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50년 축산 외길 인생 마무리하고 은퇴하는 이재용 한국종축개량협회장
[특별인터뷰] 50년 축산 외길 인생 마무리하고 은퇴하는 이재용 한국종축개량협회장
  • 옥미영 기자
  • 승인 2022.02.24 11:32
  • 호수 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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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업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분투했던 시간의 기록

[팜인사이트= 옥미영 기자]

가축 사육 경력이 수 십여 년 넘는 축산인, 가업을 잇는 후계 축산인, 어려움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축산인. 축산업계엔 각양각색의 인생 스토리를 가진 축산인들이 많다.

하지만 가축사육은 물론 중앙정부 정책 담당자로서 축산부문의 굵직한 정책까지 입안한 ‘현장형 축산전문가’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생업으로 가축을 기르고, 축산을 전공하고, 농장 관리자를 거쳐 지방직 공무원과 중앙직 공무원에 이어 축산물품질평가와 가축개량기관의 수장까지 지낸 이재용 회장이 바로 장본인이다.

그가 외길 인생으로 걸어온 지난 50년의 발자취는 곧 한국 축산의 역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 축산의 기본 토대와 양분이 되어 현재 대한민국 축산을 움직이는 성장동력이 되고 있어 새삼 놀랍다.

2022년 2월 말로 종축개량협회장의 임기를 마무리하며 오직 축산의 외길을 걸어온 이재용 회장이 퇴임을 한 달여 앞두고 축산업과 축산농가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분투했던 지난 시간을 담담히 그리고 때론 열정적으로 회고했다.

“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집안의 별종 축산인이었어요.”

초등학교 5년 시절의 이재용. ​​​어려서부터 토끼, 닭을 키우며 용돈벌이를 하는 등 유별났던
그를 주위에선 '토끼아빠'라고 불렀다. 

이재용 회장은 어려서의 자신을 이렇게 회고했다. 유년기부터 유난히 가축을 좋아했던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닭과 토끼를 키워 팔며 용돈을 스스로 조달해 쓸 정도였다.

먹을 것 자체가 귀했던 시절 뚝방의 풀만 베어 갖다 먹이면 귀한 고기가 되는 ‘축산’은 소년 이재용의 마음을 매료시켰다.

쏠쏠한 용돈 벌이였던 토끼 사육은 고등학교 시절엔 그의 생업이 되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셨던 부친이 5·16 쿠데타로 하루아침에 정년이 단축돼 강제 퇴직하고 이후 손을 댄 사업들이 줄줄이 실패하면서 학비를 직접 조달하지 않으면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토끼와 닭을 키워 팔아 어렵게 학교를 마친 그는 재고의 여지없이 ‘축산대학’을 선택하며 전문 축산인으로 인생을 설계하게 됐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별종 축산인’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돈사와 우사, 양계장과 사료공장 그리고 유가공공장까지 학교의 축산 실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가축과 함께 생활했다.

기숙사에 적은 두었지만, 그의 집은 실습장이나 다름없었다.

“모르겠어요. 나는 마냥 그렇게 가축이 좋더라고.”

 

대학을 졸업한 뒤 입사한 곳도 양계장이었다. 이왕이면 현장경험이 있는 학생을 추천해 달라는 양계장의 요청에 대학 은사였던 故 오세정 교수가 이재용 회장을 추천한 것이다.

당시 그는 농협 입사를 목표로 시험에 매진하고 있었지만, 현장에 직접 뿌리내리고 자영을 권하는 학교 분위기를 거역하기 어려웠다.

특히 실습장을 제 집처럼 여겨 가축 생리에 밝았던 데다, 대학 시절 양계장에까지 취직해 사료 급여와 계분 청소, 집란 등 축산현장을 생생히 체험한 그를 눈여겨 본 오 교수는 "현장 속으로 들어가 일하라"며 그를 설득했다. 당시 이 회장은 1968년 북한 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군 복무기간이 6개월 연장되면서 복학 날짜가 연기돼 공백이 생기자 김해에 있는 양계장에 들어가 6개월간 호되게 일한 경험을 갖고 있던 터였다. 외출도 없이 두달을 양계장에서 예비군복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일했던 그는 양계에 관해 이미 전문가 수준이었건 것이다.

첫 직장으로 양계장에 입사해 농장장까지 올라갔으나 첫 직장은 어머니의 병환 수발 때문에 몇 년 뒤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 회장은 “대학 시절 6개월간의 양계장 말단직원으로서의 경험 그리고 첫 직장, 양계장에서의 경험 모두 내 축산 인생의 값진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대학 졸업후 입사한 양계장의 농장장 시절 직원들과 함께한 이재용(앞 줄 가운데).

 

이후 우연한 기회에 공무원 시험을 치르게 된 이재용 회장은 1974년 경북 군위군 농촌지도소의 지도직으로 공무원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축산지도사로 1년 반 즈음을 일하다 군위군청 축산계에 들어간 그는 당시 군위에 사육 붐이 일어난 ‘양돈사업 진흥’에 매진하게 됐다.

과수원에 거름을 뿌릴 용도로 농장마다 돼지를 몇 마리씩을 키우던 것이 70년대 중반의 국내 양돈업 모습이었다.

하지만 국민 소득이 늘면서 사과, 배보다 돼지를 키운 값이 몇 배 좋아지자 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돈사가 지어지는 등 양돈업은 전업화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재용 회장은 “쌀농사, 보리농사 지어서는 부자 되기 어렵다. 돼지처럼 새끼를 많이 낳고 빨리 크는 축산이어야 부자 될 수 있다”며 ‘축산부국’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 시기 그는 대학 시절 축산대학에서 배웠던 이론을 현장에 적극 설파하고, 경북도 국립종축장에서 좋은 돼지를 골라 농가에 공급하면서 군위군을 ‘전국 제1의 양돈군’으로 만들기 위해 힘써 나갔다.

양돈 농가들과 마음이 맞아 밤샘 토론을 즐기며 더 나은 양돈을 고민했고, 양돈협회 경북도지회를 만드는 창립 멤버로도 직접 관여하는 등 열정을 불태웠다.

특히 가축을 키우는 데 애정이 컸던 그는 공무원 생활을 하며 직접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양돈장 한쪽에 방을 만들어 신혼살림을 마련한 그는 아이를 낳아 키우며 편찮으신 어머님까지 모시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양돈장을 돌보고 50리 비포장길을 오토바이로 출퇴근했다.

몸은 고되었지만, 쑥쑥 자라는 돼지만 보아도 마음만은 풍성했던 때였다.

하지만 돼지사육 3~4년 차에 그는 엄청난 시련을 맞닥뜨리게 된다.

79년 양돈 대불황이 닥친 것이다.

5만 원에 사서 넣은 새끼 돼지가 출하 시점에 2만 8천 원이 되었다. 사상 유례없는 불황에 사료 값을 감당하지 못해 빚이 눈덩이처럼 불면서, 이 회장은 극단적 선택까지도 생각하는 등 그토록 좋아했던 축산으로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

하지만 돼지는 임신과 비육 등 9개월이면 출하를 하게 되니 ‘딱 1년만 어떻게든 버텨보면 살아날 방도가 있을 것’이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월급은 물론 아내의 곗돈을 모아 사료비를 내고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외상까지 끌어다 쓰면서 1년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3만 원을 넘지 못했던 돼짓값은 1년 만에 거짓말처럼 20만 원으로 뛰었다. 그 간의 모든 고생이 한순간에 끝나는 순간이었다.

돼지사육으로 그의 나이 서른 살에 적지 않은 돈을 모았지만, 그보다 더 큰 깨달음이 있었다.

이재용 회장은 “내가 시골에서 돼지를 키울 것이 아니라, 축산농가들이 안심하고 사육에만 매진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1983년 농림부 축산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이 회장은 현장에서 갈고 닦은 경험과 고민을 전 축종의 다양한 정책 수립으로 현실화해 나갔다.

한우산업종합대책을 비롯해 잉여원유차등가격제 시행 등 원유 수급 안정, 총체보리의 사료화, 가축분뇨의 자원화를 위한 자원순환형 농업 추진은 재임 시절 만들어낸 굵직한 정책들이다.

이 회장은 2000년 쇠고기 시장 전면 개방에 대비한 한우산업종합대책 수립과 소 등급제 도입과 그리고 이로 인해 정착된 냉장 유통시스템 정착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소 등급제 의무시행과 관련해선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한우의 품질고급화를 위해 ‘제도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강한 신념이 있었지만 반대하는 이들의 민원이 극심해 목숨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였다.

소 등급판정을 위해선 냉장 보관이 이뤄져야 하는데 젖소고기의 경우 냉장고에 들어가면 색깔이 갈색으로 변하게 되어 둔갑판매가 어려워지는 등 불법적인 관행으로 이득을 취했던 이들의 반대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냉동체 등급판정이 시행될 경우 갓 잡은 소의 혈관에 강력 펌프로 물을 주입해 고기 무게를 늘리는 불법‧부정 유통도 원천적으로 차단될 수밖에 없어 이들의 반발 또한 엄청났었다.

시간이 갈수록 민원이 사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거세지면서 축산국장과 차관까지 나서 그가 제안한 문서를 수차례 반려하고 급기야 ‘의무가 아닌 임의제도’ 시행으로 궤도 수정을 지시했지만, 이 회장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 사람들(국장 장‧차관)은 민원을 겁냈지 축산을 우선시 하지 않았어요. 나는 ‘국장님은 어차피 떠날 사람 아닙니까? 나는 평생을 축산국에 말뚝박아 놓은 사람입니다. 축산을 끝까지 책임지실 거 아니면 사인해 주십시오’라고 맞섰어요.”

93년 소 등급제 의무화는 결국 이재용 회장 뚝심으로 현실화됐다.

 

소 등급제 의무화 사업은 이재용 회장이 입안한 축산업의 핵심 정책 중 하나로 꼽힌다. 소 등급판정 의무화 제도 시행 15년 이후 그는 축산물등급판정소장으로 부임한다.
소 등급제 의무화 사업은 이재용 회장이 입안한 축산업의 핵심 정책 중 하나로 꼽힌다. 소 등급판정 의무화 제도 시행 15년 이후 그는 축산물등급판정소장으로 부임한다.

 

2007년 보리 소비 급감은 위기를 기회로 만든 사례다.

양곡 적자를 이기지 못한 정부가 수매를 중단하자, 총체보리 사업으로 보리를 ‘사료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경종 농가와 축산농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사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생 볏짚을 사료화해 곤포사일리지를 만든 ‘공룡알’ 제조가 시작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가축분뇨가 오·폐수로 분류되어 논밭에 살포되지 못했던 것을 논밭에 살포할 수 있도록 ‘가축분뇨관리 이용에 관한 법률’을 환경부와 농림부 공동 시행규칙으로 개정하는 등 자원순환형 농업을 추진한 것은 축산업의 대 전환점이 되었다.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던 가축분뇨가 자원으로 탈바꿈한 과정에도 일화가 있다.

당시 농림부 김주수 차관과 환경부 곽결호 장관이 친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차관에게 모임의 동행을 요청해 환경부 장관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됐다.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대뜸 그랬죠. ‘장관님, 비료가 귀할 때 소변이 급해도 집에 가서 참았다가 누고는 하지 않았느냐’라고요.”

가축분뇨는 양질의 자원이라는 농림부 서기관의 당찬 주장에 환경부 장관도 흔쾌히 동의했고, 결국 그는 환경부에 6개월 파견 근무하며 축산폐수처리에 관한 법률을 가축분뇨관리 이용에 관한 법률, 즉 자원화법으로 개정했다. 시행규칙은 환경부와 농림부 공동령으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분뇨 자원화를 위한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 농촌진흥청엔 가축분뇨 전문가가 전무했던 것이다. 당시 박현출 축산국장에게 간곡히 요청해 농촌진흥청장이 직접 주재하는 농림부-농촌진흥청의 책임자급 연석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장은 “가축분뇨의 자원화가 아니면 축산의 미래는 없다. 화학비료에 우리나라 농업, 농사를 맡길 것이냐, 이 좋은 자원을 가지고 유기질 비료를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며 진흥청 박사들을 설득했고, 가축분뇨의 유기질 비료화를 위한 세부 방안과 과제를 도출해냈다.

하지만 그가 농림부를 떠난 뒤, 가축분뇨 자원화 법에서 농림부령은 빠지고 환경부 소관으로 변경되어 버렸다.

 

이재용 회장의 노력으로 결국 2000년대 들어 가축분뇨 자원화가 본격화됐다. 분뇨 자원화의 일환으로 액비화 사업이 추진됐던 지난 2002년 당시 농림부 축산경영과장시절 이재용 회장이 월간양돈 10월호에 직접 기고한 내용.

 

이재용 회장은 생산뿐만 아니라 유통부문에서도 새로운 사업을 발굴해 제도화했다.

1993년 유통 계장을 맡으면서 양돈 수출단지를 만들어 일본에 돼지를 3억 불까지 수출했다.

식육 유통 개선을 위해 식육 업자에게 식육처리기능사의 국가기술 자격증을 부여한 건 획기적인 정책으로 평가된다.

정육을 가공하는 사람들에게 ‘국가공인 기능사’를 줘야 한다는 제안에는 비웃음도 많이 샀다.

노동부 노동진흥과장은 “도대체 국가기술자격을 어떻게 생각하길래, 고기써는 사람한테 국가가 자격증을 부여해야 하는가”라며 핀잔을 주었다.

이 회장은 정육업자들을 교육해 이들의 기술력을 높여 자긍심을 높여 나가야 한다고 노동부 과장을 직접 설득했다. 고기파는 사람들을 무조건 범죄자 취급하며 행정허가 취소나 벌금부과 식의 규제만 하고는 식육 유통이 발전할 수 없다고도 말했다. 이는 정육업자들의 기술력은 곧 국내산 축산물의 상품 가치 제고와 직결된다는 판단도 컸다.

“일본에 가보니 축산물 가공, 포장이 이미 예사롭지 않더라고요. 아차 싶었어요. 국가가 나서 기술자격증을 부여하고 인정하면 부위도, 가격도 속여 팔지 않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국가가 공인해 준다는 자긍심이 있으니까요. 독일의 마이스터 제도를 설명하면서 우리도 식육 기술인들을 사회적으로 대우해 주어야 생산과 유통이 함께 발전한다며 노동부를 설득했습니다.”

결국, 그의 판단이 옳았다. 1회 시험에만 4~5천 명이 응시하는 등 ‘국가공인자격증’으로 음지에 있는 식육 업자들을 양지로 인도했다. 소, 돼지의 등급과 부위별 유통 그리고 상품의 정형이 이를 계기로 차츰 발전한 것은 물론이었다.

 

유기축산물협상을 위해 캐나다 국제 회의에 참석했던 농림부 공무원 시절의 이재용. 

 

축산에 대한 편견과 민원 등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굵직한 축산 정책을 입안해 현실화한 이재용 회장은 1999년 축산직 최초로 부이사관에 승진했다. 당시만 해도 농림부 내에선 부이사관 승진을 놓고 수의, 축산, 토목직 등 특수 직군의 경쟁이 상당했었지만, 엄청난 세를 과시하던 수의, 토목직군을 모두 꺾은 것이다.

축산부문의 정책 입안과 관련한 고집 때문에 장관, 차관, 국장 등과 적잖은 갈등도 겪고 때론 미움도 샀지만, 결국 산업을 위한 열정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가 농림부 재직시절 핵심 정책으로 추진했던 축산물 등급판정사업은 1989년 종축개량협회에서 시범사업으로 시행하다, 1993년 의무사업 시작과 함께 축산물등급판정소로 조직이 정비된다.

그로부터 정확히 15년 뒤인 2007년 농림부 공직생활을 마친 후 축산물품질평가원의 수장으로 부임했고, 3년 뒤인 2010년엔 선출직인 한국종축개량협회 회장에 당선되며 가축개량사업에 열정을 쏟게 된다.

축산현장은 물론 지방직, 중앙직 축산 공무원으로 35년을 지내온 이 회장의 묵직한 경력은 축산물품질평가원과 종축개량협회를 이끄는 데도 현장 실무형 축산전문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했다.

축산물품질평가원장 시절 그는 축산물 이력제를 현장에 적용해 한우고기가 한우로 판매될 수 있는 시스템을 확보했으며, 당시 축산물등급판정소를 이력제 시행 주체 기관으로 지정받아 축산물 유통 전문 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축산법 개정을 통해 축산물등급판정소를 지금의 축산물품질평가원으로 확대, 개편했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현장 중심에서 많은 농가와 소통을 했던 것이 밑거름이 되면서 이재용 회장은 축평원장 퇴임과 동시인 2010년 종축개량협회장에 당선됐다.

 

2010년 종축개량협회장에 취임한 이재용 회장. 축평원장 퇴임 후 당초 그는 경북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할 계획이었지만, 자신의 성격상 강단에서 교육하는 것보다 농가와 직접 접촉하는 종축개량협회를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2010년 종축개량협회장에 취임한 이재용 회장. 축평원장 퇴임 후 당초 그는 경북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할 계획이었지만, 자신의 성격상 강단에서 교육하는 것보다 농가와 직접 접촉하는 종축개량협회를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내리 3선으로 12년간 종축개량협회를 이끈 이 회장은 그간의 경험들을 가축개량사업을 발전에 녹여내는 데 전력을 다했다.

가장 먼저 그는 혈통자료를 확보하고 신뢰도를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이력제 자료와 별개로 관리됐던 개체별 혈통등록자료를 이력제 기준으로 모두 통일화시켰다.

정리된 자료들은 농가들에 쉽게 전달해 현장에서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도록 홈페이지를 대폭 개편하는 한편, 스마트폰 앱을 활용해 각 개체의 혈통등록정보를 실시간으로 조회할 수 있게 했다.

혈통 정보와 이력제의 통일은 또 다른 시너지 효과로 이어지게 됐다.

도축한 소의 ‘등급판정결과’가 나오면 어미 소를 찾아 그 자료를 모두 업로드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송아지의 매매와 이동이 있을 경우 어미 소가 생산한 후대축의 성적을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후대축의 어미소를 찾아 도체 성적을 입력함으로써 어미소의 능력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종축개량협회는 품질평가원으로부터 도축자료를 받아 매일 후대검정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이 회장은 이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사례를 찾기 어렵다”고 자부했다.

뿐만 아니라, 친자확인 검사를 통해 혈통의 신뢰도와 개량의 효율성도 크게 높였다.

송아지 매매로 주인이 변경된 경우엔 DNA 검사를 통한 친자확인을 실시, 아비의 부정개체를 찾아 등록증을 재발급했다. 한우 인공수정의 경우 70~80%가 재수정이 이뤄진다는 현실을 고려한 것인데, 진짜 아비를 찾는 작업으로 혈통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게 됐다.

개량사업과 시스템도 현장 중심으로 대폭 개선했다.

각 도별 지역본부를 설치해 본부직원의 절반을 지역으로 배치했다.

협회 정원의 30%가 석‧박사급인 전문가들을 현장으로 투입해 컨설팅을 확대‧강화하면서 종축개량협회를 ‘현장형 전문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재용 회장은 종축개량협회의 사업과 개량 시스템을 현장 중심으로 개선하면서 각도별로 지역본부를 설치했다. 사진은 지난 2013년 11월 8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414번지에서 열렸던 경기강원지부 현판식 모습. 왼쪽부터 나경수 이사, 공준식 감사, 계재철 과장, 이재용 회장, 변경현 한우강원지회장, 유완식 한우경기지회장, 백한승 과장, 김인필 경기한우협동조합장, 류중진 젖소개량사업소장, 최준호 감사(직함은 2013년 당시기준).
이재용 회장은 종축개량협회의 사업과 개량 시스템을 현장 중심으로 개선하면서 각도별로 지역본부를 설치했다. 사진은 지난 2013년 11월 8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414번지에서 열렸던 경기강원지부 현판식 모습. 왼쪽부터 나경수 이사, 공준식 감사, 계재철 과장, 이재용 회장, 변경현 한우강원지회장, 유완식 한우경기지회장, 백한승 과장, 김인필 경기한우협동조합장, 류중진 젖소개량사업소장, 최준호 감사(직함은 2013년 당시기준).

 

가장 보람된 일 중 하나와 관련해 이 회장은 ‘엘리트 카우(Elite Cow)’ 사업을 꼽았다.

출하된 개체의 도축성적이 도체중 480kg, 등심단면적 110cm2, 육질 등급 1++(8, 9), 육량 B등급 등 일정 기준 이상일 경우 그 어미 소를 우량 암소(혈통, 고등등록우)로 정하고, 농가는 물론 지자체와 지역에 제공하는 사업이다.

KPN 종모우 한 마리를 만드는 데 15~20억 원씩 국가 예산을 사용하면서도 정작 우량 개체를 생산한 암소라도 쉽게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서 우수한 개체를 생산한 암소를 찾아 해당 농가 농가는 물론 시‧군 등 지자체에도 알려 우량 송아지 생산 도태를 막고 생산을 유도한 것이다.

엘리트 카우 사업이 정착되고 점차 알려지면서 지자체에선 이를 보유한 암소 농가들에 장려금을 지원하는 곳이 늘고 있으며, 엘리트 카우 보유 숫자가 그 지역 한우 개량사업의 척도와 자부심이 되어 지자체별로 선의의 경쟁이 되고 있다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다.

암소개량을 위한 '유전체 검사를 실용화'한 것은 국내 개량사업의 혁신으로 평가받는다.

농장의 개량을 위해선 좋은 암송아지를 골라 그에 맞는 KPN을 넣어 후대축을 낳아 검정하는 등 최소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데, ‘유전체 검사 분석 기술’을 도입해 암소의 유전력을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전체 검사는 암송아지의 모근을 채취, 아미노산 체인 마커를 분석해 송아지의 유전력을 잠정 예상하는 것인데, ‘어떠한 마커를 가진 개체가 어떠한 유전력이 있다’는 참조집단을 이용해 육종가를 산출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경우 특정한 유전형질을 지진 참조집단이 적어 육종가를 내는데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 회장은 독일 IVT 축산연구소와 공동연구과제를 추진해 2020년부터 한우, 젖소, 종돈의 유전체 개량사업을 실용화해냈다.

한우의 경우엔 참조집단이 적은 현실을 고려, 세계 육우 품종들의 참조집단을 보유한 독일연구소의 DNA 마크와 한우의 자료를 이용해 육종가의 정확도를 높였고, 이를 기초로 선발정확도를 70~80% 수준까지 높였다.

후대검정을 통한 선발정확도가 40~50% 수준임을 감안할 때 종축개량협회의 유전체 검사 실용화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현재 종축개량협회는 ICAR(국제가축기록위원회) 정회원으로, 유전체 육종가 평가와 친자 확인검사, 유성분 분석능력과 관련해 전문 기관으로 인증받는 등 국제적으로 공인된 개량기관으로 평가받았다.

이재용 회장은 “그동안 부계혈통만을 이용한 육종가에서 암소 유전체 육종가를 산출하게 되어 개량의 속도와 비용 절감에 혁신적 성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종축개량협회는 2019년 11월 독일VIT연구소와 업무협약을 체결하며 유전체검사를 실용화하는 등 가축개량사업을 선도해 나갔다.
종축개량협회는 2019년 11월 독일VIT연구소와 업무협약을 체결하며 유전체검사를 실용화하는 등 가축개량사업을 선도해 나갔다.

 

50년 축산인생을 마무리하며 이재용 회장은 축산 정책 담당자들에게 “한국 축산을 지킨다는 주인 정신의 철학을 가지고 공직생활을 하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2002년 원유수급불균형이 극심해 잉여원유차등가격제를 실시할 때 농가 반발이 엄청났었어요. 과천 앞에서 7천 명이 모여 우유를 쏟아붓고, 송아지를 내다 버리고 난리가 났어요. 심지어 담당자를 죽이겠다는 협박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현장으로 파고들었어요. 농가들과 새벽 2~3시까지 토론했습니다. 어떻게든 수급균형을 맞춰가야 지속가능한 한국 낙농이 가능하지 않겠냐면서 설득과 협의를 지속했습니다. 호주산 생우가 수입돼 전국의 한우 농가가 들끓고 일어나 김포 검역장 앞에 수천 명이 모이고, 검역을 마친 소가 농가들 반발에 입식도 못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나는 조정자로 나서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성난 농심을 달래고,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정부와 농가가 함께 머리를 맞대며 문제를 풀어갔습니다.”

이 회장은 농업정책 공직자는 농민, 농촌, 농업의 3대 과제를 마음에 담고, 그 중 ‘농민’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추진 방향을 성과 위주의 상업적 농업에 치중해 농업의 주체인 농민과의 대화와 농민 삶의 질은 뒷순위로 두어 정책을 추진하는 등 대한민국 1차산업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재용 회장은 특히 농림축산식품부의 ‘축산직 공무원 채용’을 반드시 부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퇴직한 이후 농식품부엔 축산직 공무원 채용이 막히면서 신규 정책 입안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나 다름없다.

이 회장은 “축산을 전문으로 공부한 사람만이 축산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이해, 애착심이 있어 축산을 대변하고 미래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 나는 축산국에 있으면서 평생 내가 몸담을 조직, 내가 책임져야 할 ‘우리의 산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라면서 “축산국 근무 공직자는 타부서 직원보다 고생이 많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한국축산의 후원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축산농가들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고 싶다고 했다.

“축산농가 여러분은 개방화 등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축산을 농업의 중심산업으로 발전시킨 저력이 있습니다. 축산인 여러분들이야 말로 이나라의 농업과 농촌의 미래를 지켜 나갈 핵심 동력임을 확신합니다.”

이재용 회장의 인터뷰 마지막 말이었다.

 

이재용 회장이 걸어온 길

-1948년 경북 의성 출생

학력

-1963. 3 ~ 1966. 2 대구 계성고등학교 졸업

-1966. 3 ~ 1974. 2 건국대학교 축산대학 (학사)

-1998. 3 ~ 2000. 8 건국대학교 농축대학원 축산경영학과(석사)

주요경력

-1983.10 ~ 2002.5 농수산부 축산국 사무관, 서기관

-2002.5.22 ~2006.11.30 농림부 축산국 축산경영과장

-2007.3.4 ~ 2010.3.3 축산물품질평가원장

-2010.3.4 ~2022.2.28 한국종축개량협회장

 

*본 기사는 농장에서 식탁까지 2022년 신년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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