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 알쓸신잡 삼겹살 다시 생각해 본다.
황교익 알쓸신잡 삼겹살 다시 생각해 본다.
  • 김태경 농장과 식탁 연구위원
  • 승인 2018.10.14 0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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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삼겹살 소비는 언제부터
황교익의 수출 잔여육 주장 근거 없어
한국인은 언제부터 삼겹살을 먹기 시작했을까?
한국인은 언제부터 삼겹살을 먹기 시작했을까?

 

[팜인사이트=김태경] “우리나라 사람들이 삼겹살을 많이 먹게 된 데에는 굉장히 불행한 역사가 있습니다.”
2017년 6월 30일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는 맛있는 삼겹살 뒤에 가려진 우리의 슬픈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방송됐다.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중인 김영하 작가는 아침을 준비하며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에게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삼겹살을 많이 먹느냐”고 물었고 이에 황교익은 “불행한 역사가 있다”고 대답했다.

황교익은 “1960~70년대 대규모 양돈산업은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며 “일본 사람들이 고기를 먹기 시작하며 돼지를 키우게 됐다”고 말했다.
한창 일본에서 돼지고기 소비량이 급증하자 ‘배변물 처리’가 문제가 됐고 일본은 자국에서 돼지를 키우는 대신 한국에서 돼지를 키우기로 결정했다. 즉 일본에 돼지고기를 유통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양돈산업이 들어서게 된 셈이다.

이어 황교익은 “일본에는 맛있다고 알려진 안심, 등심을 수출했고 우리는 삼겹살, 족발, 돼지국밥, 순대 등을 즐겨 먹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 세계일보 2017.7.2

알쓸신잡 캡쳐
황교익은 소설가 김영하의 삼겹살과 관련한 물음에 삼겹살을 먹게 된건 대일 수출 이후 잔여육으로 이는 슬픈역사라고 주장했다. 출처=알쓸신잡 캡쳐

 

황교익이 2017년 6월30일 알쓸신잡 경주편에서 이야기 한 삼겹살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한다.

우선 필자는 축산경영학을 전공했고 여러 돼지고기 브랜드 회사에서 마케팅을 해 왔다. 그리고 지금은 식육 역사학자가 되고 싶은 식육마케터로 과거 우리 민족의 육류소비 패턴을 연구하고 그 연구를 통해 육류의 새로운 스토리텔링과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일을 하고 있다.

황교익의 발언 “1960~70년대 대규모 양돈산업은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우리나라 양돈산업은 한우의 부족에서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1960년대 1970년대 수출 주도형 경제정책 속에서 농산물도 역시 예외는 아니게 수출주도형 생산 체계와 상품화가 이루어졌다. 생사나 전복 등은 아마도 수출이 우선이라 국내에서는 구하기 도 힘들고 가격도 비쌌다고 한다. 그러나 돼지는 이런 수출 주력 품목이 아니었다. 해방이후 분단된 남한에는 약 50만두 정도의 한우가 사육하고 있었다. 그 당시 일년에 도축되는 쇠고기로 공급되는 한우가 20만두 수준이었고 일하는 농우가 한해에 약 30만두정도가 필요했다.

쇠고기에 대한 선호가 강한 우리 민족이 지속적으로 쇠고기를 소비하게 되면 한우 자원이 고갈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1948년부터 도시 근교에서 양돈을 장려하게 된다.

그런데 미국의 옥수수 돼지 사이클처럼 우리나라에도 24개월에서 30개월주기로 돼지가격이 급등 급락하는 돼지의 불안정된 가격 변동이 생겼고 이에 국내 돈가의 안정화를 위해서 돼지가격이 하락하면 수출을 하고 돼지가격이 인상되면 수출을 중단하게 된다.

이는 우리나라가 해방이후 1962년부터 홍콩의 생돈 수출을 시작으로 돼지를 수출하기 시작하지만 년도별 수출 실적을 살펴 보면 수출한 해 보다 수출이 전혀 없는 해가 더 많다.

또 돼지와 돼지고기 수출은 처음에는 생돈 다음에는 지육 그 다음에는 풀세트 부분육 수출하고 일본에서 선호하는 등심, 안심을 수출하기 시작한 건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로 사료된다. 어쩜 우리나라의 양돈산업이 수출주도형으로 개편된 건 1985년이후 지속적인 대일 돈육 수출이 활성화되고 냉장 부분육의 수요가 늘어나 수출주도형 LPC가 세워지기 시작한 1995년부터 2000년 구제역이 발생할 때까지가 일본에 냉장 돈육을 수출하기 위해 돼지 가공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 당시는 어쩜 황교익의 주장처럼 안심, 등심을 수출하고 남은 삼겹살등 기타 부위의 국내 공급이 활발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황교익은 일본이 자국내의 배변물 처리 등 환경 문제가 되어 기업형 양돈 단지를 한국에 조성하였다고 이야기하는데 일본이 산업화를 농업 인력의 감소와 환경문제 등으로 늘어나는 돼지고기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이 해외 양돈 기지를 건설한 건 사실이지만 그곳은 한국이 아니라 대만이었다. 대만이 1997년 구제역으로 일본 시장으로 돼지고기 수출이 불가능해지자 한국에서 돈육 수입이 늘어났던 건 사실이지만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 양돈장에 일본 자본이 투자된 건 단 한곳도 없었다. 단 한곳 지금은 사조산업이 인수한 남부햄이 제일교포 자본에 의해서 설립되었지만 이건 햄 소시지 공장이지 일본 수출을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는 아니었다.

1970년대 후반 삼겹살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이런 삼겹살에 대한 수요가 대일 수출 잔여육이라는 황교익의 주장은 1970년대 후반부터는 등심과 안심만 수출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어 그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소리는 아니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전혀 돼지고기 대일 수출이 없었기 때문에 삼겹살이 대일 수출 잔여육이라는 주장보다는 1980년대 가동을 시작한 롯데햄과 제일제당 백설햄 등 돈육 소시지 공장이 본격 가동되면서 햄 소시지를 만들고 남은 삼겹살, 족발 등의 부분육 유통이 활발해 졌다고 봐야 한다.

적어도 1930년대에 등장한 세겹살, 삼겹살이 1970년대 후반부터 소금구이, 로스구이 스타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건 과거에는 잔반 사료 급여, 비거세 등으로 돼지고기에 냄새가 많이 나서 소금만으로는 역겨운 돼지 냄새를 제거하지 못해서 생강 등 향신료를 듬뿍 친 두루치기나 탕 등의 요리로 주로 소비하던 돼지고기가 1970년대 후반부에 와서는 그나마 기업형 양돈장이 생기고 기업형 양돈장은 배합 사료를 급여하고 거세를 실시하여 돼지고기의 냄새를 많이 잡았기 때문에 가격이 인상되는 한우 로스구이의 대체재로 삼겹살 (로스)구이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사회 현상은 단 하나만의 이유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삼겹살의 유행은 양돈산업의 변화와 한국 사회 전반의 변화의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삼겹살의 유행과 관련 더 깊게 연구해야 하는 것은 삼겹살이 유행하기 시작하던 1970년대 후반부터 삼원 교잡종의 돼지보급이 확대되어 양돈의 생산성이 매우 향상되었지만 반면 어쩜 돼지고기의 맛은 예전만 못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삼원교잡은 통일벼 같은 생산성은 좋으나 맛은 없는 돼지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소비자 맛없는 삼원교잡 돼지 중 그나마 가장 맛있는 삼겹살에 대해서 집착하기 시작했을 수 있다. 이런 주장은 필자만의 주장으로 가설에 불과하다.

단지 최근 들어서 유행하는 이베리코 돼지, 듀록, 버크셔등과 제주 흑돼지의 맛을 보면 삼원교잡의 LYD보다 우수함을 알 수 있다.

놀라운 건 탕을 끓였을 때의 국물 맛이 듀록과 버크셔, 제주 흑돼지에 비해 LYD 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 옥동식과 광화문 국밥 등에서 검증되어 필자의 가설에 근거가 되어 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삼겹살을 많이 먹느냐”는 김영하 작가의 질문의 답을 필자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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