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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16호, 양력 : 4월 30일, 음력 : 3월 26일
[50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00] 임금은 쟁기를 잡고 밭을 갈며 왕비는 뽕잎을 따고 고치를 거두었다
2019. 04. 30 by 남인식 편집위원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양잠(養蠶)은 옷감인 비단을 생산하는 수단으로 여성들이 길쌈을 통해 입을 거리를 생산하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왕비가 내외명부(內外命婦) 여성들을 거느리고 잠실(蠶室)에 행차하여 함께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의식인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였습니다.

친잠례는 뽕잎을 따는 친잠례와 누에가 커서 고치를 형성하면 이를 수확하는 수견례(收繭禮)로 나뉘었는데, 왕비가 친잠례를 행할 때는 먼저 채상단(採桑壇)이라고 하는 단을 쌓았고, 주변에는 휘장을 쳐서 다른 곳과 구분하여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머물 천막을 쳤으며, 친잠례를 행하기 직전에는 누에의 신인 선잠(先蠶)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선잠단에서 제사를 올릴 때는 다른 사람을 보내어 대신 행하게 하거나 왕비가 친잠하는 장소에 별도로 친잠단을 쌓고 직접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뽕을 따고 누에를 치기 위해서는 대나무를 쪼개서 엮어 만들며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모양의 광주리, 기다란 뽕나무 가지를 당기기 위한 지팡이 모양의 갈고리, 대나무를 쪼개 발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누에를 키우는 잠박(蠶箔), 잠박을 얹어 놓기 위해 소나무로 만든 구조물인 시렁, 누에 등을 준비하여 시렁 위에 잠박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다시 잠박을 두는 형태로 누에를 놓아길렀습니다.

이때 왕비는 황색 국의(鞠衣)를 입고, 같은 색으로 된 상자에 뽕잎을 따서 넣었는데, 채상단의 남쪽 계단을 이용해 단으로 올라가 다섯 가지의 뽕나무에서 잎을 딴 후 황색 광주리에 넣었으며, 이후에는 수행 여성들이 채상단 주변에서 뽕잎을 따며, 왕비는 이 모습을 채상단의 남쪽에서 관람하였고, 왕비를 수행한 여성들이 따는 뽕나무 가지의 수는 품계에 따라 달랐는데, 1품 이상은 일곱 가지, 그 이하는 아홉 가지를 땄습니다.

왕비와 수행 여성들이 딴 뽕잎은 왕세자빈이 수행 여성들을 거느리고 누에가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가서, 누에를 지키고 있던 잠모(蠶母)에게 주면 뽕잎을 받아 잘게 썰어 누에에게 뿌려 주었는데, 누에가 뽕잎을 다 먹으면 왕세자빈은 수행 여성들을 거느리고 왕비에게 돌아왔으며, 이후 왕비는 왕세자빈 이하 수행 여성들의 수고를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었고, 친잠의식이 끝나면 만조백관은 왕비의 친잠에 하례를 드렸습니다.

또한 누에가 고치를 지어 성견(成繭)이 되면 고치를 거두고 씨고치를 갈무리하는 의식인 수견의(受繭儀)가 있었는데, 내명부에 속한 정6품의 궁인인 상공(尙功)이 대나무로 된 죽상(竹箱)에 고치를 가득 담아 임금과 왕비에게 올리면 고치를 친견한 다음, 왕비는 내명부 정5품인 상의(尙儀), 상의는 종5품 상복(尙服)에게 주어 보관시키고 친잠과정에서 수고한 백관을 위로하는 술과 음식을 내리는 과정으로 끝났습니다.

한편, 임금이 직접 소를 이용하여 밭갈이 하는 모범을 보인 의식인 친경(親耕)에서는 임금이 동적전(東籍田)으로 행차하여 선농단에 제사를 올린 후 소가 끄는 쟁기를 직접 잡고 밀었는데, 임금은 다섯 번에 걸쳐 밀었으며, 이후 관경단(觀耕壇)으로 물러나면, 세자(世子)는 쟁기를 일곱 번 밀었고, 참여한 관료들은 각각 아홉 번씩 밀었으며, 친경 행사 때 가는 밭은 총 100고랑이었습니다.

506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임금의 친경(親耕)과 왕후의 친잠은 백성의 의식(衣食)의 근본을 중히 여겨 천하를 솔선하기 위한 것으로, 정월 길일 기해에 몸소 백관과 기로(耆老)를 거느리고 백묘(百畝)의 적전(籍田)을 갈았으며, 또 삼월에는 왕비가 내·외 명부를 거느리고 다시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감발(感發)하여 힘써 본업에 종사케 하고자 하였으니, 백성을 다스리는 중외 장관은 각각 이같은 뜻을 본받아 두루 촌간에 알려서, 들에는 밭 갈지 않는 지아비가 없고, 집에는 베 짜지 않는 지어미가 없어 곡식과 포백(布帛)이 충족하여 날로 쌓이게 하라고 교서를 내렸습니다.

 

■중종실록 18권, 중종 8년 3월 26일 을미 기사 1513년 명 정덕(正德) 8년

중외에 교서를 내리다

중외에 교서를 내렸다.

"옛적에 임금의 친경(親耕)과 왕후의 친잠은 백성의 의식(衣食)의 근본을 중히 여겨 천하를 솔선하기 위해서였다. 무릇 군·후(君后)의 높음으로도 쟁기와 베틀의 수고를 꺼리지 않고 위에서 주창한다면, 항간 농민이 누군들 흥기하여 힘쓰지 않으랴! 내 덕이 현철한 옛날 임금 같지 못한지라, 몸소 행하여 솔선하는 일에 미덥지 못한 데가 있다. 내가 즉위하여 정사에 임한 지 이제 8년이 되었는데, 백성의 풍습이 날로 투박하여 본업을 버리고 말리(末利)를 좇아 남자는 농사를 힘쓰지 않고 여자는 길쌈을 힘쓰지 않는다. 이리하여 부성한 효과는 이루지 못하고 서로 빈곤에 빠져 들어가고 있으니 내 몹시 부끄럽다.

금년 정월 길일 기해에 몸소 백관과 기로(耆老)를 거느리고 백묘(百畝)의 적전(籍田)을 갈았으며, 또 본월 26일에는 왕비가 내·외 명부를 거느리고 다시 친잠례(親蠶禮)를 행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감발(感發)하여 힘써 본업에 종사케 하고자 하였으니, 백성을 다스리는 중외 장관은 각각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두루 촌간에 알려서, 들에는 밭 갈지 않는 지아비가 없고, 집에는 베 짜지 않는 지어미가 없어 곡식과 포백(布帛)이 충족하여 날로 쌓이게 한다면 거룩한 일이 아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9책 18권 12장

【주】정월 길일 기해 : 29일

      적전(籍田) : 임금의 친경전(親耕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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