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산의 시작을 도운 이방인들 이야기
한국 축산의 시작을 도운 이방인들 이야기
  • 황병무 편집위원
  • 승인 2021.11.08 10:10
  • 호수 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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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가축

 

프랑스 라스코 동굴 벽화(약 20,000년 전)
프랑스 라스코 동굴 벽화(약 20,000년 전)

축산과 종교라고 하면 거창한 제목같이 느껴지지만, 사실 원시시대의 인류가 종교적인 의식에 사냥한 짐승을 희생 제물로 그들의 신에게 바친 것을 생각하면 축산과 종교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또한 생활 일부였다. 인류는 문자가 발명되기 전부터 동굴벽화 등을 통하여 그들이 사냥했던 동물들을 묘사해 왔고, 이집트의 벽화에는 이미 인간 생활의 일부가 된 가축의 치즈나 소시지의 가공 장면도 나온다.

동물이 가축화된 연대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가장 오래되었다는 증거가 존재하는 것을 근거로, 대략 개는 약 1만 년, 양·산양·돼지는 약 8천 년, 소는 6천 년, 말·당나귀는 약 4천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그 지역의 풍토와 환경에서 서식하는 동물을 가축화 한 인류는 가축의 고기와 그 부산물을 생존을 위한 귀중한 동물 단백질 공급원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소고기와 우유가 묘사되어 있는 고대 이집트의 벽화
소고기와 우유가 묘사되어 있는 고대 이집트의 벽화

예로부터 인류는 사냥한 동물을 도살 해체하면, 그 고기는 식용으로 하고 위, 내장 등 부산물은 옷, 뼈는 사냥 도구, 신축성이 있는 위는 운반 도구로 활용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야생의 동물을 가축화하면서, 이동 시에 먹을 동물의 위에 담은 우유가 고체로 변하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치즈를 발견하게 되었다. 소시지 또한 동물의 내장에 혈액이나 부스러기 고기를 채워 익혀 먹은 것이 소위 소시지이다. 이렇듯 스스로 자연스럽게 터득한 인간의 지혜로 아주 오래전부터 축산물은, 인류 식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다양한 형태의 요리와 그 가공품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한편, 돼지는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능력과 잡식성에 의한 사육의 용이성으로 가축화가 비교적 쉬운 동물이었다. 한 해에 두 번 출산이 가능하고 1회에 12~15마리를 출산하여 가축 중에서는 가장 다산이다. 또한 돼지는 도살 해체 후, 고기를 비롯하여 그 부산물까지 전체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어 부가가치가 높은 가축이기 때문에 전 세계적인 분포를 가지고 있다.

동물의 가축화와 인류의 이용, 농업에 있어 작물의 선택과 식문화 등은 기후나 토양 등 지리적 특성에 의해 결정되고 이로 인해 지역마다 다르게 발전했다.

유럽처럼 어떤 지역은 가축사육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문화와 축산식품 중심의 식문화가 발달한 곳이 있는가 하면, 한반도처럼 벼재배 등 농산물을 더 적극적으로 재배하고 이용하는 지역도 있다.

이렇게 다르게 발전한 농업과 가축 이용의 역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 단위로 특화되어 있었지만, 이후 교통의 발전과 인구의 이동 과정 중 자연스럽게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농경문화였던 한반도에 서양식 가축사육과 이용도 이러한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특히 그중 선교사들의 이주, 한국전쟁 중 군인 등 급격한 정세변화 속에 새로운 식문화가 전파되기도 하였다.

특히 오늘 우리가 살펴볼 천주교에 의한 축산업과 축산식문화의 전파는 매우 재미있는 사례인데, 현대양돈기술의 전파가 60여 년 전 제주도에서 시작된 이야기나, 100년 전 경북 칠곡군 왜관읍의 성베네딕도수도원에서 시작된 정통 독일식 소시지의 전파, 전북 임실군의 치즈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현대 축산업과 축산식품의 시초라고 불릴만한 사례다.

선교보다 중요했던 제주 주민의 먹고 사는 문제

제주돼지 아버지 '맥그린치' 신부

한라산 중턱(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 자리 잡은 이시돌 목장은, 1961년 11월 말에 아일랜드 출신의 사제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Patrick James Mcglinchey, 한국명 임피제)가 주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산간지대의 넓은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해 건립한 목장이다.

목장의 이름은 필자도 헷갈렸지만, 영어 이름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의 성인 이시도르(Isidoro, 1070~1130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성인은 농업의 수호성인이자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성인 중에서는 드물게 가난한 농부 출신이다. 그가 어느 눈 내리던 날 보리를 방앗간으로 운반하는 도중, 새들이 먹을 것이 없어 떨고 있는 것을 보고 보리 나락의 절반을 새들에게 주었다. 줄어들었을 보리가 방앗간에 도착하자 다시 가득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는 또한 물을 잘 발견하는 능력이 있었는데, 마드리드의 성 이시도르 축제 기간(5월11~15일)에는 분수에서 샘솟는 ‘성인의 물’을 마시는 습관이 있다.

아마도 맥그린치 신부는 수많은 기적을 보이며 농업에 한평생을 바친 스페인의 성자 이시도로를 생각하며, 제주 4.3사건과 한국전쟁 등으로 생활고에 찌들고 허덕이는 가난한 제주민들의 자력갱생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이 목장의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1928년 6월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이라는 마을에서 수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가축 진료에 따라다니며 소년 시절 수의사를 꿈꾸었던 그가 척박한 제주도에 목축업을 일군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제주도의 선진 돼지사육기술을 살펴보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성이시돌목장을 두 번이나 방문하였다. 왼쪽 두 번째 박정희 대통령, 세 번째 맥그린치 신부
제주도의 선진 돼지사육기술을 살펴보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성이시돌목장을 두 번이나 방문하였다. 왼쪽 두 번째 박정희 대통령, 세 번째 맥그린치 신부

1954년 4월 한국(당시 중앙성당 한림공소)으로 부임 받은 가톨릭 콜롬반 외방 선교회 소속 24세의 아일랜드 출신의 맥그린치 신부는, 한국전쟁 직후의 피폐했던 제주에서 가난하지만 계란과 쌀을 가져다주며 따뜻하게 맞아주는 주민들에게 감동하였고, 못 입고 못 먹으면서도 물질과 밭일로 가정에 헌신하는 제주의 여성에게 많은 것을 배우며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난을 벗어나는 일이 신앙을 전파하는 것보다 우선이라 생각하고 그 길을 터주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 일은 맥그린치 신부가 당시 경기도 계엄사령관 앤더슨에게 부탁하여 임신한 요크셔 한 마리를 얻어와 돼지를 키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후 어미돼지가 낳은 새끼 돼지를 1마리씩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분양한 돼지가 나중에 새끼를 낳으면 그중 한 마리를 반환하게 했다. 현재 농협축산경제가 벌이는 있는 사회봉사 활동의 일환인 나눔축산의 선구자인 셈이다. 이것이 이시돌 목장의 시초가 되었고, 주민들로부터 ‘돼지 신부(pig priest)’라는 별명을 얻는다. 아일랜드 고향 친구와 친지에게 부탁한 돈으로 돼지를 키울 땅(250만 평)을 사서 한라산 중턱에 이시돌목장(당시 명칭은 이시돌중앙실습농장)을 마련한 것은, 부임 7년 차인 1961년이었다.

그는 단순히 돼지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사업으로 접근했다. 1962년 농림부 소관의 재단법인인 이시돌 농촌사업개발협회를 설립하여 미국에서 옥수수 4만5,000톤을 수입, 한라산 중턱 산간 마을 인근에 양돈 개척농가단지를 조성하고, 대규모 번식돈과 비육돈 양돈장을 개설하여 양돈 개척 농가들의 양돈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것이 제주도에서 대규모 양돈사업이 시작된 모태이다. 1964년 4월에 성 이시돌 배합사료공장이 가동 되었고 1969년 4월 뉴질랜드에서 면양과 종돈이 도입되었다. 1960년대 말에는 제주산 돼지의 홍콩 첫 수출도 이 협회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1971년부터는 일본에 돈육수출을 개시했다. 대일 수출을 위해 금악리에 돼지 도축장과 냉동저장시설을 완비하며 1977년까지 지속되었다. 1970년대에는 국내 돈육가격의 상승과 돈육소비의 증가 등으로 동 협회에서 사육하는 두수가 12,700두(1976년)에 이르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사업 내부를 들여다보면 당시로 서는 엄두도 못 낼 삼원교잡종과 웅취 제거를 위한 거세 개념, 배합사료공장 건설, 도축장을 통한 부분육 유통 선도 등 모든 선진 기술이 망라되었으니 깜짝 놀랄 일이 아닌가?

한 마리의 돼지를 가지고 10년도 채 안 되어 동양최대의 양돈장으로 성장시키며 한국 최초의 전업목장을 조성하였고 이시돌 의원을 통해 수많은 환자들에게 인술을 베푸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것을 성경에서 말하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라 불렀다. 1973년 당시 박대통령은 이 목장을 두번이나 방문하며 그 성공에 관심을 표명하며 학생들이 선진 축산기술을 배울 수 있게 환경조성에 나서기도 했다.

 

제주에서 업적을 인정해 수여된 맥그린치 신부의 명예시민증
제주에서 업적을 인정해 수여된 맥그린치 신부의 명예시민증

이렇듯 성 이시돌 목장은 그 당시에 벌써 사료공장, 종돈, 사양기술 통일 등 소위 3통(統)을 구비한 양돈계열화 사업으로 추진하여 제주도가 양돈 전문지역으로 특화되는 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가난한 주민의 삶에 일자리 창출을 통해 도움을 주고자 이 목장에서 키우는 양 38마리로 출발하여, 고향 아일랜드의 아버지가 보내준 물레로 양털을 꼬아 실을 만들어 털양말을 짠 것에서 시작한 한림수직은 스웨터, 모자, 장갑, 머플러, 숄, 가디건 등 다양한 제품으로 확대되었다. 새 교우였던 소녀가 육지에 돈을 벌려고 나갔다가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되어 만들게 된 한림수직의 제품은, 직접 키운 양털 순모(pure wool 100%)를 가지고 제주도 여성들이 한 땀 한 땀 대바늘로 짠 명품 수제 니트로 탄생했다. 한림수직은 지역의 처녀와 주부들 1,300명에게 기술과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그녀들에게 자부심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2004년 폐업한 한림수직의 수제 명품 제품을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시돌목장은 근시안적 시야를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축산업을 통한 지역개발이다. 황무지를 아름다운 목장으로 바꾼 외형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요즘 말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사업시스템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이시돌목장은 1990년 1,000마리 이상 돼지사육을 금하는 관련 법 개정으로 양돈업을 포기하고 제주 축산농가에 무료다 시피 분양하며 사육관리 기술을 전수하였으니, 지금도 이시돌목장의 양돈 명맥은 제주도의 양돈업에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개발이익의 지역주민 환원이다. 이시돌목장은 지역개발 과정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지역주민에게 환원시켜나갔으며, 남은 이익은 사회복지와 지역교육을 위해 투자하는 토탈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러한 사례는 의식주 해결의 단기적 목표에 머무르는 국제적 구호활동 등을 볼 때,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사례로 생각된다. 한 사람의 헌신적 애정과 사랑이, 벽안의 외국인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눈물과 땀으로 동참한 제주 주민이 결국 그 개발의 주인공이 되는 유례없는 개발사례가 된 것이다.

독일 수도사들의 향수병을 고쳐준 수제 소시지

분도소시지와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시지는 인류가 사냥한 짐승을 해체하여 먹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생활의 지혜로 전 세계 각 지역에서 독특한 제법과 맛을 지니며 발전해 왔다. 예를 들면, 돼지의 창자와 혈액을 이용하여 만드는 우리나라의 전통 순대는 독일의 블루트부어스트(Blutwurst), 영국의 블랙 푸딩(Black Pudding), 프랑스의 부당 누아(Boudin noir), 스페인의 모르시야(Morcilla)와 비슷하다.

독일은 특히 소시지 식습관이 발달한 나라로 그 종류만 해도 1,500종도 넘는 육가공 천국이다. 독일에서 소시지가 발달한 이유는 게르만민족이 예로부터 수렵에 뛰어났고 건조하고 서늘한 기후가 고기의 보전에 적합한 점, 휴경지 방목으로 축산이 성행한 점을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먹을 것이 없는 한겨울을 나기 위해 김장을 하듯이, 독일 농가는 봄에 돼지를 사서 가을까지 살집을 키우고 11월이 되면 방목을 하여 나무열매 등을 먹게 한 다음, 12월에 돼지를 도축하여 각종 소시지를 만든다. 그래서 독일의 식탁은 하루 세끼 모두 소시지가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독일인 9명이 1909년 왜관 땅을 밟는다. 독일 가톨릭교회 수도자들이 한국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파견된 것이다. 베네닥도회는 가톨릭교회 내 수도승 수도회들 가운데 하나로성 베네딕도(St. Benedictus, 480-547경)가 저술한 수도규칙을 따르는 남녀 수도회의 연합을 말하는데, 한자어를 음차하여 분도회(芬道會)라고 하였다. 한국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 만드는 소시지를 분도소시지라고 하는 것은 이것에서 연유한 것이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전경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전경

이곳과 소시지와의 인연은 독일에서 온 9명의 수도자들이 수도회 정신에 따라 공동체의 자급자족 원칙인 ‘기도하고 일하라’는 가르침에 따라 그들 고향인 독일의 일용할 음식인 소시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아마도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면 김치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머나먼 타국에서 고향의 음식이 그리워 소시지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만든 소시지는 공동체 탁자에 올리거나 공동체 은인들에게만 선물로 전해졌다. 그러던 것이 그 맛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2011년 ‘분도식품’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등록하여 일반인들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생산하는 소시지는 신선한 국내산 고기와 소금을 이용해 정통 독일식 수제 소시지를 생산하고 있다. 다만, 향신료는 전부 독일에서 직접 들여와서 쓰고 있는데, 고향의 맛을 내는 데는 본고장 향신료가 필요했을 것이다

일본이 미국인이나 영국인 등으로부터 햄 소시지 기술을 전수 하여 만든 것이 1870년대 말이고,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 우리나라의 대중적인 햄 소시지가 시장에 나왔는데, 1909년에 왜관수도원의 정통 독일식 소시지를 만들었으니 그 시기가 상당히 빠른 셈이다. 그 당시 이국인이 만든 소시지를 처음 맛본 한국인도 분명히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색다른 맛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필자도 1995년 일본전국식육학교에서 연수 시, 독일 마이스터 초빙 시연회에서 정통 독일 소시지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았지만, 특히 향신료가 인상적이었다. 독일은 향신료 제조 기술도 발달하여 원료 고유의 향을 첨단기법을 통해 잘 살리고 있으며 순도도 높다. 그래서 마이스터가 만든 정통 독일 소시지를 시식했을 때, 한국의 복합 스파이스 향에 익숙한 나에게는 조금 거부감이 드는 향이었다.

독일 소시지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재료를 가열하지 않고 먹는 비 가열소시지(로부어스트, Rohwurst), 가열이 끝난 원료를 일부 포함하는 소시지(코흐부어스트, Kochwurst), 케이싱에 충진하여 가열하여 먹는 소시지(브류부어스트, Brühwurst)로 크게 크게 나뉘는데, 분도소시지는 브류부어스트에 해당한다.

 

그림6 분도푸드가 생산하고 있는 소시지들
분도푸드가 생산하고 있는 소시지들

한편 소시지(Sausage)의 어원에 대한 학설 중 하나에는, 고대 독일어에서 ‘Sau'는 암퇘지를 뜻하는데, 그 ’Sau'와 약간 쓴 나는 향신료인 ‘세이지(Sage)'라는 단어가 합성되어 “소시지(Sausage)”라는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소시지는 암퇘지의 고기에 쓴 향신료로 맛을 낸 독특한 음식이라는 것이다. 향신료는 육가공제품의 기호성, 보존성을 높이는 역할로 필수 불가결한 식재로 자리 잡았다. 분도소시지와 같은 브류부어스트에 주로 쓰이는 향신료는 흑후추(black pepper)와 백후추(white pepper)인데, 기호에 따라 생강, 카옌 페퍼(cayenne pepper), 캐러웨이(caraway, 회향초), 카르다몬(cardamon) 등을 넣는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정통 독일 소시지인 분도 소시지는 과연 어떤 향신료로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임실치즈의 아버지 지정환 신부

지역 주민 삶 개선 위해 낙농기술 전파

치즈의 기원은 양이나 산양을 가축화한 것이 기원전 8000년 전이니까, 아마도 그때부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발생 장소는 통상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인 지금의 시리아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전해진다. 고대 오리엔트 문명을 지칭하는 ‘비옥한 삼각지대’라고 말하는 이 땅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번성하였고, 또한 성서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과도 겹쳐지는 종교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이 비옥한 땅에서 당시 야생의 보리가 자생하고 있었고 산양이나 양이 이것들을 먹으러 몰려들었을 때, 인간이 이 동물들을 잡아 가두어 원시적인 목축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포획한 양들을 잡아서 먹으면 그만이지만, 인간의 지혜는 젖을 이용하면 항시적으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이동 시에 사용하는 수통의 대용으로 쓰던 동물의 위장 주머니에 넣어둔 양젖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치즈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듯 자연스럽게 인간의 식생활에 자리 잡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서도 치즈는 “남자를 강건하게 하고, 여자를 아름답게 한다”라고 묘사되어있다. 꿀, 양과 함께 로마제국 병사의 귀중한 식량이었던 치즈는 로마제국의 확대와 더불어 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임실치즈의 아버지 지정환 신부
임실치즈의 아버지 지정환 신부

치즈라는 음식에 대해 일반인들이 거의 모르던 우리나라에서 치즈를 직접 만들고 유통한 사람이 있다. 임실치즈를 만든 이는 1959년 12월 가톨릭 사제의 신분으로 한국에 온 벨기에 신부 디디에 세스테벤스(Didier t’Serstevens)이다. 1961년 전주교구 부주교였던 김이환 신부가 그에게 ‘지정환’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사람들에게는 지정환 신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31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귀족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집배원을 꿈꾸었지만, 극장에서 한국전쟁 관련 영화를 보고 헐벗고 굶주리는 한국을 생각하며 사제가 되어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아무 관련이 없는 먼 나라 사람들의 어려움을 내재화하고 자기 한 몸을 헌신하여 봉사를 결심하는 사람은 박애라는 특별한 유전자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범인은 생각할 수도 없는 위대한 결단이자 용기이다.

부안에 이은 그의 두 번째 부임지인 임실은 경관은 뛰어나나 농사를 하기에는 척박한 자연환경이었고, 주민들은 가난을 거듭하며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다. 임실로 부임한 지정환 신부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활용하여 일부 깨어있는 젊은이들과 산양을 키우고 그 산양유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치즈를 생산하여 지역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1968년 프랑스에서 치즈 기술자가 임실을 방문하여 카망베르 치즈(1791년 프랑스 노르망디지방의 카망베르 마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살균되지 않은 우유로 만든 부드러운 질감의 치즈)를 제조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1969년 지정한 신부가 동료들과 함께 유럽에서 치즈 제조 기술을 직접 배우고 와서 1970년 체더치즈를 만들어 지금의 한국형 임실치즈로 성장했다. 임실치즈는 우유 및 산양유 등과 함께 스타터(Starter)와 렌넷(Rennet)등을 한국지형에 맞게 사용하여 생산한 한국치즈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만든 치즈를 지정환 신부는 치즈 기술자에서 치즈 세일즈맨의 일인이역을 하기 시작한다. 조선호텔의 문을 수없이 두드리며 드디어 납품을 시작했고 이어서 입소문이 나면서 모차렐라 치즈로 영역을 넓히며 임실치즈는 한국 임실을 원산지로 하는 대표적인 치즈로 자리를 잡았다.

 

조선호텔에 공급되기 시작한 임실치즈
조선호텔에 공급되기 시작한 임실치즈

위의 세 가지 사례에서 보듯이 종교적 사명을 띠고 한국에 온벽안의 외국인이 축산을 통해 명품을 만든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생각된다. 명품은 시대의 인기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 속에 녹아있는 올곧은 정신, 정통제법, 원료의 충실성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종합작품이라는 것을 새삼 우리들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본 기사는 농장에서 식탁까지 2021년 9~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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