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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105호, 양력 : 11월 16일, 음력 : 10월 9일
[574년 전 오늘 - 축산 소식89] 소(牛)를 도둑질한 자는 곤장 1백대에 ‘도우(盜牛)’라는 글자를 새겼다
2018. 11. 16 by 남인식 편집위원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도적(盜賊)은 개별적인 절도(竊盜), 강도(强盜)에서부터 대규모로 집단화된 산적(山賊), 수적(水賊), 해적(海賊)은 물론 횃불을 들고 떼를 지어 다니며 도둑질을 일삼던 화적을 일컫는 명화적(明火賊)까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이들 도적을 단속하고 근절하기 위해 마련한 규정을 치도사목(治盜事目)이라 하였습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국가 체제와 사회 질서를 이탈해 도발하는 모든 저항 행위를 도적 혹은 적(賊)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를 다스리기 위한 치도책(治盜策)은 단순한 도적에 대한 근절의 의미뿐 아니라 체제와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는 치안책(治安策)의 일환으로 이해되었고, 따라서 포도사목(捕盜事目), 포도절목(捕盜節目), 금도절목(禁盜節目) 등 다양한 사목(事目)과 절목(節目)을 제정해 안정을 도모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이러한 도적중 우마(牛馬) 절도범들은, 소인 경우에는 농가에서 소를 도둑맞으면 논밭을 깊게 갈 수가 없어 농업을 망치게 되고, 말을 도둑맞으면 군사들이 점고(點考) 할 때 까지 기다리다가 적병(賊兵)을 만나서야 말을 개비해 군사력 유실이 커서 국가적인 차원의 다양한 사목(事目) 체계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세종(世宗)대에만 이러한 우마도둑에 대한 논의가 10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당시 조정에서도 여러 절도(竊盜) 행위 중 가장 엄중하게 다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세종 29년 형조(刑曹)에서 보낸 공문에 따르면 우마 도둑이 국가의 큰 걱정으로 ①처음으로 소나 말을 도둑질하여 죽인 자는 결장(決杖) 1백을 하고 오른팔 아랫마디에 ‘도살우(盜殺牛)’나, ‘도살마(盜殺馬)’라는 세 글자를 자자(刺字)하고 동거하는 처자와 함께 섬으로 쫓아내고,

②재범(再犯)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하게 하며, ③처음으로 소나 말을 도둑질하되 죽이지 아니한 자는 결장(決杖) 1백을 하고 오른팔 아랫마디에 ‘도마(盜馬)’나 ‘도우(盜牛)’라는 두 글자를 자자하고, ④재범한 자는 결장(決杖) 1백을 하고 왼팔 아랫마디에 자자하고 동거하는 처자와 함께 섬으로 쫓아내기로 하여 임금의 내락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도둑들은 절도행위를 주도한 수범(首犯)이나 단순히 가담한 종범(從犯)을 구별하지 않으며, 사전(赦前)이나 사후(赦後)임을 물론하고 시행하도록 하여 엄격하게 다루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74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20여 호가 되는 한 마을에 도둑들이 소를 도둑질해 2, 3년 안에 농우(農牛)가 거의 없게 되었다고 임금에게 보고하며 대비책을 논의하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세종실록 106권, 세종 26년 10월 9일 갑인 기사 1444년 명 정통(正統) 9년

도둑 없애는 방책을 의논하다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지금 도적이 많이 다닌다 하니, 이것은 내가 백성의 살림살이를 마련해 주지 못해서, 그들이 살 곳을 잃은 때문이니 내 심히 부끄럽게 여기노라. (중략)"

하였다. 우참찬(右參贊) 권제(權踶)가 아뢰기를,

"신의 농장이 금천현(衿川縣)에 있사온 바, 그 마을에 사는 사람이 한 20여 호가 되옵는데, 도둑놈이 마을 사람의 소를 도둑질해 가므로 2, 3년 안에 농우(農牛)가 거의 없게 되었다 합니다. 신이 또 들으니, 충청도 충주(忠州)에는 어떤 집에 부부(夫婦)만이 살고 있는데, 밤에 도둑놈이 소를 도둑질해 가는 것을 그 집에서 알고서도, 그 놈한테 피해당할까도 무섭고, 또 뒷날의 후환도 염려가 되어서 그만 아무 소리도 못하고, 또한 관에 고소하지도 못하였다 합니다. (중략)"

형조 참판 황치신(黃致身)이 아뢰기를,

"지금 갇혀 있는 도둑놈 하나가 한 달 동안에 말 3필과 소 2마리를 도둑질하여 죽였다 하오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민간의 말과 소가 장차 거의 없어질까가 매우 걱정됩니다. 도둑놈은 비록 발꿈치를 베어 버려도 뒤에 또 도적질을 계속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아침에 은사를 받고도 저녁이면 또 도둑질해서 조금도 징계하여 고치지 아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발꿈치를 베인 자도 과연 또 계속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발꿈치 베는 법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옛날에 극북으로 쫓아낸다[投畀有北]는 말이 있으니, 옛날에도 죄가 무거운 자는 먼 지방으로 쫓아내었던 것이다. 지금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에게도 장물을 계산하여 장물의 많고 적음으로서 죄의 경중을 정해서, 장(杖) 1백과 유(流) 3천 리까지로 함이 어떠할까."

하니, 권제가 또 아뢰기를,

"비록 3천 리 밖으로 귀양보낸다 해도 얼마 안 가서 또 도망쳐 돌아와서 전처럼 도둑질할 것이니, 먼 곳에 보내 보아도 도둑이 적어지는 데는 유익이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도망해 돌아온다 해도 그 왕래하는 동안에 역시 이미 고생과 고난을 겪은 것이 된다."

하니, 권제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 땅으로는 가장 먼 것이 함경도·평안도 두 도의 국경이온데, 국경은 오랑캐 지역과 연접되어 있고, 오랑캐들은 다 불량한 무리이니 거기에 가서 살게 하는 것은 또한 두려운 일입이다."

하고, 호조 판서 정분(鄭笨)도 아뢰기를,

"오랑캐 땅과는 강 하나 사이어서, 만약 강을 건너가서 오랑캐에게 붙어 버리면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주(濟州)는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여서 어디로 갈 데가 없으니, 제주로 귀양보냄이 어떠할까."

한즉, 분이 대답하기를,

"제주는 말이 많이 나는 곳으로서 우리 나라 좋은 말은 다 여기서 납니다. 만약 도둑들이 여기 모여 살게 되면 소와 말을 도둑질하여 죽일 것인즉 그것도 불가합니다."

하고, 대사헌 이견기(李堅基)는 아뢰기를,

"옛날에는 가죽신 신는 자가 드물더니, 요사이 사람들이 다 가죽신을 신기 때문에 가죽 값이 사뭇 치솟아 올라가매, 소와 말을 도둑질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부득이하여 가죽을 쓰면 실로 말릴 수도 없을 것이다."

하고, 임금이 또 말하기를,

"내 도둑에게 경면(黥面)하는 법을 생각해보니, 가난한 백성이 어쩌다 한번 절도질을 하였다가 경면을 당하면, 자기 자취를 어디에 용납할 수가 없어서 더욱 가난하고 궁하게 될 것이므로, 내 심히 안타까워서 이 법을 정지시키고자 하는데 어떠할까."

하니, 권제가 대답하기를,

"도둑이 반드시 가난한 자가 아니고, 모두 호화롭고 부유하고 억세고 용맹한 자들이니 조금도 안타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고, 분(笨)은 아뢰기를,

"신의 집 앞에 부자가 있는데, 근일에 형조에 걸리어 그 가산을 압수하게 되었는데, 신의 집 하인들이 가서 본즉, 도둑질할 때에 쓰던 기구와 기계가 이루 셀 수가 없더라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도둑 없애는 방책을 다시 생각하려니와, 경들도 의정부 및 육조와 함께 충분히 의논하여 아뢰라." (하략)

 

【태백산사고본】 34책 106권 9장

【주】 경면(黥面) : 죄인의 낯에 자자(刺字)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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