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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95호, 양력 : 11월 2일, 음력 : 9월 25일
[594년 전 오늘 - 축산 소식79]조선시대 백정(白丁)의 원조는 몽골의 달단(韃靼)족이었다.
2018. 11. 02 by 남인식 편집위원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중국 대륙에서 1368년 원나라 멸망 후 북원(北元) 세력의 잔존 세력과 나머지 몽골인 집단 및 변두리에서 기회를 엿보던 몽골인 유력자들 간에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여 몽골고원 동쪽과 요동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한 부족이 몽골어 타타르(塔塔爾, Tatar)의 한자어 표기인 달단(韃靼), 또는 달달(達達)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중국에서는 몽골의 호칭으로 달달을 쓰게 되었는데 그 영향으로 조선에서도 몽골인을 달달인 또는 달자(達子), 달적(達賊) 등으로 불렀으며, 몽골의 개는 달달구자(達達朐子), 몽골의 말은 달달마(達達馬), 몽골의 병사는 달달병(達達兵)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명칭은 대체로 그 대상이 몽골이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여진족이 포함되기도 하였으며, 후대에 이르면서 서달(西達), 즉 서쪽 달단 등으로 구별하게 되는데 이는 일정한 종족이나 부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방향만 가지고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원래 유목 민족이었던 이들 달단인(韃靼人) 들은 원나라 말기, 즉 고려말기에 전란을 피하여 고려로 들어오면서 조선에도 수렵을 위주로 하면서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이 가축을 도살하거나 가죽제품을 제조하면서 화척(禾尺), 수척(水尺), 무자리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들을 다시 조선 초에 백정(白丁)으로 바꿔 불리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화척들은 도살업, 유기(柳器) 및 피물(皮物) 제조업, 수렵, 육류 판매업 등을 주된 생활 수단으로 삼고 유리걸식하며 도적질을 하거나, 집단적으로 생활하면서 위험한 집단이 되었기 때문에 일반 양인들은 이들과의 혼인이나 거주를 꺼렸고, 조선 조정의 단속을 받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594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달단 말(馬)의 종자를 바꾸려고 곡식이나 소나 말을 민간에게 사서 교환하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25권, 세종 6년 9월 25일 정유 1424년 명 영락(永樂) 22년

함길도 감사가 달단 말의 종자 바꾸는 것에 대해 아뢰다

함길도 감사가 계하기를,

"지난번에 내리신 전지(傳旨)에 따라 달단 말(馬)의 종자를 바꾸려고 경원(慶源)·경성(鏡城)에 사는 백성을 시켜서 물으니, 저들 중에 말이 있는 자가 곡식이나 소나 말과 교환할 것을 요구하는데, 곡식과 소와 말은 감영 중에는 없는 것 이온즉, 곡식은 각 고을의 국고에 저장된 것으로 소나 말은 포목과 그 외의 물건으로 민간에서 사서 종마(種馬)를 바꾸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8책 25권 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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