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 삼겹살론 다시 생각하기 두번째 이야기
황교익 삼겹살론 다시 생각하기 두번째 이야기
  • 김태경 농장과 식탁 객원연구위원
  • 승인 2018.10.15 15:5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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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육 수출 냉동물류 부족하던 시절엔 생돈 이후 지육, 부분육 순으로 수출 방식 전환
삼겹살이 수출 잔여육이 아닌, 수출은 비선호 돼지고기의 처리 방안
일본자본의 국내 양돈장 직접 투자 없어 일본이 필요 부위만 가져갔다는 주장 근거 희박
국내 양돈산업 급성장은 부족한 축산물 수급 맞추기 위해 정부의 기업 참여 유도 때문
공급과잉 때 수출 부족땐 수출 중단, 한일 양국 돼지고기 선호부위 달라 상호 보완하는 관계

[팜인사이트=김태경] 삼겹살의 유행이 수출 잔여육이었다는 설을 반론하기 위해 우리나라 돈육 수출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 봤다.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이 글을 시작으로 이를 검증하는 토론의 자리가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이후 필자가 찾지 못한 통계자료들이나 기록들을 더 찾아서 보충하여 우리나라 돈육 수출의 역사를 정리하는 기회로 삼겠다.

 

삼겹살이 슬픈 역사과 대일 수출의 잔여물이었을까?

대일 돈육 수출의 역사는 아마도 현대적 의미의 부분육 시장의 형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동아일보 신문기사 캡쳐
동아일보 신문기사 캡쳐

아르헨티나 전통 쇠고기 바비큐요리인 아사도 품질 좋은 아르헨티나산 쇠고기의 정육은 다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하고 남은 갈비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걸 쓰레기 갈비라고 했다고 한다. 노동에 지친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의 훌륭한 요리가 버려진 쓰레기 갈비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삼겹살을 수출하고 남은 슬픈 고기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중략) 축우로 유명하던 우리나라는 고기구이요리가 발달했지만 돼지고기 구이만은 발전을 못한 것 같다. 지금도 “여름철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라는 말이 상식일 만큼 돼지고기에 대한 평은 그리 높지 못하다. 그간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주점가에 늘어가던 삼겹살집에도 여름이 시작되면서 사람의 발길은 눈에 띄게 뜸해졌다. 더위가 오면서 돼지고기 수요는 가정에서도 줄어들어 산지에서는 생돼지 600그램에 2백 원으로 값이 폭락했다는 소식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육류 섭취는 년간 1인당 쇠고기 2.73kg에 돼지고기 5.1kg이었다고 추산이다. (중략) 일본은 돼지 보유 800만두로는 부족해서 해마다 10%정도 수입하고 있는데 우리는 돼지고기 파동 후 양돈에 힘쓴 결과 3백만 두 선에 달했다. 이것이 남아돌아 주체가 힘들게 되었으니 획기적인 대책이 있어야겠다. 작년 초에는 돼지고기 부족파동이 있었고 지금은 남아서 걱정이니 쇠고기를 수입하는 나라에서 이것은 기현상이 아닐 수 없다. <1979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기사>

위기사는 1979년 돼지고기 가격이 폭락 이후 돼지고기를 더 먹으라고 독자들을 독려를 하는 내용의 기사다. 이 기사를 근거로 우리가 삼겹살을 즐겨 먹은 시기가 1970년대 후반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통설이 되었다.

1979년이 우리 한돈 산업에 참 많은 변화를 가져 오게 되는 시기라는 걸 이 기사가 알려 주고 있다. 우선 삼겹살 식당이 이미  많이 생겨났다는 것, 이 시절 돼지고기는 여름철 기피 식품이었다는 것, 돈가가 급락 급등하는 미국의 콘호그 사이클 같은 돼지파동이 자주 있었는데 1979년 1월 도매시장 지육 경락가가 1596원이었는데 표에서 보는 것처럼 매월 급락하여 12월에는 661원으로 1월대비 41%의 가격을 보이는 급락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1978년 1979년 1980년 돈 도매시장 지육 경락가자료 : 축협중앙회
1978년 1979년 1980년 돈 도매시장 지육 경락가
자료 : 축협중앙회
1978년 1979년 1980년 돈 도매시장 지육 경락가자료 : 축협중앙회
1978년 1979년 1980년 돈 도매시장 지육 경락가
자료 : 축협중앙회

 


삼겹살은 언제부터 구워 먹기 시작했을까?

근대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라는 2010년 이화여자대학교 이규진의 논문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언제부터 삼겹살 구이를 먹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난무한다.

「세계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일제시대 탄광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목에 걸린 탄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먹기 시작한 게 최초’(2001아울렛 축산담당 김성호 주임), ‘보릿고개를 막 넘긴 1970년대 중반부터 삼겹살을 구워먹기 시작했다’(연세대 앞 먹자 숯불갈비 최복순 사장),‘80년대 말부터 삼겹살을 구워먹는 문화가 생겼다’(대한양돈협회 홍보부 조진현 과장)등 설에 따라 40년 이상 차이가 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설 보다는 1970년대 중반이라는 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삼겹살을 많이 먹게 된 배경에 대해서 2017년 6월 30일 오후 방송된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5회에서는 경주의 두 번째 이야기가 그려졌다.
이날 경주에서 아침으로 베이컨을 먹던 중 김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삼겹살을 좋아하나"라고 물었다.

이에 황교익은 "불행한 역사가 있다. 대규모 양돈산업은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일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돼지를 키워야했다.  그런데 돼지를 키우는 것은 배변물 처리가 문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키우게 한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자기들은 안심, 등심을 가져가고 우리한테는 삼겹살, 내장, 발, 껍데기 등을 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황교익의 주장이 사실일까?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농우확보를 위해 양돈업을 적극 장려하였다.

우리나라 농업에 있어 그 원동력이 될 농우가 해방후 엄청난 밀살로 인하여 그 수효가 격감의 일로를 걸어 이대로 계속된다면 앞으로의 농업 생산에 주는 영향이란 극히 막심 할뿐더러 언제 농우가 고갈될런지도 모를 위경에 처하고 있는데 이러한 농촌의 비명을 묵과할 수 없다하여 농우의 확보책이 광범하게 논의되고 있어 그 방법으로써는 양돈업을 널리 장려시켜 식육용으로 또 소고기대신에 도야지고기를 대용하자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

워낙 소고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라 해방이후 혼란기에 일하는 농우인 소를 마구 잡아 먹어 일할 소가 부족해졌다. 여기에 전쟁과 분단으로 남한내의 소의 사육두수가 1954년 688천두였다. 당시 농사를 짓기 위한 농우가 약 30만두 필요했다. 식용으로 도축되는 소 두수는 년간 약 20만두에서 30만두였다. 따라서 계속 소고기를 즐겨 먹으면 농사에 투입될 농우가 부족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돼지와 닭 키우기를 장려하였다.

해방이전 1941년 조선반도에서 키우던 소는 1,753,556두 였다. 돼지 역시 일제 강점기에 100만두이상 사육되고 있었다. 통계상으로는 1935년도에 1,616,408두로 가장 많이 키웠다. 해방되던 1945년도에는 195,291두, 1950년에는 156,400두를 키웠다.

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77년 수출 100억불 달성이라는 거대한 금자탑이 완성되었다. 지난날 우리는 국토분단의 비극과 6.25의 참화를 입고 사회적 혼란과 빈곤의 악순환을 겪어왔다.

그러나 부존자원 결핍에도 60년대 초를 기점으로 하여 민족적 각성과 자립의지를 일깨우고 온 국민이 불사조처럼 일어나서 총화 단결하여 땀 흘려 일한 결과 64년에 1억불 실적을 기록한 지 13년 그리고 70년에 10억불 실적을 올린 지 겨우 7년 만에 100억불 수출목표를 달성해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가는 수출대국이 되었다. 신발, 가발에서 선박, 전자시계에 이르는 각종 상품을 수출하여 세계도처에서 우리 상품을 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우리가 만든 선박과 승용차가 오대양을 누비고 북미와 구주의 광활한 평원에 뻗은 고속도로를 달릴 만큼 중화학공업 건설로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획기적인 수출증대를 가져와 근대산업 국가로서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땀 흘려 일해서 국력배양에 총매진 해야겠다.

5.16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수출을 통한 경제 성장만이 군사정부의 명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전 산업을 수출 주도형 계획 경제 체계로 만들어 간다.

여기에 양돈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1962년 홍콩으로 생돈 수출을 시작으로 돼지와 돼지고기 수출을 하게 되는데 다른 농산물과는 성격이 좀 다른 면을 보인다.
1962년에는 전체 수출액 5,400만 달러에서 농산물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43%로 높아졌다. 여기에 수산물을 합치면 농수산물 수출 비중은 66%에 달했다. 이로써 60년대 들어 농산물이 광산물을 제치고 최대 수출 품목이 되었다. 주요 농산물 수출품목 순위는 생사, 쌀, 인삼, 담배잎, 한약재 순이었다. 그 뒤 양잠농가는 계속 불어나 1974년 약 50만 가구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양잠산물이 3억 달러이상 수출되어 농산물 수출의 절반을 차지했다.

생사, 인삼, 담배잎, 한약재 등은 주요 먹거리가 아니어서 수출을 우선에 둘 수 있었지만 쌀과 돼지고기는 국내 물가 안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돼지고기 생산량이 많아서 가격이 하락하면 수출을 하고 생산량이 줄어 국내 가격이 높아지면 수출을 중단하고 국내 공급을 우선 하였다.

이는 다른 농산물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이라고 하겠다. 즉 돼지고기는 일본이라는 수출 시장이 있고 수출 경쟁력이 있는 주요 수출 품목이긴 했지만 국내의 육류 공급이 우선시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생사나 전복, 인삼 등 당시에 수출이 되는 농수산물들은 수출이 되어 국내 가격이 높게 형성되어 일부 부유층만이 소비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돼지고기는 국내의 수급 조절과 가격 안정이 수출 보다 우선시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대규모 양돈 단지의 조성이 꼭 수출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이라는 좋은 수출 시장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 당시 가격의 폭등과 폭락을 거듭하던 돼지고기 수급 상황에서 기업형 양돈에 투자할 때 리스크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국내 가격이 하락하면 수출을 하면 되었으니 양돈업이 수익성이 높은 산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962년도에는 돼지고기는 39톤, 생돈으로는 40,535두가 수출됐고, 1963년도에는 돼지고기는 398.1톤, 생돈으로는 11만4643두가 수출됐다.
표)년도별 돈육 및 생돈 수출 실적을 보면 확실히 1960년대는 생돈 수출이 주라는 걸 알 수 있지만 1970년대 이후 자료는 단순히 돈육이라고 되어 있어 돈육의 실상을 알 수 없다. 1973년 한국외국어대학 무역학과 김달용의 석사논문 돈육 수출 증대에 관한 연구를 살펴보면 1962년 홍콩에 생돈을 수출하던 건 중공(지금의 중국)이 정치적으로 덤핑 수출하여 중단되고 1968년부터 일본이 새로운 수출 시장으로 부상하게 되는데 1968년부터 1971년 사이에 대분할한 냉동지육을 수출했다.(주.지육은 가축을 도축 후 머리와 다리, 피와 내장 등을 제거한 상태)

1972년부터 지육에 비해 시장성이 좋은 부분육을 수출하게 됐다.

김달용의 앞에서 이야기한 자신의 논문에서 부분육에 대한 해석을 생체의 40.2%를 차지하는 부위별 육 즉 肩 (어깨 견), 肩 로스, 脆(연할 취)로스, 히레, 腹 (배 복) , 股 (넓적 다리 고)  "자료: 한국 무역 협회 중공의 무역 1972년" 이라고 각주 달고 있다. 이는 지금 족발과 갈매기살, 항정살, 가브리 등을 제외하고 전체 부위가 부분육으로 수출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들어 197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일 돈육 수출은 1972년 3,802톤에 5,789천불의 수출실적을 기록한다.

자료 : 김달용(1972)
자료 : 김달용(1972)

1978년은 국내 돈가 상승으로 수출이 중단되고 1979년 1,126천불 수출 했다. 1980년대는 롯데햄, 백설햄 등 국내에서도 축육 소시지 시장이 형성되고 돈육 소비가 늘어 1985년까지 수출이 거의 없다가 1986년부터 비선호 부위인 등심, 안심에 대한 수출이 다시 시작된다.

1972년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월별 돈육 수출 실적을 살펴보면 아마도 일본과 한국의 돈육 시장은 상호 보완적 관계가 커 보인다. 1972년 말부터 국내 보유두수가 절대량의 부족으로 인해 돈육가의 급격하게 상승하자. 1973년 2월부터 정부가 국내 수요 충당과 국내 돈가 안정을 위해 수출을 중단시켰다. (중략) 1973년 일본 수출가격은 부분육(cut emat)톤당 $1,650 –1750 (C&F) 로서 가공비등 비용을 고려 생체 근당가격으로 환산한다면 대략 155원-165원이 손익 분기점이 될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당시 국내 돈가는 생체근당 200원이상이 형성되어 적자 수출이었다. 국내 생산 원가가 높고 일본의 수입 가격이 그렇게 높지 않아 한국 일본 양쪽 시장의 가격 형성을 잘 고려해 수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국내 돼지고기 수요가 감소하여 가격이 낮아지는 여름철에 일본의 수출 실적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왜? 돼지고기를 수입하게 되었을까?

일본은 전후 눈부신 경제발전에 따른 국민 소득의 향상으로 육류의 수요가 대폭 신장되었으면 주로 돼지고기, 닭고기를 중심으로 신장되었다. 이중 돼지고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였다. 1971년 일본 전체 육류 수급량의 42%가 돈육이었다. 1970년대 초반 일본 내의 돈육 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되고 있었으나 생산은 조금씩 감소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앞에서 황교익이 지적했던 것처럼 축산폐수에 의한 공해 문제도 있었지만 더욱 심각한건 농촌의 인력난이었다. 취업기회가 많아져서 3D업종인 양돈업에 취업하는 젊은이들이 극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돈육 수입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수입하였는데 이들 나라는 인건비 관계로 부분육으로 수입할 수 없고 지육상태로 수입하였는데 일본의 인건비도 상당히 높아져서 일본 내에서 지육을 부분육으로 가공하기가 곤란해졌다.

자료 : 유철호, 이일형 (1987)
자료 : 유철호, 이일형 (1987)

일본은 지육 형태로 수입하던 것을 점차 부분육 수입으로 부분육 중에서도 안심과 등심 등 상등육 중심으로 수입을 전환하게 된다. 1985년 일본이 수입한 돈육 형태를 보면 냉동, 냉장 부분육이 78,420톤 통조림제품이 5,682톤 부산물이 2,899톤 베이컨류 77톤으로 부분육 수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수입국별 부위별 수입 비율을 보면 미국, 캐나다로부터는 등심이 70%로 높고 나머지는 어깨와 허벅지류 등으로 되어 있다. 덴마크의 경우에는 베이컨 재료로서의 삼겹살 비율이 높은 것이 특징이며 등심, 삼겹, 어깨의 3부위를 중심으로 되어 있다.

한편 대만산 돈육은 지육의 부분육 수율에 균형이 잡힌 비율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1985년 수입량의 40-45%가 등심이다. 유철호, 이일형은 1985년경에는 일본은 이미 등심, 안심 등 부분육 수입을 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70년대에는 일본으로 지육과 부분육 형태로 수출하였다. 특히 대일 수출량은 1974년- 1977년간 총 22천 톤에 달하여 전례 없던 수출증대를 기록하였으나 뒤이은 국내 가격 상승으로 수출은 중단되었다.

이 기간 중 수출은 수출지정업체인 5,000두 이상 기업 양돈장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돈육 수출형태는 냉동 6개 부위 (총체중의 43%)에 국한되었다. 수출가격은 톤당 2,790$ (C&F가격)이었다. 1983년 하반기 극심한 돼지 과잉생산에 의한 가격 파동을 겪으면서 1984년부터 대일수출이 재개되어 냉동 3개 부위(총체중14.5%)의 돈육이 기업 양돈장과 수출 중계상에 의하여 톤당 3,510$(C&F가격)에 296톤 수출됐다. 1985년 수출량은 226톤이었고 1986년에는 750톤이 수출되었는데 이는 일본 총수입량의 0.4%에 불과하다.

위의 두 자료를 근거로 다시 이야기를 해 보면 돈육 수출 증대에 관한 연구, 김달용 ,한국 외국어 대학교 무역학과 1972와 돈육 과잉생산과 대일수출상 문제점 유철호, 이일형 농촌경제 1987.12에서 1970년대에 대일 수출은 부분육으로 진행되었으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등심, 안심, 뒷다리 중심은 수출은 1985년 수출이 재개된 이후의 일이고 그 이전에는 전체 생체 43%의 부분육이 수출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가 1970년대 후반 수출 잔여육으로 알고 있던 삼겹살 마저도 다 수출하였던 것이다.

물론 더 정확히 부위별 수출 현황을 찾아 봐야 알겠지만 돈육 과잉생산과 대일수출상 문제점 유철호, 이일형 농촌경제 1987.12 자료의 작성자인 유철호 박사는 농촌경제연구원 소속의 수석 연구원을 지낸 분으로 유철호박사의 자료는 매우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부분육 수입을 개시하면서 단가면에서도 인건비가 싼 후진국에서 수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대만에서 수입을 늘렸다. 일본의 경우 지금도 호주에 우육시장에 직접 투자하여 생우를 생산 가공하여 쇠고기를 일본으로 수입한다. 이런 것처럼 대만에 자신들의 돈육 공급기지화를 위한 투자를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의 직접적인 투자가 없었다. 왜? 일본은 지리적으로 더 여건이 좋은 한국을 자신들의 돈육 거점화 하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 한국의 산업화 속도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했을 것이다.
이렇게 투자된 대만의 대일 양돈산업은 199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다. 1997년 대만의 구제역으로 급격히 철수하였다.

우리나라의 기업 양돈은 정부와 민간이 제각각 추진하였다고 봐야 한다.

1967년 박정희는 농어촌개발공사 설립하고 1968년 332백만원을 투자하여 인천시 만수동에 양돈주산단지 조성했다. 양돈가공센터는 대지가 1만5천평에 건평 1,950평 년간 비육돈 1만두 출하에 총 1억 5천 8백만원의 매출을 목표로 했다. 비육돈사 8동(1650평) 모돈 732두 사육를 초기에 사육했다. 1차로 비육돈을 연간 1만두 생산할 계획이며 2차로 뉴질랜드와의 합작으로 시설자금 2억 1천만원을 투입 햄, 소시지, 베이컨 등을 연간 약 6천톤 제조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업형 양돈장은 지금의 에버랜드 용인 자연농원 양돈장이었다. 처음에는 경제조림단지를 비롯해 밤·호두단지, 묘포장, 축산단지, 가족단지 등으로 구성됐다. 용인자원농원에서 수확된 살구 밤 등은 생과와 가공품으로 시판했고, 일부 수출실적도 있다. 특히 삼성은 이곳에서 1973년부터 양돈사업을 벌여 30만평 부지의 5개 양돈장에서 6만두까지 돼지를 사육하는 당시 최대 양돈장으로 키웠다. 삼성의 양돈 사업은 계열사이던 제일제당으로 이어지다가 양돈업계의 대기업 진출 반대와 환경오염, 질병 문제 등으로 1989년 정리됐다.

용인자연농원 양돈장은 살림개발을 위한 비료 퇴비 생산을 염두에 두고 삼성 이병철 회장이 진행했다. 기업 양돈장을 조성하는데 있어 수출이 가능하다는 건 투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대일수출이 이루어지던 197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에 5,000두이상 돼지를 키우는 양돈장이 한 곳도 없었다.

1979년도에 500두 이상 키우는 농가가 147호였고 이들이 총 331,00두를 키웠으니 호당 평준 2,251두를 사육했다. 과연 농가의 사육두수가 증대된 것이 꼭 돼지고기를 일본에 수출했기 때문일까? 우리나라 역시 급격한 산업화로 육류의 소비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국내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도 양돈 산업 규모의 확대가 필요했다.

사육두수 5000두 규모를 기업농의 시작이라고 볼 때 1998년 전체 양돈농가 27,002호의 0.3%인 89개 농가가 5000두 이상을 사육했다. 규모는 점점 늘어 수출이 중단되던 무렵인 2010년 전체 사육농가 7,347호중 5000두 이상 사육농가는 305호로 4.2% 2016년 전체 사육농가 4,406호중 5000두 이상의 농가는 438농가로 9.9%다.

이는 수출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한돈은 지속적으로 두수가 늘어나고 농가수는 감소하여 점점 호당 사육두수는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대만과는 전혀 다른 일본에 돼지고기는 수출을 했지만 한돈산업 자체가 일본에 의해서 종속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생산적 협조 관계라고 해야 할까? 복합 유기 생산체인 돼지고기의 여러 부위 중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국민이 선호하는 부위가 서로 달라서 일본의 경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등심과 안심의 수요가 많아 자국 생산분 보다 저렴하게 수입할 수 있어서 좋았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등심, 안심을 국내 유통시보다 비싸게 수출해서 이익을 본 만큼 삼겹살과 갈비를 싸게 구매할 수 있었다는 상호 보완 이익 관계 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등심, 안심이 일본에 수출이 안되고 국내에 유통 되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등심, 안심을 일본 사람들처럼 좋아 했을까? 36년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가 돈가스가 아닌 걸 보면 등심, 안심이 귀해서 안 먹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삼겹살과 갈비를 더 좋아해서 안 먹은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창 수출이 되던 시절에도 등심, 안심이 삼겹살 보다 비쌌던 시절은 없었다.

그리고 1990년대 초반 브랜드 삼겹살이 나오기 이전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돼지고기 부위별 개념은 거의 없이 그냥 살코기와 비계, 내장과 족발 정도의 구분과 아니면 찌개(국)거리와 구이용 이런 요리 방식에 의한 구분만 존재하던 시대를 살았다.

1950년대 한글 사전을 살펴보면 소고기는 등심, 안심, 채끝 제비추리까지 단어가 수록되어 있지만 돼지고기는 살코기, 비계, 족발, 순대만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위별로 세밀한 소비는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과 같은 삼겹살구이 식당이 1970년대 후반 우후죽순 생겨난 건 황교익의 주장처럼 수출잔여육설보다는 그 당시 기업 양돈의 확대로 냄새가 나지 않는 돼지고기가 생산 되어 삼겹살을 로스구이 형식으로 구워 먹을 수 있어졌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민족의 돼지고기 요리 역사에 소금구이가 없었던 건 돼지고기를 잔반사육하고 거세하지 않으면 냄새가 많이 나기 때문에 마늘, 생강 등으로 돼지고기 냄새를 제거해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0년대 중반이전에도 삼겹살을 먹었지만 다 양념한 두루치기 형식의 요리가 많았던 건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 때문이었다.

한우 쇠고기 중심의 로스구이가 돼지 삼겹살 로스구이로 변화하게 된 건 아마도 한우고기 가격의 인상도 큰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양돈산업이 수출주도형으로 개편된 건 1985년 이후 지속적인 대일 돈육 수출이 활성화되고 냉장 부분육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부터다. 특히 1995년부터는 수출주도형 LPC(축산물종합처리장, 도축과 부분육 가공을 일괄로 처리했다)가 세워지기 시작해 일본 수출을 위해 돼지의 부분육 가공이 본격적으로 이뤄졌으며 2000년대 초 구제역이 발생해 수출이 중단될 때까지 삼겹살이 많이 공급될 수 있었고, 여기에 대형할인점의 등장, 삼겹살 브랜드의 탄생은 삼겹살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늘어난 삼겹살 공급을 충분히 소진해 주었다.

필자는 이번 자료를 정리하면서 필자가 스스로 체험하지 못한 1985년 이전 돈육 수출의 모습은 선행연구자들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었으며 삼겹살이 수출 잔여육이라는 설 보다는 우리가 소비하지 않는 비선호 부위를 수출로 처리했다고 보는 이론이 더 근거가 있다고 본다.

 

*본 기사는 팜인사이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김달용(1972) 돈육 수출 증대에 관한 연구, 김달용 ,한국 외국어 대학교 무역학과

유철호, 이일형 (1987) 돈육 과잉생산과 대일수출상 문제점. 농촌경제 1987.12

이규진(2002) 근대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 이화여자 대학교 2002.

축협중앙회. 축산물 가격 및 수급자료

동아일보. 1979. 8. 25.

매일경제 1968.11.28

문화뉴스 2017.6.30.

경향신문 19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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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권 2020-11-03 07:58:28
정성스런 글 잘보고갑니다.
다 읽었습니다 정말끝까지. .출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