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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149호, 양력 : 1월 21일, 음력 : 12월 16일
[556년전 오늘 - 축산 소식133] 한양 인왕산, 북악산, 남산에 호랑이, 표범, 여우가 출현하였다
2019. 01. 21 by 남인식 편집위원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한성부(漢城府)를 에워싸고 있는 동서남북의 네 산을 일컬어 사산(四山)이라 하였으며, 북쪽의 백악산(白岳山,북악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남산),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동쪽의 타락산(駝駱山, 낙산)이 이들 산이었습니다.

당시 사산에는 5명의 산지기를 두어 이를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사산재식감역관(四山栽植監役官)을 두어 소나무의 벌목을 감시하도록 하였고, 이를 어겼을 경우 의금부에서 범인을 색출하고 죄상을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사산의 지맥(地脈)을 보전하기 위하여 도성 안의 사산뿐 아니라 성 밖의 산마루에서도 돌을 캐는 것을 금하였으며, 경작도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이렇게 관리된 사산에는 남산의 경우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이후로 70여년 동안 가꾸고 길러서 소나무는 무려 백만(百萬)여 주(株)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남산 외에도 백악산, 무악산(毋岳山), 성균관동(成均館洞), 인왕산(仁王山) 등에는 소나무가 희소한 곳에 잣나무나 상수리 나무 등을 심게 하도록 전지(傳旨)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이들 산에는 수시로 짐승들이 출현한 기록이 있는데, 세조(世祖)대에는 군사를 동원하여 인왕산, 백악산 두 산에서 몰이를 하게 하여 호랑이를 잡은 바가 있으며, 임금이 백악산에 표범의 자취가 있다고 하자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연굴암(衍屈庵) 동쪽 고개에 행차하여, 화포(火砲)를 쏘게 하여 표범이 놀라서 밖으로 뛰쳐 나오니 쏘아서 죽인 적도 있습니다.

중종(中宗)대에는 남산에 호랑이의 자취가 있고 개를 잡아먹은 자리가 있어 숭례문(崇禮門)과 수구문(水口門)을 일찍 닫고 호랑이를 몰아낼 준비를 한 적이 있으며, 새와 짐승을 기르는 원유사(苑囿司)의 종사관(從事官)이 백악산 밑에 덫을 놓아 조그마한 호랑이 새끼를 잡아다가 올리니 별조궁(別造弓) 한 벌을 하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왕실 친위 군사인 겸사복(兼司僕)이 인왕산에서 표범을 잡아 바치니 임금이 상을 주는 한편 술을 내리고 그 표범은 사옹원(司饔院)으로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종(成宗) 대에는 인왕산에 표범이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해치니 이를 잡도록 명하였으나 잡지 못하였고, 연산군(燕山君) 대에는 노루가 타락산(駝駱山) 성문에서 후원으로 들어오니, 간신이 제거되고 정치와 교화가 융성하여 아무리 미물(微物)이라 하지만 스스로 성중(城中)으로 들어왔으니 대신(大臣)들에게 시를 지어 바치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556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임금이 목멱산(木覓山) 남쪽에 거둥하여, 여우 다섯 마리와 토끼 세 마리를 사냥하는 것을 구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조실록 31권, 세조 9년 12월 16일 경자 기사 1463년 명 천순(天順) 7년

목면산 남쪽에서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홍윤성의 집에 들리다

목멱산(木覓山) 남쪽에 거둥하여 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위내(圍內)에 여우 다섯 마리와 토끼 세 마리가 있으니, 왕세자에게 명하여 이를 쏘게 하였는데, 모두 맞히었다. 드디어 강가의 높다란 언덕에 이르니, 좌상(左廂)·우상(右廂)에 명하여 진(陣)을 치게 하고, 겸사복(兼司僕)과 사자위(獅子衛) 등으로 하여금 우전(羽箭)을 쏘아서 그 승부(勝負)를 겨루게 하였다. 어가(御駕)가 돌아오다가 홍윤성(洪允成)의 집에 거둥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오려고 하는 뜻은 있었는데, 지금 문(門)을 지나치면서 들르지 않는다면 불가(不可)한 것이다."

하니, 홍윤성이 술을 올렸다. 명하여 홍윤성에게 어가(御駕)를 수종(隨從)한 종실(宗室)·재추(宰樞)에게 술을 먹이게 하고, 홍윤성에게 쌀 50석(石)을 내려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11책 31권 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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