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역사속으로]우리는 언제부터 삼겹살을 먹게 되었을까?
[팜역사속으로]우리는 언제부터 삼겹살을 먹게 되었을까?
  • 김재민
  • 승인 2018.10.1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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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양돈업계의 혁신’ 돼지고기 냄새 잡아 삽겹살 대중화

[농장에서 식탁까지=김재민] “우리나라 사람들이 삼겹살을 많이 먹게 된 데에는 굉장히 불행한 역사가 있습니다.”

2017년 6월 30일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맛칼럼리스트 황교익은 우리 양돈산업이 일본 자본에 의해 만들어졌고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돈까스용 등심과 안심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부산물을 우리 민족이 먹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삼겹살은 일본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양돈산업의 부산물이라는 이야기를 알쓸신잡에서 이야기 됐다.
삼겹살은 일본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양돈산업의 부산물이라는 이야기를 알쓸신잡에서 이야기 됐다.

 

당시 방송내용은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 됐는데 비교적 자세히 보도된 세계일보 기사를 소개한다.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김영하 작가는 아침을 준비하며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에게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삼겹살을 많이 먹느냐”고 물었고 이에 황교익은 “불행한 역사가 있다”고 대답했다.황교익은 “1960~70년대 대규모 양돈산업은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며 “일본 사람들이 고기를 먹기 시작하며 돼지를 키우게 됐다”고 말했다.한창 일본에서 돼지고기 소비량이 급증하자 ‘배변물 처리’가 문제가 됐고 일본은 자국에서 돼지를 키우는 대신 한국에서 돼지를 키우기로 결정했다. 즉 일본에 돼지고기를 유통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양돈산업이 들어서게 된 셈이다.이어 황교익은 “일본에는 맛있다고 알려진 안심, 등심을 수출했고 우리는 삼겹살, 족발, 돼지국밥, 순대 등을 즐겨 먹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 세계일보 2017.7.2

 

하지만 축산업계 종사자라면 황교익이 말한 삼겹살론이 국내 양돈산업사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이야기 한다. 현재 황교익의 삼겹살론의 가장 강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식육마케터 김태경 박사로 블로그와 페이스북, 여러 언론 기고를 통해 황교익이 주장한 삼겹살의 대일 수출 잔여육론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필자도 국내 양돈산업의 발전사를 검토하면서 김태경 박사와 일부는 같게 또 일부는 다르게 황교익 씨의 주장을 반박해 보려 한다.

 

■1970년대 대규모 양돈산업 부족한 육류 수요 충당 위한 정부전략

황교익은 “1960~70년대 대규모 양돈산업은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이야기 했지만 우리나라 양돈산업은 부족한 고기 수요를 채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는게 합리적이다.

1980년대까지 우리 국민이 가장 선호하는 육류는 쇠고기였다. 그 선호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으나 지금의 소비자는 한우고기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육류를 상황에 따라 이용하고 있어 한우만을 좋아한다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워 졌다. 당시 한우는 농우로 활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육류로 무한정 이용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고 대체제로 정부는 양돈산업, 양계산업 등을 육성했다.

1967년 5월 매일경제신문 1면 기사 쇠고기 파동으로 닭고기 가격이 올랐다는 기사
1967년 5월 매일경제신문 1면 기사 쇠고기 파동으로 닭고기 가격이 올랐다는 기사

 

대일 수출을 위한 양돈산업이 아닌 부족한 국내 육류수요를 충당하기 위함이 컸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규모 양돈장의 신호탄은 삼성이 쏘아 올렸다. 정부의 축산진흥정책에 부응해 많은 재벌들이 기업형 목장을 건설하는데, 다른 재벌들은 낙농목장이나 한우목장을 건설했던 반면 삼성은 양돈에 집중했다.

당시 부족했던 고기가 쇠고기 였으니 당연히 소를 키우는게 맞았는데, 삼성은 대량생산 그리고 자본회전율, 전후방 연관산업의 연계 등을 고려해 돼지를 선택했을 것이다.

삼성의 판단은 옳았고 배합사료, 대규모 햄공장, 종돈장 등 돼지를 중심으로 한 전후방 산업에 삼성은 연이어 투자해 모두 성공시킨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재벌이 농민과 경쟁하는 것이 옳으냐, 재벌이 양돈장으로 부통산 투기를 하고 있다는 등의 여론이 비등해 지면서 당시 삼성을 비롯한 많은 재벌양돈장은 문을 닫게 된다.

한우 증식과 더불어 돼지고기와 닭고기 늘려 육류 한우부족현상을 잡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세워진다.경향신문 1968년 713일자
한우 증식과 더불어 돼지고기와 닭고기 늘려 육류 한우부족현상을 잡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세워진다.경향신문 1968년 713일자

 

한우고기의 대체제로 양돈산업이 투자 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한국전쟁이 종료된 이후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가 태어나며 인구는 가파르게 증가했고 수출 주도형 경제 정책 속에 도시로의 인구 집중은 가속화 되었던 시기로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민에게 고기 부족 현상은 심화 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말 극심한 한우고기 부족 현상이 발생했고 정부는 한우증식사업, 양돈, 양계업에 대기업 진출 독려, 농협을 통해 사료공장, 도축장 건설 등 각종 축산 진흥정책을 1970년대부터 강력히 추진한다.

당시 우리 정부는 외화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위해 수출이 중요했지만 수입도 강력히 억제하였다. 당시 정부는 수출주도형 산업도 육성했지만 수입 대체 산업도 함께 육성했고 식량은 되도록 자급을 하려 했다.

쇠고기 부족 상황은 1984년까지 지속됐는데 정부는 어떻게든 국민들이 공급량이 제한적인 쇠고기 보다는 돼지고기와 닭고기도 되도록 많이 소비하도록 노력했다.

 

■ 돼지고기 수출의 원칙은 가격

그렇다고 돼지고기 수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냉동, 냉장 물류가 도입이 더뎠던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생돈 수출이 주를 이뤘고 이후 냉동 지육(돼지의 머리, 족, 내장 등을 제거)으로 전환됐다가 부분육 수출로 전환되게 된다.

하지만 돼지고기 등의 수출에는 원칙이 있었는데 바로 돼지고기의 가격이었다. 공급이 많아 가격이 하락 싸이클에 오면 돼지를 적극 수출했고 국내 육류공급이 부족해 가격이 오르면 수출 물량을 줄이거나 중단하기를 반복해 왔다.

황교익의 주장에는 수출잔여육이라는 개념은 1980년대 후반부터 구제역이 발병하기 직전인 2000년 이전까지로 수출이 너무 많이 되다 보니 비 수출부위의 재고가 눈덩이처럼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당시 국내 농축산물 중 수출 최고 품목은 돼지고기였다. 이 당시는 우리나라도 경제발전으로 육류소비가 급격히 늘고 있었고 많은 청년 농부들이 전업 축사농가로 진입하던 시기였기에 공급도 충분했다.

우리나라는 주로 삼겹살과 목살과 같은 구이용 부위, 육가공용으로 활용된 뒷다리살 등은 자체 이용했고 쓰임새가 적었던 등심과 안심만을 일본으로 주로 수출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국내 소비가 늘어나면서 가격이 상승해 수출 단가가 계절에 따라 맞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다. 지금도 이러한 돼지고기 싸이클은 반복해 일어나는데 소비증가와 일시적은 공급감소가 겹치면서 돈가가 상승하고 하반기에는 공급은 증가하고 소비가 감소하면서 돈가가 하락하는 일이 반복해 일어났다. (상하반기 공급량 변화는 7~9월 돼지 수태율 저하와 여관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돼지고기 수출은 수급조절이 아닌 철저한 상업 수출이었기 때문에 과거처럼 우리 수급상황에 따라 물량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국내 돈가가 높게 형성되면서 더 이상 수출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대책이 필요했고 1990년 정부는 축협과 한냉 등에 독점권을 주었던 축산물 수입쿼터를 돈육 수출을 하는 업체에 수출물량에 비례하여 수입을 허용했다.

당시 돈육수출업체에서 근무했던 체리부로 김인식 회장은 정부가 축산물 수입쿼터를 돈육수출업체에 일부 배분을 요청했었고 수출량과 연동하되 소시지와 햄으로 만 활용한다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고 증언했다. 돼지고기 수출업체가 돼지고기 수입을 통해 수출을 계속해나간 역설이 그당시에는 있었다.

실제로 대일 수출이 활발했던 1980년대 올림픽을 전후해 1990년대까지 삼겹살은 대중적 메뉴로 자리 잡게 된다.

이를 황교익의 시각으로 보면 삼겹살은 수출 잔여육이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실제 이를 우리 양돈산업 관점에서 바라보면 돼지고기 수출은 국내 돼지고기 가격을 안정시키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당시 수출은 제일제당, 롯데와 같은 육가공업체가 주도했으며 햄과 소시지 용도로 활용되는 부위인 뒷다리살은 원료육으로 활용하고, 전지와 삼겹살은 국내시장에 공급하고, 등심과 안심은 일본에 수출을 하였다. 육가공업체 입장에서 보면 농가로부터 매입한 돼지를 제값에 팔 수 있는 시장에 돼지고기를 판매한 것뿐이다. 슬플 이유도 아픈 역사라 이야기할 것도 없다.

경향신문 1991년  11월 25일자 돈까스 전문 프렌차이즈 업체 광고
경향신문 1991년 11월 25일자 돈까스 전문 프렌차이즈 업체 광고

 

일본 수출 때문에 등심이나 안심을 우리 국민들이 먹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1980년대 돈까스를 판매하는 프렌차이즈업체들이 생겨났고 냉동식품도 등장했다. 돈까스가 1980년대가 되어 인기를 끌게 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1980년대 햄과 소시지를 생산하는 육가공업체들이 원료육으로 주로 이용되는 뒷다릿살 이외의 부위를 부분육으로 팔기 시작하면서 원료육을 외식업계에서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식용유의 공급이 원활해지면서 부터다. 1971년 해표식용유가 출시되었지만 거의 독점이다 보니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쌀 수밖에 없었다. 1979년 제일제당(삼성)이 식용유사업에 진출하면서 경쟁체제가 됐고 튀김요리의 산업화가 시작된다. 냉동식품이 만들어지고, 경양식집이라는 곳에서는 돈까스가 인기 메뉴가 된다. 치킨프렌차이즈업체도 1980년대 등장했다.

2000년 구제역 발병 이후 돼지고기 수출이 중단 되는데 2000년대 내내 우리 양돈업계는 등심과 안심 그리고 뒷다리살과 같은 비선호 부위 적체 문제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된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일본으로 등심과 안심만을 수출했던 이유는 국내에 돈까스 시장이 크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2005년 한돈자조금 관리위원회의 광고 포스터. 우리나라에서 잘 소비가 안 되는 등심, 안심, 뒷다리살 소비촉진를 늘리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2005년 한돈자조금 관리위원회의 광고 포스터. 우리나라에서 잘 소비가 안 되는 등심, 안심, 뒷다리살 소비촉진를 늘리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돈육 수출 중단 여파는 이후 10여년 동안 계속된다. 2005년 출범한 한돈자조금관리위원회의 지상 과제는 등심과 안심을 어떻게든 국내에서 소비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광고를 보면 등심이나 안심으로 만든 돼지수육, 돈까스 등의 홍보에 치중하기도 했다.

 

■ 일본자본이 일본을 위해 투자한 양돈산업 사실일까?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경제발전 모델로 시장경제라는 틀을 유지하면서 국가 주도형 계획 경제를 실시했다. 외국인의 직접 투자를 철저히 배격했고 대신 외국으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도입해 부족한 산업기반시설을 건설하고 은행을 통해 기업들이 공장 등을 건설할 수 있도록 저리에 자금을 배분하였다.

축산업계도 이러한 차관에 의해 많은 인프라를 건설했는데 유가공공장, 대규모 도축장, 배합사료공장 등이 여기에 속한다.

외국인의 직접 투자는 민주화 이후에 제한적으로 허용해오다 외환위기 이후 이를 전면 허용하게 된다.

섬나라 일본은 오래전부터 식량수급에 어려움을 겪어온 나라다. 일본은 근대화 이후 해외 농업진출에 열을 올렸다. 배합사료를 전적으로 해외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은 1960년대 사료원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본의 대형 종합상사들을 앞세워 주요 곡물 주산단지에 진출하고 메이저 곡물 업체들과 경쟁하고 있다.

해외에서 양돈장, 비육우농장에 대한 직접 투자도 병행되고 있는데, 일본이 자국 내의 축산분뇨 처리 등 환경 문제 때문에 양돈단지를 한국에 조성은 사실과 다르며 국내 양돈산업은 앞서 설명했듯이 육류공급 부족사태 해결을 위해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

일부 일본과 합작 양돈장이 있었다는 기사도 있기는 하나 매우 소수이고 1970년대 삼성의 양돈장 건설 사업 이후 1980년대 많은 재벌들이 양돈업에 진출했다. 1980년대 후반 우리 양돈농가들은 삼성 등 재벌이 건설해 운영 중인 양돈장에 대한 철수 요구를 펼쳐 관철시켰다. 1990년 축산법에 대기업참여를 제한하는 조항까지 신설됐다. 일본자본이 아니더라도 당시 재벌들에 의해 국내 양돈산업은 본격화 됐다 보는게 합리적이다.

 

■기업양돈의 등장과 고기 맛의 혁신… 삼겹살 시대 열어

1980년을 전후하여 삼겹살과 족발, 순대 등의 산업이 번창하게 된 데는 삼성과 롯데가 육가공산업에 진출하면서 부터다. 롯데가 한발 앞섰고 이어 삼성이 진출했다. 삼성과 롯데 이전 국내 햄, 소시지 산업은 돼지고기가 아닌 저가의 어육과 닭고기로 제조되던 상품이 주류를 이뤘다.

당시 육가공 산업이 어육을 주로 이용한데는 1970년대까지 육가공용으로 돈육을 활용할 수 있는 사육기반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성 등이 육가공산업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정부가 부족한 육류 수급을 위해 재벌의 축산진출을 독려했기 때문이고 1970년대 중반 삼성이 아시아 최대 규모의 양돈장을 용인에 건설하면서 기업형 그리고 전업형 양돈장이 점차 보편화 됐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국내 돼지고기는 도시 근교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도시에서 사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음식물 찌꺼기를 쉽게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잔반을 이용한 돼지사육은 필연적으로 돼지고기 특유의 잡내라는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 잡내 때문에 소비자들은 돼지고기 보다는 소고기를 선호했다. 돼지고기 조리법은 생강, 마늘, 파 등의 향신료를 활용해 돼지 비게 등에 들어 있는 고약한 비린내 성분을 뽑아내는 방식이 항상 사용됐다. 전통적인 돼지고기 요리가 보쌈, 돔베고기라 불리는 돼지수육이나 두루치기, 제육볶음과 같이 강한 양념으로 냄새를 가리는 조리법이 일반적일 수밖에 없었다.

도드람양돈농협의 초창기 냄새안나는 돼지고기를 출하한다는 내용의 소개 기사다. 1990년대 이러한 시도가 양돈업계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동아일보 1993년 6월 17일자 기사
도드람양돈농협의 초창기 냄새안나는 돼지고기를 출하한다는 내용의 소개 기사다. 1990년대 이러한 시도가 양돈업계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동아일보 1993년 6월 17일자 기사

 

삼겹살의 유행은 국내 양돈산업이 잔반 이용과 같은 전근대적 사용방식을 벗어나면서 부터다. 돼지 냄새를 잡기 위해 거세가 실시되는 등 과학적으로 돼지를 키우면서 특유의 잡내를 조리 단계가 아닌 생산단계에서 잡아 낸 이후다.

여러 단계의 조리 과정을 거쳐야 했던 과거의 냄새나는 돼지가 아닌 불판에 그냥 고기만 얹으면 되는 혁신이 1980년대 기업양돈의 등장 과학적인 사육기술이 보급되면서 가능해졌고 1990년대 이러한 사육기술이 보편화 되면서 삼겹살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삼겹살은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스토리가 담겨져 있지 않다. 단지 우리 소비자는 삼겹살을 선택한 것이고 등심과 안심은 삼겹살에 비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을 뿐이다. 육가공업체는 국내보다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일본에 돼지를 수출해 돈을 벌었다. 삼겹살 이야기는 그저 국내 양돈업이 산업화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