.

우유소비량도 1980년대에 비할 수 없지만 43.2kg이었던 1인당 소비량은 2000년 59.2kg까지 늘어나게 된다.

1990년대 낙농목장을 폐업한 농가 상당수는 목장 규모가 영세하고 기술 수준이 낮고 연로한 농가들이 주로 폐업을 선택했다.

목장 시설이 현대화되고, 규모도 커지면서 농가당 사육마릿수도 증가하자 생산비는 소폭 감소하고, 우유생산량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접근해도 1990년대 격동의 시기에 낙농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농가들이라면 어느 정도 기술 수준도 높고, 보유하고 있는 우군의 능력도 뛰어난 농가라 할 수 있다.

1990년대는 유업체의 구조조정도 함께 이뤄진다.

동서우유가 항생제 잔류사태로 폐업을 하였고, 해태유업은 해태그룹 부도 등의 여파로 시장에서 신용을 잃게 되며 부도가났고, 두산우유도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철수를 결정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유업체의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서울우유, 남양유업, 매일유업, 빙그레, 한국야쿠르트 5대 유업체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위기 속에 살아남은 정예 낙농가들은 외환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이 되자 생산비가 낮아지기 시작하면서 사육환경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또한 정부가 설립한 낙농진흥회가 우유를 구매해 주면서 과거처럼 유업체의 경영상황에 따라 유대를 떼이거나 밀리는 등의 경영 불안 상황도 사라질 것으로 예측되었고, 농가들이 돈을 걷어 자조금사업을 시작하는 등 위기 극복을 위한

그렇게 낙농업계는 새로운 2000년대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2000년대는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낙농유가공산업의 2차 위기로 명명할 정도

5. 소결

한국의 현대 낙농산업은 1961년을 전후하여 태동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0년대는 소의 도입과 증식에 집중하였다.

1970년대는 낙농차관을 활용해 소의 도입 확대와 함께 유가공시설을 본격적으로 건설했다.

1980년대는 경제발전으로 우유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유업체도 늘고, 낙농목장도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반복되는 수급불균형으로 낙농가와 유업체간 체불 유대로 갈등이 증폭하는 문제가 반복해 발생했고, 유업체나 낙농목장의 위생과 안전과 관련한 인식이 미미하다 보니, 1990년대는 유질 논란, 안전성 논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 외환위기까지 겹치면서 1990년대는 소비가 위축되고, 유업체가 도산하고, 농가들은 납유처를 찾지 못해 혼란을 겪었다.

여기에 시장개방이 추진되면서 낙농산업을 발전시킬 새로운 종합대책이 필요로 하면서 낙농종합대책이 마련되고 민관합동 기구인 낙농진흥회가 설립된다.

1990년대 낙농목장의 구조조정이 본격화 되었으며, 가구당 농가수가 증가하고, 농가당 생산성도 크게 향상되는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본 기사는 농장에서 식탁까지 2021년 9~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